ㅈ) 우선 저는 왜 실재론이 어쩌면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어쩌면 대립적으로 보이는 사변이라는 말과 결합 되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ㄱ) 하먼은 24쪽에서 과거의 상식적 실재론들과는 달리 그 네 가지는 모두 직관에 반하거나 혹은 심지어 아주 기묘한 것처럼 보이는 결론에 이른다는 의미에서 사변적이다.라고 설명하는데요 이 문장에서 사변이 무슨 뜻일까요?
ㅅ) 사변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생각으로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논리적 사고만으로 현실과 사물을 인식하려는 직관적 인식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사변적 실재론은 실재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넘어선다는 말처럼 느껴집니다.
ㅈ) 사변은 speculation을 번역한 말인데 우리 말 상식에서는 실감과 유리된 어떤 것을 지칭할 때 많이 사용되지 않아요?
ㄱ) 네. 보통 그런 것 같습니다.
ㅈ) speculation에는 보다는 뜻의 specere가 어근으로 포함되어 있는데요, 본다는 것은 언어적 연결을 중심에 놓는 논리적인 것(logic)과 약간 다른 뉘앙스를 갖는 것 같습니다.
ㅅ) ‘본다’가 강조되면 감각적인 것으로 더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ㄱ) [사물의 풍경] 스티븐 샤비로: 오늘의 에세이-사변적 실재론: 입문글↗
좀 길지만, 이 글에 사변적 실재론에서 '사변'이 갖는 의미 맥락이 설명된 것 같습니다.
21세기에 철학적 사변의 부활은 이런 딜레마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그것은 인식론의 칸트적 우위를 무화시키고자 한다. 그런데 그것은 매우 칸트적 이유에서 이것을 행한다. 칸트 자신의 인식론의 격상과 형이상학적 사변의 금지는 독단적 합리주의라는 스킬라와 경험론적 회의주의라는 카리브디스 둘 다를 피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현재 인식론의 격하를 동반하는 칸트의 반전은 맹목적인 이성중심주의와 민족중심주의라는 스킬라와 무한한 해체와 자기 비판이라는 카리브디스 둘 다를 피하고자 하는 비슷하게 고무된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사변이 모든 가능한 지식의 경계를 침범하기 때문에 칸트는 사변을 비난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늘날의 새로운 사변적 사상가들의 경우에는 바로 지식의 한계 때문에 사변이 필요하다. 실재적인 것은 그렇게 존재하지만,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21세기 사변은 우리의 단단한 지식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독단적 주장을 제기하기는커녕, 이 새로운 형태의 사변은 역설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의 공간과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의 시간을 탐사한다.
ㅂ) 사변적 실재론자들은 인간이 감각하거나 인지하지 못하는 물자체의 영역이 실제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영역은 말 그대로 인간의 감각이나 인지로 알거나 닿을 수는 없고 '사변'을 통해서 짐작만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같아요.
ㅅ) (ㅈ)님이 올려주신 글에서도 알지 못한다는 내용이 인상 깊습니다.
ㅈ) 여기서는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의 공간과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의 시간을 탐사하는 사유 양식으로서 사변이 제시되는군요.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으로서.
이 책에서 서술되는 네 철학자(브라지에, 그랜트, 하먼, 메이야수) 중에서 현재 시점에서도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이 책의 저자인 하먼인 것 같고 하먼이 나머지 세 사람이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 범주에 포함될 수 있는 철학적 사유양식을 보이고 있다는 의미에서 사변적 실재론 입문이라는 제목을 단 것으로 보이는데, 3장에서 제시되는 객체지향존재론의 경우 사변은 암시, 비유의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ㅂ) 저는 '사변'이라는 말을 '사변소설'이라는 용어로 많이 접했는데요, speculative fiction은 SF(과학 소설)를 지칭하는 말로 많이 쓰이는데요, 이때 '사변'은 초자연적이고 비일상적인…. 그야말로 에스에프나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상상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상상의 세계이지만,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은 아닌, 명확히 감각하거나 인지할 수 없는 현실(실재)의 어떤 면을 암시하거나 비유하는 세계가 speculative fiction이 재현하는 세계다라고 하면 하먼의 의미와도 어느 정도 연결이 되는 것 같습니다.
ㅈ) 네, 스티븐 샤비로가 탈인지에서 SF 소설을 바로 이런 식으로 독해하고 있지요.
초자연적이라 함은 자연법칙을 우리가 알고(지식하고) 있다는 전제 위에서 지식 너머의 것을 표현하는 말일 터이고, 비일상적인이라 함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말로서 이 표현은 지식과 경험 너머의 것을 지시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ㄱ) 브라지에의 경우에는 지금은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명칭을 거부하고 있다고 합니다. 2007년 최초의 사변적 실재론 워크숍에서는 특히 인지과학과 관련된 경험과학과 대륙철학의 '사변'적 대담성의 소통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인지과학에 직접 관여하거나 혹은 자신의 프로젝트를 인지과학과 연속적이라고 간주하는 영미 심리철학에서 특유하게 수행되고 있는 가장 흥미로운 작업을 특징짓는, 정말로 경탄할 만한 정도의 경험과학에의 관여와 [다른 한편으로] 이른바 ‘대륙철학’을 특징짓는 사변적 대담성 사이에 어떤 종류의 소통이 필요합니다.(29쪽)
『풀려난 허무』의 3장에서는 브라지에가 메이야수에 관해 논의하면서 철학은 과학을 위한 “적절한 사변적 갑옷”을 제공하기를 열망해야 한다고 말한다고 합니다.(63쪽)
브라지에에게서 사변은 어떤 것인가요?
ㅈ) 브라지에의 책은 한국에 단 한 권도 소개되지 않았고 하먼의 정리가 유일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하먼의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데, 사변=형이상학이라는 등식으로 표현 가능한 것 같습니다.
브라지에의 경우는 사변이라는 말보다 과학을 위한에 더 강조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먼이 사변을 형이상학으로 보고 있는 것과 달리 브라지에는 과학에 조응될 수 있는 사변을 요구하므로 형이상학의 약화, 과학화를 주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ㅈㄱ) 가상적으로 가공할 수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을까요?
ㅂ) OOO(Object-Oriented Ontology)는 피와 살이 있는 고양이와 키티(고양이 캐릭터)는 둘 다 실재하는 객체다라고 하는 반면 브라지에는 키티는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아요. 책에서는 이를 브라지에가 마음속 객체와 마음 밖 객체-물리적 객체-를 구별하고 마음속 객체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표현했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사변'은 마음속 객체, 그러니까 기호나 관념 같은 걸 지칭하는 것으로 브라지에는 받아들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ㄱ) 16쪽에 보면 메이야수가 두 번째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SR의 명칭에 내장된 실재론보다 자신의 입장에 내장된 유물론을 강조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변적 실재론과 사변적 유물론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ㅂ) OOO는 물질과 비물질을 모두 실재하는 것으로 바라보는 데에 반해, '사변적 유물론'(사변적 실재론과 거리를 두고자 할 때)은 물질에 좀 더 강조점이 있는 것 같아요.
ㅅ) 지난 시간에 읽은 신유물론 책과 연관될까요?
ㅈ) 말 자체로 보면 실재론은 물질적인 것이 아닌 것도 실재로 본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변적 유물론이 실제로 실재를 물질적인 것으로 보는 것인지는 이 책만으로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먼의 정리에 따르면 사변적 유물론의 메이야수는 강한 상관주의를 긍정한다고 하는데, 강한 상관주의는 유물론과 배치되는 사고법이 아닌가 생각되어서입니다. 362쪽을 보면 하먼은 내심 메이야수를 관념론자로 보는 것 같습니다. 아니, 363쪽을 보니 둘째 줄에 아예 강한 상관주의는 관념론을 벗어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