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감들도 슬퍼하진 않을 것이다.

Fathers’ Note

다들 어버이날 잘 보내셨나요? 가정의 달을 맞이해, 썬데이 파더스 클럽 멤버들이 GQ Korea 5월호에 기고한 글을 하나씩 소개합니다. 이번 레터는 초등생 아들과 유치원생 딸 아빠 정민 님이 보내요.


중앙일보 페어런츠팀과 진행한 인터뷰 기사도 발행됐어요. 기사는 중앙일보 홈페이지에서 hello! Parents 섹션 구독 후 열람하실 수 있어요. 무엇보다 휴일에 외출을 허락해 준 각자의 배우자에게 감사드립니다 🙇‍♂️

열 살 무렵 책상 맨 아래 고이 간직하던 과일 상자를 선명하게 기억한다. 어느 명절날 제 소임을 다하고 사라질 운명이었던 그 노란색 상자는 아버지의 신들린 테이핑을 거쳐 몇 해는 두고 써도 될 법한, 튼튼한 나만의 수납공간으로 재탄생했다.


그 상자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나만의 보물창고였다. 동그란 딱지와 구슬, 당시 최고 인기였던 골라이온 로봇 장난감과 레고 기사단 피규어, 그리고 자잘한 프라모델 장난감들이 들어 있었다. 하나하나 정성스레 모았던 보물들이었던지라 꺼내 놀다 집어넣을 때가 되면 부서질세라 조심조심 차곡차곡 정돈해 넣곤 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 영화 <토이 스토리 3>를 보러 갔을 때, 그 과일 상자가 퍼뜩 떠올랐다. 대학생이 된 앤디가 상자 속에 간직해 온 장난감들을 보니에게 물려주는 장면을 보며,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내 상자 속 보물들이 생각났다. 행여나 고장 날까 애지중지하며 갖고 놀던 감정이 여전히 생생한데, 정작 그 상자와 어떻게 이별을 고했는지는 깨끗하게 백지로 남아 있었다. 영화 속 앤디처럼 쿨한 모습으로 다른 아이에게 전해주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어쩌면 그렇게 까맣게 잊어버릴 수가 있지?’ 영화관을 나서며 나 자신을 잠시나마 책망했던 기억이 오래 뇌리에 남았다.


정신없이 아이를 낳아 키우다 보니, 어느덧 아이들 방은 갓난아이 시절부터 모아 온 장난감으로 점차 뒤덮이기 시작했다. 얼마 전 주말, 더 이상 내버려 뒀다가는 발 디딜 공간조차 없겠다 싶어 장난감을 정리하기로 마음먹고 하나씩 자루에 담기 시작했다. 아무리 극렬히 저항해도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최대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들에게 일방적인 통보를 날렸다.


“더 이상 갖고 놀지 않는 장난감들은 다 나눠주거나 버려야 해.”

“응? 그래.”


예상 밖의 반응이었다. 그동안 애면글면 모아뒀던 장난감들을 다른 아이들에게 나눠준다는데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순순히 응하다니, 내가 잘못 들었나? 처음엔 못 사서 그렇게 안달했으면서? 잘 때도 늘 꼭 껴안고 자던 인형들도 있는데? 몇 번을 재차 물어도 아이들의 반응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처분해도 좋다고 승낙한 장난감들을 쓸어 담으니 큰 자루로 몇 포대가 나왔다. 10여 년 가까이 동고동락한 장난감들을 그렇게 동네 아이들에게 나눠줄 것, 재활용 센터로 보낼 것, 분리수거함에 넣어 버릴 것으로 따로따로 정리했다. 여전히 티는 별로 안 나지만 그래도 느낌상 조금은 널찍해진 것 같은 아이들 방을 쓸고 닦다 보니, 그제야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아빠인 나는 매일같이 부대끼느라 잘 몰랐지만, 이 녀석들, 어느새 한 뼘 자랐다. 예전에는 죽고 못살던 장난감 친구들과 이제는 제법 쿨하게 이별 인사를 나눠도 되는 나이가 되었다. 그렇게 인생의 다음 단계를 향해 조금씩, 부지런히 나아가고 있다.


그제야 어릴 적 소중히 간직했던 그 과일 상자가 다시 떠올랐다. 한때 애정하던 장난감과의 이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커가는 과정에서 겪는 인생의 통과의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테니. 나는 오랫동안 묵혀왔던 내 보물들에 대한 마음속 미안한 감정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다.


장난감들도 슬퍼하진 않을 것이다. 로보카 폴리는 함께 놀며 어려운 상황에 처한 친구들을 도와야 함을 가르쳐줬고, 슈퍼윙스 호기는 대한민국 말고도 이 세상엔 수많은 나라가 있고,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멋진 장난감 친구들이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데 도움을 줬기에 아이들은 함께 노는 동안 한껏 즐겁고 행복했으며, 그 덕택에 한 발 더 세상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장난감들은 이미 제 역할을 다하고도 남았다. 비록 아이들이 자신의 유년 시절을 함께 빛내준 장난감들과의 이별을 또렷이 기억하진 못한다 해도, 장난감들도 더 이상 아쉬움은 없을 것이다.


“너희들, 그래도 그동안 잘 놀아준 장난감 친구들에게 고마웠다고, 잘 가라고 인사 정도는 해 줘야 하지 않겠어?”


이별의 순간, 아니 인생의 통과의례를 먼저 겪은 아빠로서, 적어도 나중에 아이들이 이 순간을 조금은 더 생생하게 기억하길 바라며 한마디 거들었다. 아이들은 짐짓 부끄러운 듯 쭈뼛쭈뼛 걸어 나와 제 장난감들에 작별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멋지게 이별해놓고 설마 이번 어린이날에 새 장난감 또 사달라 하진 않겠지?’ 생활인 아빠로서의 소심한 바람이 가슴속에서 올라오지만, 들킬까 지그시 눌러본다.


아이들보다 못난 아빠가 되진 말자며.


그간 아이들의 동반자로서 훌륭히 제 몫을 다해 준 장난감들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어린 시절 상상력을 한껏 고양시켜줬던 그 시절 내 장난감들에게도 이제서나마 경의를 표한다.

정민@jm.bae.20

다음 책이 언제 나올 지 모르는 에세이스트. 윈스턴 처칠의 '절대,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마라'라는 말을 좋아한다. 죽기 전에 아이들과 함께 고향 야구팀의 우승을 보는 것이 꿈이다. 《아들로 산다는 건 아빠로 산다는 건》을 썼다.

지난 레터 좋은 아빠의 조건에 관한 구독자 분들의 의견 중 일부를 추려 소개할게요. 다들 소중한 의견 주셔서 고맙습니다.

1. “저도 40대에 아이를 낳아보니 왜 미리 낳지 않았지! 라는 생각이 가끔 들어요. 한편 지금이니까 아기를 이렇게 나름 즐겁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물론 아침에 눈 뜨는 건 너무나 힘든 일…) 가끔 아이가 대학에 갈 무렵을 생각하면 현타가 오지만, 저희 부부 삶의 가장 좋은 때에 아이가 찾아왔다는 걸 잊지 말아야겠어요. 실제 나이보다 더 건강하고 아름다운 부모가 되고자 소파에서 일어나 스트레칭도 하도 마스크팩도 하고요 :)” (유키농 님)

2. “피봇팅과 육아라니. 농구인으로서 고개를 끄덕였어요. 육아는 무언가 포기할 것들이 잔뜩 생기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관점을 달리 해보게 되네요. 아직 자녀 계획은 없지만 썬파클 레터 재미있게 읽고 있어요! 나중에 책으로 출판되는 상상까지 하면서요. 응원합니다!” (정예예 님)


3. “아직 미숙한 30대 초반. 한 아이의 아빠가 된 지 9개월이 됐습니다. 이제 코로나 제한조치가 해제되고, 주변 지인들은 삼삼오오 약속을 잡고 대외활동을 하는데, 집으로만 향하고 있는 E 성향의 자신이 못내 아쉬웠어요. 그러나 이번 편지를 읽고 아빠의 역할을 재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내 아이는 홀로서기를 연습하며, 걷기에 도전하고 옹알이를 하며 말을 익혀가는데, 철없는 아빠는 과거에 머물며 놀 생각만 하다니… 많이 반성했습니다.

아내의 복직과 함께 저는 육아휴직에 들어갑니다. 가보지 않은 길이고, 일을 쉰다는 상황이 두렵지만 제 삶의 미래를 모색하며 아이와 좀 더 시간을 보내며 지내야겠어요. 우연히 찾아온 썬데이 파더스 클럽. 매번 좋은 글에 공감하고, 속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앞으로도 대한민국 부모님의 글을 읽으며 힘을 얻겠습니다.” (철부지남편 님)

님, 오늘 보내드린 편지는 어땠나요? 썬데이 파더스 클럽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제안/피드백/질문이 있다면 아래 링크를 통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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