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께 보내는 열다섯 번째 흄세레터

얼마 전 SNS에서 이런 문구를 봤어요. "인간은 왜 혼자 살면 외롭고 둘이 살면 빡치는가." 정말이지 영원한 딜레마가 아닐까 싶은데요, 여러분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외로움과 연결되고자 하는 욕망, 빡침을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하다가 이제는 '느슨하지만 강한 연결'이 베스트가 아닐까 생각한답니다.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인 것 같지만요.😅

오늘은 이병률 시인의 에세이 한 편을 소개하려 합니다. 시인은 외로움과 관계, 여행과 사랑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요?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의 주인공 아셴바흐에게 쓰는 한 편의 편지, 지금 바로 소개할게요.

어떤 아름다움은 어려워서 아프다


아셴바흐 씨, 가방을 잠시 내려놓으세요. 그 가방을 가져가기엔 너무 많은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 멀리 베네치아까지 가져갈 수 없을뿐더러 그 가방에 든 것들 중 절반은 쓰지 않을 것들입니다. 더군다나 가방 때문에 가야 할 길이 멀게 느껴진다면 그 가방이 뭐가 대수겠어요.

가방을 내려놓았다면 이번엔 자신을 내려놓으세요. 우리가 버거워하는 무게는 내일이라도 당장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꿈 따위로 무거운 거예요.

 

당신은 외롭습니다, 소설 속의 이런 문장을 통해 당신 외로움의 상태를 읽었습니다. “외로움이 독창적인 것, 과감하면서도 낯선 아름다운 것, 시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외로움은 불합리한 것, 균형 잡히지 않은 것, 용인되지 않는 부조리한 것도 만들어낸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외롭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외로움이 한 인간을 어떤 방식으로 몰아가기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평화와 고요에 관여한다면 그대로 두면 됩니다. 그러니 외로움을 잘 배양해야 하는 수밖에요.

 

우리는, 눈에도 마음에도 지퍼가 달려 있다는 생각이에요. 아무 관심이 안 생기는 사람한테는 굳게 잠겨 있다가도 관심이 가는 사람이 생기면 동시에 눈과 마음의 지퍼는 열리게 돼 있거든요. 그래도 열 수도 있고 닫을 수도 있으니 참 좋아요. 열리기만 하고 닫을 수 없다거나 닫기만 하고 열 수 없다면 그건 정말, 그 자체로 감옥일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바다에서 소년을 보았습니다.

 

그래요. 아셴바흐 씨는 베네치아에서 누구를 만나, 어떤 상태였습니까.

 

남자는 자신을 돌봐주는 어머니 같은 품의 존재가 아닌, 자기가 보살펴주고 행복하게 해줄 존재에게서 사랑을 느낀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남자에게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그저 인간은 인간을 어쩔 수 없이 사랑하면서 살아간다는 영역의 이야기일 겁니다.

 

세계지도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조금 이상한 부분들을 발견하게 돼요. ‘어떻게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국경이 자로 잰 듯이 일직선으로 끊어져 있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가 그런 생각도 하게 돼요. ‘이거 지도 만드는 사람이, 귀찮아서 이렇게 한 거 아닐까?’ 하지만 실제로 나라와 나라가 나뉠 때 지도 위에다, 자를 올려놓고 선을 그어서, 국경을 정한 경우가 많이 있어서 그런 거래요.

아셴바흐 씨, 우리도 가끔은 우리 감정 위에 자를 올려놓고 정확히 감정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먹은 이 마음이 진짜를 향해 있는지 아니면 기분 때문인지 잘 모를 때도 있습니다. 아니면 어느 한 사람한테 계속해서 이 감정을 유지해도 되는 건지 어떤지 판단이 안 설 때도 있어요. 베네치아의 리도 해변에서, 당신을 따라다녔던 선, 하나가 있었다고 가정해봐요.

우린 항상 경계에 살고 있습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의 경계. 좋아하는 사람과 안 좋아하는 사람의 경계. 좋은 예감과 안 좋은 예감의 경계. 당신은 그 선, 바깥으로 걸었을까요, 아니면 그 선, 안쪽으로 걸었을까요?

 

아셴바흐 씨는 소년의 안쪽을 걸었을까요, 바깥쪽을 걸었을까요. 당신의 시선이 닿던, 소년에게서 벗겨낸 덧없음을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털어내지 않는 아셴바흐 씨.

입상과 거울! 아셴바흐의 눈은 거기 푸른 바다 가장자리에 서 있는 고귀한 형체를 감싸 안았다. 그는 열광적인 환희에 사로잡혀 아름다움 자체, 신의 생각이 표출된 형태, 정신 속에 살아 있는 유일하고 순수한 완벽함을 그 눈빛만으로 이해한다고 믿었다. 그 완벽함의 인간적인 모상과 비유가 숭배받기 위해 여기 경쾌하고 사랑스럽게 제시되어 있었다. 그것은 도취였다. 노년에 접어든 예술가는 서슴없이, 그야말로 탐욕스럽게 그 도취를 반가이 맞이했다. 그의 정신은 산고를 겪었고, 그의 교양은 격앙되었으며, 그의 기억은 젊은 시절에 받아들였지만 한 번도 스스로 불길을 살린 적이 없는 태고의 생각들을 일깨웠다.(83쪽)

네, 당신이 아름다운 소년 타지오를 보고 이렇게 출렁였던 것처럼 나는 베네치아라는 도시를 앓았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구요. 나는 살면서 ‘베네치아에서 살고 싶어요’라는 말을 가장 많이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베네치아에서 죽어야 해요. 그래야 거기서 태어날 수 있으니까요’라는 말은 이어서 한 말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신뢰와 감탄을 한 몸에 받았던 시인 아셴바흐 씨, 예전에 우리 인간은 무인도였대요. 그때 우리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우리는 그렇게 혼자였답니다. 그런데 혼자인 게 너무 힘이 들어서 다른 무인도하고 가까워지면 어떨까 생각했대요. 그래서 무인도는 하나씩 둘씩 가까워지고 그게 땅이 됐대요.

예전에 무인도였던 우리는 무인도를 만나 더 이상 무인도가 되지 않은 거래요. 땅을 이어 붙였고 나눠진 하늘을 이어 붙여서 그 아래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대요. 외로움이란 말이 없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우리들은 무인도라는 말을 잊어갔고 그 자리에 ‘사랑’이라는 말이 오게 된 거래요.

아셴바흐 씨, 당신은 당신의 영혼에서 빠져나간 조각 하나를 베네치아에서 만난 것입니다. 그 조각이 당신 얼굴에 닿자, 당신은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영혼에서 분리된 조각이 있었다는 사실을 찾아낸 것입니다. 우리는 나이 들어갈수록 잃어만 갑니다. 만회하기 어려운 것들이 늘어만 갑니다. 소년에게 마음을 전하지 않았다고 해서 간단해지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 다고 아주 오래전 한 몸에 가까웠던 무인도를 침묵으로 가려야 하는가요. “신적인 인간의 아름다움” 앞이니 그래야 마땅했을까요.


마모된 자신을 상승시키기 위한 방식이 여행이겠지요. 당신은 그 여행에서 사라짐으로써 사슬을 끊었습니다. 당신이 설계한 이번 삶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쪽으로, 불멸의 감정을 저만치 대칭으로 놓아둔 채 생의 마지막 페이지를 접었습니다. 사랑할 힘은, 그 아름다움의 힘은 다음 생으로 넘기세요. 그것도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죽어서도 자신들의 일을 할 테니까요. 아셴바흐 씨, 우리 다시 태어나서 베네치아에서 스치기로 해요. 그렇게 친구 해요!

이병률 |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펴낸 책으로는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눈사람 여관》, 《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산문집 《끌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내 옆에 있는 사람》, 《혼자가 혼자에게》 등이 있다. 현대시학작품상, 발견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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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테마, 다섯 편의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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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2. 이국의 사랑
006 베네치아에서의 죽음‧토니오 크뢰거

토마스 만 | 김인순 옮김

007 그녀와 그

조르주 상드 | 조재룡 옮김

008 녹색의 장원

윌리엄 허드슨 | 김선형 옮김

009 폴과 비르지니

베르나르댕 드 생피에르 | 김현준 옮김

010 도즈워스

싱클레어 루이스 | 이나경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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