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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시작하기 좋은 날이에요. 새로운 달이 시작됐고, 저는 다시 비행기에 몸을 실었어요. 이전에는 한국에 잠시 들어왔다 다시 나가는 식이었지만, 이번에는 유럽에서 3개월을 오롯이 보내야 해요. 이렇게 길게 머무는 건 처음이라, 캐리어도 큰 거 하나 작은 거 하나 총 두 개를 챙겼어요. 혹시 몰라 배낭도 하나 더 챙겼죠. 

이렇게 짐을 늘리게 된 데는 날씨도 한몫했어요. 여름에는 옷의 부피가 작아서 짐 싸는 데 부담이 없는데, 겨울에는 부피가 적어도 2배 이상이니까요. 아우터 몇 개만 챙겨도 금세 캐리어를 가득 채워요. 그래서 물건 하나를 담을 때 생각하고 또 생각하죠. '정말 이게 필요해?라고요.

이번에 이용한 항공사는 'AEROFLOT'인데요. 사실 이곳은 불친절과 수화물 분실, 연착으로 악명높은 항공사 중 하나죠. 그럼에도 이 항공사를 택한 이유는 아주 단순해요. 저렴하거든요.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돈을 아끼는 대신 불안을 선택한 거죠. 조금 씁쓸하게도. 

일단 내부는 쾌적했고 좌석도 마음에 들었어요. 캐리어를 올리느라 낑낑거리고 있는데, 앞 좌석에 있던 외국인 할아버지께서 번쩍 들어 올려 주시곤 저를 향해 말 대신 환하게 웃어 보이셨죠. 도움을 청하지 않았는데 도움을 받게 되면 감동은 배가 되는 것 같아요. 그 뒤로도 몇 번 더 눈이 마주쳤는데,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인자한 미소를 보이셨고, 덕분에 낯선 여정에도 마음이 포근해졌어요.

노트북은 수화물로 보내서 좌석에 달린 모니터를 열심히 뒤적였어요. 어떤 걸 볼까 고민하는데 영화 '인턴'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계속 미뤄 뒀던 영화였는데 드디어 보게 됐네요.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어떤 노년의 삶을 살 게 될지 무척 궁금해졌어요. 시차 적응을 위해 전날 밤을 꼬박 새워서 그런지 잠이 미친 듯이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한참을 자고 일어나서 밥을 먹고, 다시 영화를 보기 위해 모니터를 뒤적이는 것의 반복. 저는 이런 이유로 장거리 비행을 좋아해요. 삶의 기본적인 것에 충실한 것이 너무 당연해지는 시간이잖아요. 이렇게 하루를 보내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마법 같은 시간이죠.

두 번째로 고른 영화는 '뷰티 인사이드'였는데요. 제가 좋아하는 로맨스 영화 중 하나인데, 장면 위로 담담하게 깔리는 내레이션이 참 좋아요. 그리고 영화 속에 프라하가 배경으로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정말 아름답거든요. 이미 몇 번을 반복해서 본 영화지만 오늘따라 장면들이 더 마음에 닿았어요. '지금 내가 저곳으로 가고 있다니'. 갑자기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마냥 마음이 붕-떠오르네요. 

경유지인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땐, '그냥 모스크바에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미치도록 아름다운 날씨였어요. 프라하로 가기 위해서는 한 번의 비행이 더 남았는데, 대기하는 내내 잠에 취해 정신 못 차리고 멍한 상태로 있다가 환승 비행기에 탑승했어요. 사실 기내에서 샌드위치를 나눠줄 때 빼고는 두 번째 비행기에서의 기억이 하나도 없네요. 이륙하기 전부터 착륙할 때까지 계속 잤거든요.

그렇게 긴 하루 끝에 드디어 프라하에 도착했어요. 수화물을 찾아서 나가기만 하면 되는데, 어째서인지 제 캐리어가 보이지 않는 거예요. 잠이 덜 깬 상태로 잠시 의자에 앉아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컨베이어벨트를 넋을 놓고 보고 있던 그때, 낯선 사람이 다가와서 어디서 출발 했냐고 물었어요. 모스크바에서 왔다고 하자, 모스크바 수화물은 여기가 아니라 14번이라고 알려주는 게 아니겠어요? 갑자기 정신이 확 드는 거 있죠. 

그 사람은 제가 엉뚱한 곳에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던 걸까요? 같은 비행기를 탔던 걸까요? '고맙다'고 대답하고 짐을 찾으러 걸어가는데 생각할수록 신기했어요. 그분이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저는 엉뚱한 곳에서 모든 수화물이 다 나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다,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하고 꼼꼼하지 못한 자신을 꾸짖었겠지요.

사실 이번 여행을 떠나올 때는 계획은커녕 심지어 숙소 주소도 모른 채 떠나왔어요.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픽업 요청' 때문이었죠. 공항에서 기사님이 저를 기다린다는 말 한마디가 어찌나 마음이 편하던지요. 의지할 때가 있다는 것은 심적으로 정말 큰 위안이 되는 것 같아요. 특히 타지에서는 더더욱요. 물론 그거 하나 믿고 정말 아무런 준비도 없이 떠나온 저도 참 속 편하다 싶네요.

수화물을 찾고 보안관의 몇 가지 질문을 받은 뒤 출구로 나가니, 제 한국 이름인 '황 다 검'이라고 큼직하게 적힌 종이를 든 할아버지 한 분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서로를 발견하고 우리는 동시에 활짝 웃었는데요. 눈으로 신호를 주고받은 것에 대한 각자의 응답이었어요. 가까이 다가서자 할아버지는 어설프지만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제 이름과 함께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셨어요. 제가 놀란 눈으로 한국말 하실 줄 아냐고 물었더니, 조금밖에 못 한다고 하시면서 아시는 한국말을 몇 개 더 보여주셨죠. 할아버지는 제 짐 카트를 끌고 앞장서기 시작했어요. 제가 하겠다고 했지만, 할아버지의 일이기도 했기에 감사함을 전하며 할아버지 속도에 맞춰 나란히 걸어갔어요. 

차를 타고 숙소로 가는 길, 기내에서 봤던 영화 '인턴'의 장면들이 떠올랐어요. 마치 제가 '앤 해서웨이'이고, 할아버지께서 '로버트 드 니로' 같았죠. 제가 지금 프라하에 있다는 게 마냥 영화 같고, 꿈 같아서였을까요. 창문 밖으로 살짝 엿본 프라하는 익히 들은 것만큼이나 무척 아름다웠어요. 가고 싶다고 생각만 했던 그곳에 제가 와있다니요. 프라하에서 삶이 이렇게 또 시작되었네요.

2016/09/01 프라하에서 Moi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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