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께 보내는 여섯 번째 흄세레터

천희란 소설가의 리뷰를 담은 지난 레터, 어떻게 읽으셨나요? 집중력 있는 사유로 여성 서사를 꾸준히 다뤄온 작가의 글답게 알쏭달쏭했던 《회색 여인》의 숨겨진 의미들까지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을 여러 번 읽은 담당 편집자까지 미처 짐작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신기하기도 했고요. 《회색 여인》은 결말을 쉽게 짐작할 수 없는 ‘고딕 스릴러’ 세 편을 모은 책인 만큼 작품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보태주는 분들이 많았는데요, 흄세레터 6호에서는 《회색 여인》에서 가장 심장이 ‘쫄깃해지는’ 장면을 공개하고, 작품을 꼼꼼하게 읽은 박현주 작가와 동아일보 이호재 기자의 서평도 소개하고자 합니다.

소설의 미리보기는 흄&세가 우연히(!) 같은 부분을 뽑지 않는 이상 각자 한 장면씩 소개하기로 했었는데요, 《회색 여인》의 미리보기는 흄이 고른 부분만 전해드리게 되었습니다(몸과 마음이 약해지기 쉬운 시기입니다. 여러분 건강 관리 잘하셔요😭).

마지막으로 피드백 이벤트와 리뷰대회도 계속 진행 중이니 놓치지 마시고요!

《회색 여인》 미리보기

투렐 씨가 엄하고 위협적인 투로 말했어. 누구도 자기 구역을 엿봐선 안 된다고, 만약 내게 온 편지가 있고, 그걸 내게 전달해야겠다는 판단이 서면 반드시 전달하겠다고 했지. 그러고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경고가 될 거라며, 아망테의 손에서 촛불을 빼앗고는 방에서 내쫓았어. 그사이 남편의 동료들은 시체를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밀어 넣으려고 조심스럽게 막아섰어. 아망테가 나간 뒤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어. 이제 나는 도망가고 싶어도 도망갈 방법이 없어져버렸지. 난 그저 내게 벌어진 일이 뭐든 간에 얼른 끝나기만을 바랐어. 너무 긴장해서 더는 버티기 힘들었거든. 아망테가 충분히 멀어졌다 싶었을 때 두 사람이 남편에게 몹시 화를 내며 아망테를 붙잡아 입을 막지 않은 걸 질책하기 시작했어. 그중 한 명은 화를 못 이기고 시체를 발로 차기까지 했어. 그러면서 아망테가 죽은 사람의 얼굴을 본 것 같다며 아망테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어. 다들 동등한 지위를 가진 것처럼 말했지만, 말투에서 두려워하는 기색이 느껴졌어. 아마 남편이 두 사람의 상사거나 대장이었나봐. 남편은 그렇게 사소한 일에 힘을 낭비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라며 그들을 비웃었어. 그러고는 십중팔구 아망테는 사실만 말했을 거고, 주인 방에 몰래 들어갔다가 주인에게 들킨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겁했을 테고, 그대로 돌아가게 해준 걸 그저 고마워할 거라고 설명했어. 오히려 이 일 때문에 한밤중에 자신이 갑자기 돌아왔다는 걸 내게 설명하기 쉬워졌다는 말도 덧붙였어. 그러나 남편의 동료들은 남편이 결혼한 후로 잘 차려입고 좋은 향수를 쓰는 것 말고 다른 일에는 관심이 없어졌다며 이번엔 나를 헐뜯었어. 그러면서 나보다 더 예쁘고 씩씩한 여자를 스무 명은 소개해줄 수 있었다고 말했어. 남편은 자기한텐 내가 잘 어울린다고 조용히 대답했어. 이렇게 옥신각신하는 중에도 그들은 시체에 대고 계속 뭔가를 했지만, 내 눈엔 잘 보이지 않았어. 이따금 시체를 뒤지느라 말을 멈춘다는 건 알 수 있었어. 그러고는 다시 쿵 소리 나게 시체를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뒤 또 입씨름했지. 그들은 격분해서 남편을 공격했고, 남편의 조롱하고 멸시하는 듯한 대답과 웃음에 분통을 터뜨렸어. 아, 남편이 시체를 들어 올려 값나가는 옷을 벗겨내더니 카를스루에의 루프레히트네 작은 응접실에서 재치 있는 말을 주고받을 때처럼 유쾌하게 웃었어. 바로 그 순간부터 남편에 대한 미움과 두려움이 생겨났지. 남편은 이쯤에서 상황을 정리하려는 듯 냉정하고 강한 목소리로 말했어.

 

“자, 친구들, 이미 너희도 알고 있어서 새삼스럽게 말하지 않으려 했지만 다시 한번 다짐할게. 내 아내가 내 일에 관해 필요 이상으로 많이 알게 되는 때가 온다면, 그날이 아내의 제삿날이 될 거야. 빅토린 기억나지? 부디 좋아하는 건 다 하고 살되 아무것도 묻지 말고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충고했는데도 내 일에 관해 멋대로 지껄이다가 결국 먼 곳으로 갔잖아. 파리보다 더 먼 곳으로 말이야.”

 

“하지만 이번엔 달라. 빅토린 부인이 모든 걸 알고 있고, 입도 엄청 싸다는 사실은 우리도 미리 알고 있었잖아. 하지만 이 여잔 엄청난 걸 발견하고도 입 하나 벙긋하지 않을 사람이야. 아주 음흉해 보여. 좋은 기회가 와서 우리가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찰나, 스트라스부르에서 경찰들이 우리를 덮칠지도 몰라. 온갖 간교를 부리는 네 예쁜 인형 덕분에.”

 

이 말을 들은 투렐 씨는 깔보기만 하던 무심한 태도에서 벗어나 이를 악물며 맹세했어. “자! 앙리, 이 날카로운 단검을 봐. 만약 내 아내가 입을 나불거려 경찰이 우리를 덮치기 전에 아내의 입을 틀어막지 못한다면, 저 칼날을 내 심장에 박아버려. 내가 ‘대지주’가 아니라 ‘쇼푀르’라는 산적의 우두머리는 아닐까 조금이라도 의심해보라지. 그날로 빅토린 신세가 될 테니까.”

 

“네 아내가 너보다 한 수 위일걸. 여자들은 내가 좀 알지. 원래 그렇게 조용한 여자들이 악마라니까. 네가 집을 비우는 새 그 여자가 우리를 찢어 죽일 비밀을 알아내서 먼저 도망칠지도 몰라.”

 

“흥!” 그가 코웃음을 치더니 덧붙였어. “갈 테면 가라지. 어딜 가든 내가 따라갈 거니까.”(〈회색 여인〉, 48∼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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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남편이 살인자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누군가에 대해 잘 안다고 쉽게 단정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누군가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온갖 공포가 집약된 이 장면을 보고 나니 어쩐지 브로콜리너마저의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라는 노래가 떠오르더라고요. “단정하는 사람을 믿지 말아요∼😔”

어두운 저택의 비밀,

고딕 스릴러의 으스스한 매력


“여성과 공포, 이 두 단어는 으스스하면서도 익숙한 병치를 이룬다. 공포는 단순히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두려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장 일상적이고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는 위협, 거기서 발생한 무력함이 여성들을 사로잡는다. 과거의 여성 소설가들이 전하는 이야기에서 이런 익숙한 감정을 발견할 때 지금도 여성의 삶을 휩싼 공포는 여전하다는 씁쓸한 사실을 새삼 인식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연대감도 함께 피어난다. 외딴 성의 어둠에 갇혔을 때도, 우리는 혼자가 아니었다.”


출처: 한겨레 ‘박현주의 장르문학읽기’

가려져 있던 ‘세계의 절반’,

새 전집으로 읽다


“어떻게 저런 억압을 받았을까 싶지만 200년 전 여성들에게는 일상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독자들도 신선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일까. 그동안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책인데도 출간 직후 여러 서점에서 고전 분야 베스트셀러 순위에 들었다. 2016년 출간된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민음사) 이후 한국문학을 주도하던 여성이라는 주제가 이제는 세계문학으로 확장된 것이다.”


출처: 동아일보 ‘이호재의 띠지 풀고 책 수다’

4개월마다 만나는
하나의 테마, 다섯 편의 클래식

001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 박아람 옮김

002색 여인

엘리자베스 개스켈 | 이리나 옮김

003 석류의 씨

이디스 워튼 | 송은주 옮김

004 사악한 목소리

버넌 리 | 김선형 옮김

005 초대받지 못한 자

도러시 매카들 | 이나경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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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세레터 6호 이벤트 당첨자는 3월 18일 발행되는 흄세레터 7호에서 발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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