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생각보다 바다는 따듯했고, 파도는 잔잔해졌어.

날 집어삼킬 줄 알았던 감정의 바다는,

내 발로 들어가자 오히려 다정하던걸.

 

그치만 이름아,

난 이 바다에 언제까지고 빠져 있고 싶은 건 아니야.

이 바다를 빠져나오지 못하면 어쩌나

두렵기도 했거든.


아무리 따듯한 바다여도,

우린 결국 모래사장으로 나와 햇볕에 서잖아

얼마간 몸을 말리고, 돌아갈 곳으로-

남은 오늘로,

또 내일로 걸어가잖아.

그래서 난춘을, 도망가자를 듣고 또 들었어.

‘오늘을 살아내고 우리 내일로 가자’는 말을,

‘도망가자, 그리고 돌아오자 씩씩하게’

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


오늘이 무거웠고, 내일이 무서웠지만

실은 무거운 오늘도 살아내고 싶었고,

무서운 내일로 씩씩하게 가고 싶었던 거야.

그렇게 새소년과 선우정아의 목소리에 남은 감정들을 토해냈어.

 

-


그러다 문득 드뷔시의 달빛이 듣고 싶었어.


원래 찾아듣던 적도 한 번 없었는데 말야, 신기한 일이지. 엄마가 날 임신했을 때 태교로 클래식을 그렇게 들려줬다는데, 그래서였을까? 엉엉 울고 보채다가도 클래식을 들려주면 울음을 뚝 그치곤 했대.

그렇게 한 시간을 들었을까. 파도처럼 떨리던 내 숨도 조금씩 잔잔해지기 시작했어. 알 수 없는 이유로, 날갯짓을 하는 엄마가 떠올랐고 이내, 이곳은 엄마의 품 속- 혹은 배 속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 포근하고 유유히 헤엄치던 그 속에서의 감정이 틀어진 건지도 몰라. 어쩌면 27년이 흐르고서야 그 기억을, 감정을 되찾은 건지도.


가장 평화롭고, 포근하던

그 온전한 세계에서의 기억을.

그렇게 달빛을 따라 볕으로, 또 너에게로 뚜벅뚜벅 걸어가다보니 어느새 나는 바다 밖을 나와 있었어. 응 맞아, 생각보다도 너는 내게 참 소중한 존재란다.

나를 바다 밖으로 이끌어줄 수 있을만큼.

 

몸의 물기가 가시기도 전에 이 이야기들을 써내려 갔어. 이 감정들을, 감정의 바다를 너에게 꼭 나누고 싶었거든. 어떻게든 너에게 이걸 나누겠다고 노트북을 펴고 키보드를 투닥이는데, 노트북 화면에 비친 눈이 벌개진 나를 보니까 웃음이 나오더라. 그리고 문득 행복했어. 나는 참 감정을 좋아하는구나. 내가 사랑하는 일을 하고 있구나 싶어서.


나를 지독히도 짓누르는 그게-

결국엔 내가 내일로 씩씩하게

나아가고 싶은 이유기도 했던 거야.


그리고 무트가 보고 싶었어.

나와 이 모든 여정을 함께하고 있는 그 아이에게 이 순간을 공유해주고 싶더라구. 문득, 그 아이의 바다 속이 궁금했어. 매일같이 옆에 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더라도, 마주본 지는 오래되었거든. 깊은 바다를 인 눈을 보이다가도, 장난꾸러기처럼 떠오르던 그 아이의 눈에 무엇이 들었는지 기억이 안 나는 거 있지. 1년 전 우리가 했던 인터뷰 답변을 봤는데, ‘온전히 나의 스위치가 켜져 있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던 무트의 답변이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지더라. 그렇게 무트에게 쪽지를 썼어. 난 감정의 바다에 다녀왔노라고, 너는 요즘 어떻냐고, 여전히 그 스위치는 켜져 있냐고- 그저 너가 행복하길 바란다고 쪽지를 써 그 아이의 책상 위에 붙여두고 쇼룸을 나왔어.

이름아, 너는 지금 편안하니?


언젠가, 무트가 내게 요즘 부쩍 무표정인 것 같다며 편안한지 물었었어. 그렇다고 대충 답하고 넘겼는데- 실은 난 편안하지 않았던 거야. 돌이켜보면, 참 오래간 감정들을 억눌러 왔었어. 감정에 휘둘리는 게 싫었고, 감정들에 여유를 내어주기엔 내겐 틈이 없었거든. 그걸 그냥 ‘평화’라고 대충 이름 붙여두고는- 내가 편안하다고 믿은 거야. 저 밑 바다에서 파도가 우는지도 모르고, 안개가 깔리는지도 모르고.

 

만일 너가 감정의 바다에 빠질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면 말야.


한 번 빠져보는 것도 괜찮아.


아무 이유도 찾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거스르는 파도는 세차고 무섭지만, 내 몸을 맡긴 파도는 다정하고- 포근하기도 하거든.

한 번도 간 적 없는 바다였지만,


너를 제일 잘 아는 곳이자-

너가 제일 잘 아는 곳일 수도 있어.


그치만 이름아,

나는 너의 바다가 얼마나 깊은지 몰라.

감히 내가 어떻게 너의 바다를 가늠할까.

 

실은, 나도 여전히 감정의 바다가 무서워

안겨봤던 바다지만,

여전히- 삼켜질까 두려워.

 

모래 사장으로 나왔지만, 또 한 편으로는 이 모래 사장이 금세 진흙이- 검은 입이 되어 나를 다시 바다로 끌어내릴까 두려워. 한 발은 바다 위에, 한 발은 모래 사장 위에 걸치고 줄타기를 하는 기분이기도 해.

그래서 감히, 네게 빠지란 말을 하기가 어려워. 빠져보는 것도 괜찮다는 말이 주제넘은 말일까 겁이 나.

 

그치만 이름아,

만일 너가 빠지기로 결심했다면,

아님 이미 빠져 있다면-

 

빠질 것을 두려워 하다가,

용기를 내어 빠졌다가,

유영하다가-

다시 걸어나온 나의 이야기를,

달빛을 기억해줄래?


그리고 내가 지을 한 척의 배를 떠올려줄래?

나는 말야, 언젠가 다시 용기를 내

감정의 바다에 빠질 거야.

그리고 햇볕으로 걸어 나왔던 그 때를,

노랫말들과 얼굴, 목소리, 품속을,

희고 따듯한 나의 고양이를,

지난 편지에 대한 너의 답장을,

그리고 지금 이걸 읽고 있는 너를 떠올릴거야.

 

그리고 활짝 핀 벚꽃, 때마다 돌아오는 초승달, 맛있는 커피 한 잔, 스며드는 햇볕들을 모아둘거야. 별거 아니지만 전부인 것들 말야.


그렇게 작지만 튼튼한 배를 하나 지을 거야.

휩쓸리지 않도록, 삼켜지지 않도록.

 



우리 언젠가 바다에서 길을 잃은 서로를 만난다면,

그때 만일 배가 있다면-

서로를 태워주자.


그렇게 우리 무엇이든 붙잡고,

다시 볕으로 가자.

나의, 너의 얼굴 위에 빛이 스며들 때까지.

 


2022.4.10

from.

달빛과 햇볕이 공존하는 배 위에서, 무늬


ps. 드뷔시의 달빛을 듣고 싶다면,

조성진 피아니스트님이 연주하신 곡을 추천해

무늬의 '감정의 바다'에 대한 편지는
여기서 마침표를 찍을게요.

지난 편지에 모인 답장들을 읽으며 편지를 쓰기 참 잘했다는 생각을 몇 번이고 했는지 몰라요. 답장들을 읽으며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가 묘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제가 받은 감동을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가 어렵네요.
바다에서 함께 헤엄칠 수 있는, 그리고 볕으로 이끌어줄 수 있는 소중한 인연들을 만나 벅찹니다.

소중한 이야기들을 나눠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해요.
이 편지가 여러분이 바다에 빠질 수 있는 용기,
혹은 헤어나올 수 있는 작은 힘이 되었으면 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또 편지할게요!

-무늬 드림

슬프지만😥
그만 받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