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b 6.0 프로젝트 X 조예은
『핑거팁 메모리』, 2022


모든 건 전부 손가락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방, 사방이 기억들이에요.

물건의 기억들이 저를 좀먹고 있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요.


1. 나쁜 손가락

 

안녕하세요? 저는 소라 고등학교 3학년 4반에 재학 중인 소라입니다. 성이 소, 이름이 라에요. 다니는 학교와 이름이 겹치다니. 귀여운 우연이죠? 제가 이렇게 학생으로서 모든 신상을 공개하는 것은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이 전부 사실임을 보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정체를 숨긴 사람이 아무리 진실을 주장해봤자 와닿지도, 믿지도 않을 테니까요. 이건 제가 여러분에게 보내는 SOS, 구조요청, 혹은 경고입니다. 말투가 너무 딱딱해도 이해해 주세요. 미리 적어둔 대본을 보고 읽고 있거든요. 스스로 영상을 준비하는 건 처음이라 많이 떨려요.

혹시 누군가 저를 알아보시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겠네요. 물론 알아보지 못하는 분들이 더 많겠죠. 그래서 준비했답니다. 짧은 자기소개 타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방송에 소개된 것 먼저 보여드릴게요. 2018년 1월 5일 자 지역방송 [궁금한 아이들] 78회차 방영분입니다. 다들 2020년까지 방영되었던 이 프로그램을 기억하나요? 처음엔 영재 어린이들을 소개하는 방송이었는데, 점점 영재가 아니라 그냥 눈에 띄는 아이들을 무작위로 소개하는 방향으로 바뀌더니 나중에는 어린이 기인 열전이 되고 말았죠. 고양이와 대화할 수 있는 아이, 머리카락이 엄청 빨리 자라는 아이, 원주율의 숫자를 백 개까지 외울 수 있는 아이가 나왔어요. 그리고 저는 78회차에 물건의 기억을 읽는 아이로 소개되었습니다.

멋진 소라 삔을 하고 있는 소라 어린이! 물건을 만지면 기억을 읽을 수 있다는 게 사실일까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한번 보여줄 수 있겠니? (고개를 끄덕인다.) 여기 물건들 중에 언니의 할머니가 제일 아끼는 건 뭘까? (노리개, 화분, 손수건. 아이는 물건들을 스치듯 만진다. 그리고 노리개를 가리킨다.) 할머니의 엄마가 남겨주신 물건이에요. (와! 정답이란다! 대단한걸? 아이는 눈을 깜빡이고 계속 말한다.)
두분 다 돌아가셨어요. 할머니의 엄마는 전쟁에서, 할머니는 병으로요. 돌아가실 때 혼자였어요. 너무너무 외로워서 노리개를 꽉 쥐고 있었어요. … 돌아가신 분 물건을 저에게 가져온 이유가 뭐예요? 언니는 그때 어디에 있었어요? 왜 할머니 옆에 있어 주지 않았어요? (불길한 노이즈. 당황하며 수군거리는 목소리.) 다, 다른 물건으로 해볼까? 컵라면을 마지막으로 만진 사람이 누구인지 맞추는 건 어때? (아이는 카메라를 노려본다.)

찾아보니 이런 제 능력을 보고 사이코메트리라고 부르더라구요. 영화나 드라마 소재로도 종종 쓰이구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쓰레기장에 버려진 어떤 화병이 있어요. 원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이 부서져 파편만 남은 화병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이 원래 어떤 모양이었는지 알 수 있어요. 손에 닿기만 한다면요. 화병이 어떤 꽃을 담았는지, 주인이 누구였는지, 누가 화병을 깨뜨렸는지 까지도요.

이 괴상한 능력을 처음 지칭한 사람은 뜬금없이도 남북전쟁 시기의 지질학자였다고 합니다. 화석을 이마에 가져다 대면 땅의 기억이 보인다나 뭐라나…… 책까지 냈다는데 제가 보기엔 좀 수상쩍어요. 물론 읽어보진 않았습니다. 그 시절 학자라는 사람이 쓴 글은 뭐가 되었든 재미없을 게 분명하니까요.

방영 후 프로그램은 너무 대본 티가 많이 난다며 욕을 먹었습니다. 몇몇 무속인 유튜버들은 저에게 신기가 있다며 분석 영상을 만들었죠. 우습게도 연기를 잘한다며 아역 배우 캐스팅을 받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광고도 몇 개 찍었구요. 이쯤에서 여러분이 궁금해하실 걸 압니다. 재미도 없는 후일담이 아니라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겠죠.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말은 딱 하나입니다.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저에게 미래가 있다면 말이죠. (웃음)

여기부터 이 영상을 계속 볼지, 말지는 여러분의 의지에 달려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굳이 제 능력의 진위 여부를 증명하려 하지 않을 거예요. 이 영상은 [궁금한 아이들]이 아니니까요. 애초에 저는 이걸 과연 능력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지, 능력이라는 거창한 말보다는 불행하게 발현한 기형적 기질 정도에 가깝지 않나……. 어쨌든, 계속해보겠습니다. 중요한 건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영상을 끝까지 보시면, 믿게 되실 겁니다.

 

아마 아홉 살 때였을 겁니다. 아빠는 그때 판석 공장에 다녔는데, 큼지막한 절단 기계가 있었어요. 단두대처럼 철판을 절단낼 수 있는 기계였습니다. 저는 그 기계의 모양이 꼭 피아노를 닮았다고 생각했고, 종종 아빠 몰래 공장에 가서 놀았어요. 겁이 없었죠. 맞벌이인 부모님은 저에게 관심이 없었고요. 그리고 당연하게도, 사고가 벌어졌습니다. 모두들 예상할 수 있는 사고요. 제 오른손 다섯 손가락이 모두 잘렸거든요. 너무 끔찍해서 지역 신문에 기사가 날 정도였답니다. 자신의 떨어져 나간 신체를 보는 기분을 아시나요? 전… 꼭 핫소스에 절인 소시지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제 말투가 너무 진지하고 딱딱해서 적응 되지 않아요. 하지만 원래 말투는 너무 가벼워서 어쩔 수가 없음.)

다시 눈을 떴을 땐 사흘이 넘게 지나 있더군요. 그리고 손가락도 다시 원래 자리에 돌아와 있었습니다. 봉합 부위에는 꼭 프랑켄슈타인의 피부처럼 검은 실밥들이 자리했지만요.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소방서와 대형병원이 있었으므로 수술은 깔끔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의사는 한동안 좀 힘들기는 하겠지만 일상생활에 지장이 가지 않을 만큼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어요. 잘린 게 손목이나 팔이 아닌 손가락이라 다행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저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아마 머리를 조금만 더 숙였다면, 손가락이 아니라 단두대처럼 머리가 잘렸을 테니까요.

(잠시 흔들리는 화면. 후드티를 입은 아이가 무표정으로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보인다. 손바닥에서 손가락으로 이어지는 부분의 색이 미묘하게 다르다. 실밥 모양의 흉도 보인다.)

어른들은 자주 말했죠. 네가 이렇게 된 건 전부 네 탓이야. 네가 그곳에 있었던 탓이야. 왜 말을 듣지를 않니? 한시라도 눈을 팔면 사고를 치고 속을 썩이는 이 구제 불능! 맞습니다.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매번 억울한 생각이 드는 건 왜였을까요? 손가락이 잘렸다가 다시 생긴 아이에게 필요한 게 질책과 욕설은 아니었을 텐데요. 의사 선생님은 제가 말을 잘 듣고 회복만 잘한다면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믿었어요. 그 말만, 믿었습니다. 회복할 때까지 칭얼거리지도, 힘든 티를 내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수술하고 고작 한 달이 흘렀을 때, 저는 의사 선생님의 말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했죠. 아니요. 제 손은 바뀌었어요. ‘능력’이 생겼거든요.

만지는 물건의 기억을 통해 저는 진실을 볼 수 있었어요.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어떤 어른이 나쁜 짓을 하는지, 돈을 빼돌리고 아이들과 동물을 괴롭히는지 다 볼 수 있었답니다. 숨기고 싶은 진실을 제가 쉽게 입에 담자 사람들은 저를 미쳤다고 말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신병인 줄 알았습니다. 할머니와 함께 온갖 무당집을 나돌았죠. 하지만 저는 알 수 있었어요. 이건 영혼이나, 신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손의 문제라는 것을요.

굿도 여러 번 했습니다. 하지만 고쳐질 리 없었죠. 방송에 출연한 것 역시 그 때문이었습니다. 한 번에 몇백씩 하는 굿을 하려니 돈이 부족했거든요. 당시 [궁금한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꽤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었고, 나중엔 OTT 프로그램에서 특집을 만들기도 했어요. 지역 방송치고는 엄청난 성과였습니다. 그건 매주에 한 회씩 방영할 수 있을 정도로 제가 사는 지역에 ‘신기한’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어요. 다른 지역의 방송사에서도 비슷한 프로그램들을 만들었지만 수학이나 과학 영재는 있을지언정 손끝에서 달콤한 땀이 나오는 아이는 없었거든요.

아, 이건 딴 얘기인데요(잠깐 쉬어가는 타임! 괜찮죠?), 얼마 전에 제가 살던 동네 뒷산에서 오래된 동굴이 발견되었다고 해요. 그리고 동굴 깊숙한 곳에 꼭 사람의 내장을 닮은 붉은 광물이 가득했다고…. 주변에 피어있는 낯선 꽃들은 혈관을 닮았었대요. 최소 십 년은 넘게 그곳에 있었다는데, 그 광물이 아이의 신체에 어떤 영향을 미친 건 아닐까요? 지구 깊숙한 곳에서 나타난 것이던, 우주에서 온 것이던 간에 말이죠. 뭐, 그냥 제 추리에요. 원래 이 나이대에는 망상을 많이 한다잖아요. 그런데 진심으로 궁금하긴해요. 제가 그 광물을 만지면… 무엇을 보게 될까요? 광물의 비밀을 알 수도 있을 텐데요. (작은 한숨. 그리고 씁쓸한 웃음.) 하지만 이것도 결국 잠시 후면 아무 의미 없어질, 쓸데없는 상상이네요. 헛소리는 그만하고 원래 이야기를 계속할게요. 어디까지 했죠? 아. 거기까지군.

 

저는 방송 이후, 몇 번의 어린이 광고를 찍었습니다. 그대로 연예인 활동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저는 끼가 많은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수줍음이 많고 카메라 앞에서는 더 딱딱해지는 아이였죠. 클수록 얼굴도 점점 평범해졌습니다. 애들이 방송에 나오려면 끼와 얼굴,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는 갖추어야 하잖아요. 아무도 평범하고 음울한 아이를 보고 싶어 하진 않아요.

방송 대신 저에게 연락해온 건 절박하고 슬픈 사람들이었답니다. 소중한 사람을 갑자기 잃어버린 이들이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물건을 들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더벅머리 아주머니는 딸이 사라진 현장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물건이라면서, 나비 모양 손톱깎이의 기억을 읽어주면 사례를 하겠다고 했어요. 저는 돕고 싶은 마음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딸이 손톱을 깎으며 누군가와 나눈 통화 내용을 그대로 알려줬어요. 딸은 학교 선배와 함께 가출한 것이었고, 제 덕분에 찾을 수 있었다더군요. 저는 제 능력이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깨달았고, 부모님 역시 다른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능력 자체가 돈이 될 수도 있다는 깨달음이요.

많은 사람들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그중에는 형사나 탐정도 있었어요. 제가 공식적으로 어떤 사건을 도운 것은 아닙니다. 그냥 묻는 말에 대답했을 뿐인걸요. 여러분들도 새해 신년 운세나 타로점을 보러 갈 때, 엄청 진지하게 보는 것은 아니잖아요? 맞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뭐 그 정도였던 거죠.


하지만 이미 여러 번 말했듯이, 제 능력은 진짜였으므로 꽤 많이… 정도가 아니라 항상 맞았답니다. 제가 단서를 제공한 사건들 중에는 범인의 이름과 얼굴이 공개될 정도로 큰 사건도 있었습니다. 자랑이 아니라 진짜 그렇다니까요. 믿을 수밖에 없었겠죠. 알음알음 말이 퍼졌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저를 찾아왔으며 저는 점점 더 많은 물건의 기억을 읽었어요. 대부분은 끔찍한 장면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관짝이나 다름없는 독방에 앉아 누군가 자살하고 살해되고 살인하고 사라지고 죽어가는 순간의 기억들을 더듬었다는 말이에요. 부모님의 계좌에 출저가 불분명한 현금이 쌓여가는 대신 저에게는 낯선 감정들이 쌓여갔습니다. 고작 열 네 살인 여자아이가 온갖 범죄와 슬픔과 증오로 점철된 기억을 빨아들였죠. 여러분, 혹시 그 사실을 아나요? 사람에게는 공감 능력이라는 게 있잖아요. 아주 선명하게 보이는 기억은 감정까지도 옮는답니다. 사춘기의 어린애가 그 모든 걸 어떻게 견뎠겠어요? 저보고 미쳤다고요? 믿을 수 없다고요?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미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요?

그쯤 되니 저는 헷갈리기 시작했어요. 어디까지가 제 기억이고 어디까지가 물건의 기억인지. 그들의 기억으로 인해 고통받는 내 감정은 온전히 나의 감정이 맞는지요. 장갑을 끼려고도 해봤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했던 건 저도 다 해봤죠. 왜, 영화나 만화를 보면 평소엔 장갑을 끼고 있다가 꼭 필요한 순간에만 멋들어지게 능력을 쓰잖아요.

능력이 생긴 후 처음 낀 장갑은 엄마의 소가죽 장갑이었습니다. 도축되는 소의 공포와 고통을 목격하고 사흘 동안 밥을 먹지 못했어요. 지금도 고기는 먹지 않습니다. 저보고 또 유난 떠는 채식주의자라고 할 생각이라면 그 입을 다물어주세요. 다음에 낀 것은 아가일 무늬 털장갑입니다. 옆집 아주머니가 직접 떠주신 장갑이에요. 알고 싶지 않은 그 집의 사정을 전부 알게 된 후로 그 장갑은 서랍에 처박혔습니다. 결국 시내에 나가 아무도 끼지 않은 싸구려 인조가죽 장갑을 샀습니다. 누구도 만지지 않은 새 물건을 쓰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안일했죠. 그 장갑이 만들어지기까지 닿은 무수한 손길들, 기계의 차가운 공정과 아주 찰나의 스침, 먼지, 바람 같은 것들. 그게 전부 전해졌어요. 저는 장갑을 끼었을 뿐인데 무수한 사람이 제 손을 붙잡는 듯한 경험을 했습니다. 불쾌하고 찐득했어요.

물건이 만들어지기까지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을 수는 없잖아요. 하다못해 제가 새 장갑을 직접 뜬다 치더라도, 털실과 뜨개 도구들 역시 기억을 담고 있기 마련이죠. 그러니까, 그건 뭐랄까… 저에겐, 갓 태어난 아기의 뼈로 가죽을 뜨는 느낌인 거예요. 그쯤 되니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제 능력을 조절하지 못하고, 능력은 걷잡을 수 없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요. 저는 직감했습니다. 이대로 있다간, 스스로를 영영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는걸.

 

사설이 너무 길었네요. 일주일 넘게 대본을 정리했지만 여기 혼자 이런 영상을 준비하는 건 쉽지 않아요. 영상을 찍기 위해 마련한 중고 카메라를 만지며 첫 주인에 관한 기억을 보았습니다. 중원구에 사시는 최 모 씨. 길거리 여자들을 몰래 찍던 카메라를 고등학생에게 파는 건 너무하지 않나요? 데이터만 지우면 될 줄 알았나 봐요. 아파트 벼룩시장에서 구매한 삼각대는 아이들을 학대할 때 쓰던 것이더군요. 지금 입고 있는 이 촌스러운 후드티는 염료 배합을 잘못한 탓에 원래 제품보다 색이 아주 약간 옅어요. 공장장은 툭하면 주급을 떼먹죠. 아, 이 책상, 분명 새 상품이라고 했는데 반품 제품이던데요. 물건 상태는 좋아요. 새 상품이나 다름없어요. 하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어요. 사람들은 왜 굳이 거짓말을 하고 숨길 일을 만들고야 마는 걸까요?

저도 이런 사실을 알기 싫어요.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의 말을 믿고 행복한 바보가 되어 살고 싶다고요. 저는 왜 그럴 수 없는 거죠?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요? 무수하고 끔찍한 진실들에 파묻혀서, 진짜 내 기억을 갉아먹으면서요. 아무리 기억을 곱씹어보아도, 결론은 하나입니다. 그 일련의 사건에 부자연스러운 부분은 딱 하나에요.

 

전부 손가락 때문입니다. 한번 떨어져 나간 건 그대로 떨어졌어야 해요.

 

그래서 저는 지금 이 손가락들을, 손가락이 달린 팔을 잘라버리려 합니다. 사방, 사방이 기억들이에요. 물건의 기억들이 저를 좀먹고 있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요.

녹화 영상이 꺼졌다. 화면이 전환되고 라이브 방송이 시작되었다. 후드티를 입은 여자아이가 서 있는 곳은 어두운 폐공장 안이었다. 거친 기계 작동음이 불길하게 울려 퍼졌다. 아이는 콧노래를 부르며 어느 한구석으로 다가갔다. 쾅, 쾅, 단단한 칼날이 무쇠 판을 찍어 내리는 소리였다. 피아노를 치듯 기계 앞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은 아이는 고개를 돌려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싱긋, 웃었다.

“나쁜 손가락.”


그리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쾅, 무쇠 판을 한번 찍고 올라간 칼날이 위로 솟았고 이제 그 밑에는 하얗고 여린 손목이 놓여 있었다.


“이제 안녕.”


아이는 춤추는 다섯 개의 소시지를 상상하며 눈을 감았다.


다음 호에 계속 됩니다.
조예은 작가의 『핑거팁 메모리』는 코리아나미술관 *c-lab 6.0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c-lab 6.0 리서치 딜리버리 3, 4, 5호를 통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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