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변적 실재론 입문


제 45 호
(통권 75호) 2023. 4. 2
🤟 열린 세미나 🤟



검찰정권에 대하여



최근 논란을 야기하고 있는 윤석열 정부의 노동정책, 대일외교,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대한 정책 등의 권력행동에 대해 살펴보면서 그것을 검찰정권이라는 용어로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범야권의 명명법과 그 한계와 대안적 시각에 대해 논해 보고자 합니다. 최근 국민의 힘 국회의원 태영호의 제주4·3사건관련 발언등을 통해 오늘날 권력의 역사인식도 함께 살펴볼 예정입니다.

열린 세미나는 관심 있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토론회입니다.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 일정: 4월 6일 목요일 저녁 7시 30분
  • 장소: 카카오톡 <열린 세미나> 오픈채팅방

  • 참고자료



🙋‍♀️
앞으로 열린세미나는 매월 하나의 사회적 이슈와 한권의 책을 번갈아 주제로 다룹니다. 4월의 경우는 다음과 같습니다.

  • 4월 첫째 주 📣 <검찰정권에 대해>
  • 4월 셋째 주 📕 『우리는 당신들이 불태우지 못한 마녀의 후손들이다』 (실비아 페데리치)

👇  지난 세미나 갈무리  👇 

 


사변적 실재론 입문

Speculative Realism: An Introduction


3월 23일 (목) 저녁 7시 30분

 


  소주제
  1. 사변적 실재론이란 무엇일까?

  2. 사변적 실재론은 다른 사유 방식들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3. 사변적 실재론은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데 어떤 시사점을 갖고 있는가?

1. 사변적 실재론이란 무엇일까?

ㅈ) 우선 저는 왜 실재론이 어쩌면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어쩌면 대립적으로 보이는 사변이라는 말과 결합 되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ㄱ) 하먼은 24쪽에서 과거의 상식적 실재론들과는 달리 그 네 가지는 모두 직관에 반하거나 혹은 심지어 아주 기묘한 것처럼 보이는 결론에 이른다는 의미에서 사변적이다.라고 설명하는데요 이 문장에서 사변이 무슨 뜻일까요?

 

ㅅ) 사변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생각으로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논리적 사고만으로 현실과 사물을 인식하려는 직관적 인식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사변적 실재론은 실재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넘어선다는 말처럼 느껴집니다.

 

ㅈ) 사변은 speculation을 번역한 말인데 우리 말 상식에서는 실감과 유리된 어떤 것을 지칭할 때 많이 사용되지 않아요?

 

ㄱ) 네. 보통 그런 것 같습니다.

 

ㅈ) speculation에는 보다는 뜻의 specere가 어근으로 포함되어 있는데요, 본다는 것은 언어적 연결을 중심에 놓는 논리적인 것(logic)과 약간 다른 뉘앙스를 갖는 것 같습니다.


ㅅ) ‘본다’가 강조되면 감각적인 것으로 더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ㄱ) [사물의 풍경] 스티븐 샤비로: 오늘의 에세이-사변적 실재론: 입문글

좀 길지만, 이 글에 사변적 실재론에서 '사변'이 갖는 의미 맥락이 설명된 것 같습니다.

21세기에 철학적 사변의 부활은 이런 딜레마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그것은 인식론의 칸트적 우위를 무화시키고자 한다. 그런데 그것은 매우 칸트적 이유에서 이것을 행한다. 칸트 자신의 인식론의 격상과 형이상학적 사변의 금지는 독단적 합리주의라는 스킬라와 경험론적 회의주의라는 카리브디스 둘 다를 피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현재 인식론의 격하를 동반하는 칸트의 반전은 맹목적인 이성중심주의와 민족중심주의라는 스킬라와 무한한 해체와 자기 비판이라는 카리브디스 둘 다를 피하고자 하는 비슷하게 고무된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사변이 모든 가능한 지식의 경계를 침범하기 때문에 칸트는 사변을 비난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늘날의 새로운 사변적 사상가들의 경우에는 바로 지식의 한계 때문에 사변이 필요하다. 실재적인 것은 그렇게 존재하지만,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21세기 사변은 우리의 단단한 지식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독단적 주장을 제기하기는커녕, 이 새로운 형태의 사변은 역설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의 공간과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의 시간을 탐사한다.


ㅂ) 사변적 실재론자들은 인간이 감각하거나 인지하지 못하는 물자체의 영역이 실제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영역은 말 그대로 인간의 감각이나 인지로 알거나 닿을 수는 없고 '사변'을 통해서 짐작만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같아요.


ㅅ) (ㅈ)님이 올려주신 글에서도 알지 못한다는 내용이 인상 깊습니다.


ㅈ) 여기서는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의 공간과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의 시간을 탐사하는 사유 양식으로서 사변이 제시되는군요.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으로서.

이 책에서 서술되는 네 철학자(브라지에, 그랜트, 하먼, 메이야수) 중에서 현재 시점에서도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이 책의 저자인 하먼인 것 같고 하먼이 나머지 세 사람이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 범주에 포함될 수 있는 철학적 사유양식을 보이고 있다는 의미에서 사변적 실재론 입문이라는 제목을 단 것으로 보이는데, 3장에서 제시되는 객체지향존재론의 경우 사변은 암시, 비유의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ㅂ) 저는 '사변'이라는 말을 '사변소설'이라는 용어로 많이 접했는데요, speculative fiction은 SF(과학 소설)를 지칭하는 말로 많이 쓰이는데요, 이때 '사변'은 초자연적이고 비일상적인…. 그야말로 에스에프나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상상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상상의 세계이지만,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은 아닌, 명확히 감각하거나 인지할 수 없는 현실(실재)의 어떤 면을 암시하거나 비유하는 세계가 speculative fiction이 재현하는 세계다라고 하면 하먼의 의미와도 어느 정도 연결이 되는 것 같습니다.


ㅈ) 네, 스티븐 샤비로가 탈인지에서 SF 소설을 바로 이런 식으로 독해하고 있지요.

초자연적이라 함은 자연법칙을 우리가 알고(지식하고) 있다는 전제 위에서 지식 너머의 것을 표현하는 말일 터이고, 비일상적인이라 함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말로서 이 표현은 지식과 경험 너머의 것을 지시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ㄱ) 브라지에의 경우에는 지금은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명칭을 거부하고 있다고 합니다. 2007년 최초의 사변적 실재론 워크숍에서는 특히 인지과학과 관련된 경험과학과 대륙철학의 '사변'적 대담성의 소통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인지과학에 직접 관여하거나 혹은 자신의 프로젝트를 인지과학과 연속적이라고 간주하는 영미 심리철학에서 특유하게 수행되고 있는 가장 흥미로운 작업을 특징짓는, 정말로 경탄할 만한 정도의 경험과학에의 관여와 [다른 한편으로] 이른바 ‘대륙철학’을 특징짓는 사변적 대담성 사이에 어떤 종류의 소통이 필요합니다.(29쪽)

『풀려난 허무』의 3장에서는 브라지에가 메이야수에 관해 논의하면서 철학은 과학을 위한 “적절한 사변적 갑옷”을 제공하기를 열망해야 한다고 말한다고 합니다.(63쪽)

브라지에에게서 사변은 어떤 것인가요?


ㅈ) 브라지에의 책은 한국에 단 한 권도 소개되지 않았고 하먼의 정리가 유일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하먼의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데, 사변=형이상학이라는 등식으로 표현 가능한 것 같습니다.

브라지에의 경우는 사변이라는 말보다 과학을 위한에 더 강조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먼이 사변을 형이상학으로 보고 있는 것과 달리 브라지에는 과학에 조응될 수 있는 사변을 요구하므로 형이상학의 약화, 과학화를 주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ㅈㄱ) 가상적으로 가공할 수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을까요?


ㅂ) OOO(Object-Oriented Ontology)는 피와 살이 있는 고양이와 키티(고양이 캐릭터)는 둘 다 실재하는 객체다라고 하는 반면 브라지에는 키티는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아요. 책에서는 이를 브라지에가 마음속 객체와 마음 밖 객체-물리적 객체-를 구별하고 마음속 객체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표현했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사변'은 마음속 객체, 그러니까 기호나 관념 같은 걸 지칭하는 것으로 브라지에는 받아들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ㄱ) 16쪽에 보면 메이야수가 두 번째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SR의 명칭에 내장된 실재론보다 자신의 입장에 내장된 유물론을 강조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변적 실재론과 사변적 유물론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ㅂ) OOO는 물질과 비물질을 모두 실재하는 것으로 바라보는 데에 반해, '사변적 유물론'(사변적 실재론과 거리를 두고자 할 때)은 물질에 좀 더 강조점이 있는 것 같아요.

 

ㅅ) 지난 시간에 읽은 신유물론 책과 연관될까요?


ㅈ) 말 자체로 보면 실재론은 물질적인 것이 아닌 것도 실재로 본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변적 유물론이 실제로 실재를 물질적인 것으로 보는 것인지는 이 책만으로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먼의 정리에 따르면 사변적 유물론의 메이야수는 강한 상관주의를 긍정한다고 하는데, 강한 상관주의는 유물론과 배치되는 사고법이 아닌가 생각되어서입니다. 362쪽을 보면 하먼은 내심 메이야수를 관념론자로 보는 것 같습니다. 아니, 363쪽을 보니 둘째 줄에 아예 강한 상관주의는 관념론을 벗어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군요.

2. 사변적 실재론은 다른 사유 방식들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ㅂ) 이 책에 등장하는 사변적 실재론자들은 '칸트'이후 진정 새로운 철학이 등장하지 않았다고 여기는 것 같아요. 과연 그럴까요?

사변적 실재론자들 (...) 그들은 모두 칸트가 여전히 현대 철학의 지평을 규정하기에 철학의 새로운 시대가 출현할 수 있으려면 극복되어야 하는 철학자라는 점에 대해서 의견이 일치할 것이다. (158쪽)


ㅈ) 3장 어딘가에서 하먼은 자신의 4중우주론(Quadruple Universe)이 철학사에서 혼란스럽게 제기되어온 4중론에 대한 체계적 종합이자 획기적 발전으로서 진짜 새로운 것(자구는 정확하지 않은데)이라는 취지로 썼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ㄱ) 사상의 역사에서 수많은 사중 모형이 거듭해서 나타났지만 나는 이번에야말로 가장 중요한 사중 모형이 발견되었다고 생각한다. (284쪽)

 

ㅂ) OOO가 '칸트' 이후 등장한 진정 새로운 철학이네요, 그리고 여기서 하먼이 말하는 철학은 '존재론'을 의미한다는 말도 덧붙여야 할 것 같습니다.


ㅂㅊ) 칸트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요. 칸트는 ‘경험적 실재론’이란 말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ㅈ) 지난번에 우리가 살펴본 신유물론 입문에서 저자가 중심적으로 다루었던 카렌 배러드를 하먼이 어떻게 평가하는지, 그 결과 어떤 차이가 드러나는지도 오늘 논의해 보면 좋겠습니다.

 

ㄱ) 배러드에 대한 이야기는 267쪽에 나옵니다.

이런 곤경은 아낙시만드로스, 피타고라스, 아낙사고라스 그리고 그들의 지적 사촌인 ‘존재는 하나다’라는 이론가 파르메니데스 같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아페이론 이론가들에게서 처음 나타나는데, 그들 중 누구도 단일한 덩어리의 실재가 조각들로 분할될 수 있는 방식을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없다. (...) 포스트모던 철학자 캐런 배러드1956(...)가 위대한 닐스 보어에 의지함으로써 관계항들은 그것들의 관계에 선행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때에도 마찬가지의 문제가 나타난다.

여기 각주에 언급된 하먼의 배러드 비판 글 원문 링크입니다.

하먼은 배러드가 위로 환원하기의 오류를 저지른다고 봅니다. 하먼이 배러드의 입장을 비판하는 부분을 DeepL 번역기로 돌렸습니다.

'위로 환원하기'라는 용어로 표현할 수 있는 이런 종류의 이론의 문제점은 개인에게서 모든 비밀스러운 성격을 제거함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접근 가능한 것만 남게 함으로써 미래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는 표현되지 않은 저수지를 박탈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세계는 아무리 세계 고유의 역동성, 유동성 또는 코나투스에 대한 알리바이 같은 주장으로 항의해도 정적이 됩니다. 몰리에르의 '기숙사'에서처럼 변화는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주장될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배러드가 내부작용적 현상에 찬성하여 사물을 포기한 것의 궁극적인 문제입니다. 모든 경이로운 이웃 현상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현상에는 그것을 다른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숨겨진 화산 에너지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배러드의 철학은 개별 사물에만 속하는 폭발적인 저류를 성급하게 희생시키는 위로 환원하기 이론이며, 주어진 순간에 세상에서 온전히 표현되지 못하도록 물러나 있습니다. 그녀의 입장을 너무 극단적으로 묘사한 것처럼 들린다면 독자들은 이 구절을 떠올려보면 됩니다 agency들은 상호 얽힘과 관련해서만 구별되며, 개별 요소로 존재하지 않는다.(33) 존재의 얽힘은 개별 요소로서의 분리된 존재에 선행하는 것으로, 양자 이론에 대한 배러드의 해석은 그녀의 원래 철학적 입장에 못지않게 중요한 주제입니다.


ㅈ) 신유물론 입문에서 저자는 1)물질은 그 자체로 능동적이고 창조적이다. 2)그것들은 횡단적이다. 라는 두 가지 명제로 신유물론을 정리했습니다. 배러드도 이러한 생각을 표현하는 중요 사상가로 지목되었는데, 하먼이 이 점에 대해 논평을 하는가요?

 

ㅂ) 신유물론 입문의 저자가 말하는 '물질'과 하먼이 말하는 '사물'(객체)은 다른데, 이 지점이 문제적인 것 (중요한 것) 같습니다.

 

ㄱ) 사변적 실재론 입문에서는 배러드 관련 서술이 위에 올린 267쪽 한 군데뿐입니다. 각주에 있는 비판글에서는 실제로 배러드의 행위적 실재론과 사변적 실재론의 객체 지향적 변형 사이에는 적어도 한 가지 핵심적인 일치점이 있습니다. 세계가 사유하는 인간과 죽은 물리적 물질이라는 두 종류의 실체로 나뉜다는 궁극적으로 데카르트적인 개념 즉 상관주의에 반대한다는 점이 OOO와 배러드에게서 일치한다고 봅니다.

 

ㅅ) (하먼이 말하는) 위로 환원하기가 횡단적이라는 부분과 유사한 내용일까요?

 

ㅈ) 배러드의 철학을 위로 환원하기overmining라고 보는 이유는 배러드가 말하는 행위자( agency)의 내부작용적(내행적 intra-active) 현상들(phenomena)에서 각각의 현상은 하먼 자신이 말하는 개체적 사물들에 속하는 폭발적 저류를 갖고 있지 않다는 이유에서입니다.


ㄱ) 하먼의 위로 환원하기, 아래로 환원하기에 대한 설명은 아래 링크에 있습니다.

(2) 하먼은 자신이 비판하는 입장들이 지닌 특징을 '아래로 환원하기(undermining)', '위로 환원하기(overmining)', '이중환원하기(duomining)'라는 용어로 규정한다.

객체를 그보다 더 근본적인 층위에 있는 가장 단순한 요소로 환원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입장은 ' 아래로 환원하기 '라는 방법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 물리학이 상정하는 요소만으로 세계를 설명하고자 하는 물리주의적 형이상학이 아래로 환원하기를 사용하는 대표적인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결합된 조립체에서 그 이전의 구성요소에는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속성이 '창발(emergence)'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으로 비판받는다.

객체를 '관계', '행위', '효과', '지식' 등 그 대상이 발생시킨 결과물로 환원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입장은 ' 위로 환원하기 '라는 방법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 존재가 행위의 관계망에서 성립한다고 주장하는 라투르의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 ANT)'이나 사물이 우발적 행위들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결합이라고 주장하는 브라이언트의 '새로운 유물론(New Materialism, NM)이 위로 환원하기를 받아들이고 있는 입장이라고 지목된다. 이러한 입장은 '중요한 변화'와 '중요하지 않은 변화' 사이의 차이 사이를 간과한 나머지 객체가 몇몇 속성의 변화에도 장기간동안 안정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데 실패한다고 비판받는다.

두 환원하기는 대개 하나의 입장에서 결합되어 ' 이중환원하기 '라는 형태로 등장한다. 즉, 객체가 (a) 자신보다 더 근본적인 실재로 환원될 수 있거나 (b) 우리에게 나타나는 허구적 현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이 '이중환원하기'라는 방법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 가령, 객체란 실제로는 불변하는 단일한 존재 자체인데도 우리 눈에는 변화하는 외양으로 주어진다고 주장하는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이 이중환원하기를 대표하는 입장으로 거론된다. 이러한 입장은 '객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은 채 실재와 현상 중 어느 하나의 영역에 억지로 귀속시키고자 하는 것으로 비판받는다.


ㅈ) 행위자가 변별되는 것은 상호얽힘을 통해서고 그 행위자는 개별 요소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에 배러드의 사유 속에 객체(혹은 개체적 사물)는 없다고 보는 것이겠지요.

 

ㅂ) OOO는 사물들의 세계(다자) 이전(혹은 이면)에 실제적 세계(일자)가 있다는 아페이론 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하먼의 논평에 따르면 배러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배러드는 사물들의 세계, 다자들로 쪼개지기 전 아페이론을 가정하는 것 같고요. 물론 아페이론도 그 자체로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물질이라고 할 것 같은데요... 어떨까요

 

ㅈ) 횡단은 배러드의 술어 속에서는 내부작용적=내행적 얽힘과 통합니다. 긍정적 의미로 사용되구요. 하먼은 환원하기(채굴)을 부정적 의미로 사용합니다.

OOO가 아페이론을 부정한다는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배러드는 어떤지는 이미 일정한 방향의 독해를 전제한 하먼의 말보다 배러드 자신의 말을 따라 판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배러드는 세계가 현상들이라고 보는데 그 현상들은 행위자들의 내부작용에 의해 구성됩니다. 행위자들의 그 내부작용이 아페이론, 일자, 무한자를 가정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그렇게 환원될 수 있는가는 의문입니다.

3. 사변적 실재론은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데 어떤 시사점을 갖고 있는가?

ㅈ) 내행=내부작용은 들뢰즈의 내재성과 상통하는데 내재적 실재는 일자라기보다 다양체이거든요. 268쪽에 들뢰즈는 다자와 일자를 동시에 갖고자 한다는 점에서 바디우와 합류한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배러드도 다자와 일자를 동시에 갖고자 한 게 아닌가 싶어요.

 

ㅂ) 네. 항(객체)이 선행하지 않는다는 것과 항들이 전혀 없는 세계가 (별도로) 있다는 것은 분명 다른 이야기일 것 같은데, 철학적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잘 구별되지 않을 때도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ㅈ) 사족이지만 다자와 일자를 동시에 갖고자 하는 것이 바디우라는 표현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바디우는 들뢰즈의 함성에서 들뢰즈가 일자 요소를 유지한다는 점을 심하게 비판하는 케이스이기 때문입니다.

 

ㄱ) 이 질문과 관련해서 하먼이 브라지에의 프로메테우스주의의 정치적 성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프로메테우스주의란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혹은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방식에 대하여 사전에 정해진 한계를 가정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주장일 따름이다.” 브라지에에게 이것은 과학적 합리성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가리켜야 한다는 점을 뜻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97쪽)

 

ㅂ) 제게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부분은 브라지에의 프로메테우스주의는 철학을 과학의 하수인( 정확한 표현이 기억이 안 나요)으로 만들고자 한다는 것이었는데요, 이는 브라지에는 합리주의를 수용하는데 반해 OOO는 합리주의를 지속적으로 의심한다는 것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ㅈ) 이 책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지난 3월 5일 하먼의 강연에서 누군가 가속주의에 관해 물었을 때, 오늘날의 암울한 현실이 가속주의적 주장에 기대기 어렵게 만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던 것으로 보아 프로메테우스주의에 부정적 태도를 취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가속주의자들이 브라지에를 따른다는 이 책의 구절에 근거한 추측입니다.

 

ㅂㅊ) 칸트와 관련하여 더 생각해보면,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경험이 이루어지기위한 ‘순수 형식’으로 보고, 모든 현상들은 이 순수 형식의 틀에 따라 정돈되기 때문에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시간에 대해서 ‘앞과 뒤의 차례’라는 형식을 중요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 과거는 단지 ‘지나간 것’이 되겠지요. 하지만 베르그손의 관점에서 시간을 생각하면 과거는 구르는 눈덩이처럼 현재까지 지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요.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도 문제거리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ㅂ)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왜 '사변적'이라는 키워드가 핵심적으로 대두되었을까요?


ㅈ) 근대성의 지식(이성, 합리성), 포스트모더니즘의 감정(숭고)의 문제와 한계에 대처하려는 하나의 실험적 시도라고 생각됩니다. 하먼은 시간을 감각객체와 감각성질 사이의 긴장으로 정의하는데 칸트와 비교해서 사고해 보면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ㅂ) 현실의 문제들을 이해함과 동시에 그것을 돌파할 새로운 개념 무기를 탄생시킨 것이라 볼 수 있겠네요. 68 혁명 때 '상상력'이라는 것이 현실의 장애물들을 돌파할 힘으로 부상했었는데요 '사변'은 넓은 의미에서 같은 상상력이라고 볼 수 있지만, 68 때 외쳤던 상상력과는 그 뉘앙스가 조금 달라진 상상력이라 생각됩니다.

 

ㄱ) 최근 사변적 실재론, OOO, 신유물론 등이 한국에도 풍부하게 소개되고 있고 책이 나올 때마다 기후위기 시대에 새로운 철학적 사유가 요청된다고 말해지는데 최근에 채택된 IPCC 보고서만 보더라도 기후위기에 대한 인류의 실질적 대응은 긴급함에도 실천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NEWSIS] IPCC 경고 현실화되면 어떤 모습…'기후재앙' 일상화


ㅈ) 기후위기, 팬데믹 등의 범 존재론적 문제들에 직면하여 기존의 인간중심주의적 사유가 처한 궁지 앞에서 존재론에 발본적인 평등주의, 민주주의를 도입함으로써 인간, 비인간의 지평을 같은 생태론적 평면에서 다루려는 시도가 신유물론과 사변적 실재론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전의 급진적 사유들, 특히 맑스 같은 사람의 생각을 인간중심주의로 정의하는 것이 타당한가(자본을 대상으로 분석하면서 사회, 자연, 노동의 힘을 살폈던 철학), 또 인간중심주의라고 불리는 것이 순수한 철학적 문제가 아니라 제국주의, 가부장주의, 자본주의 등의 사회적 조건 속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라는 점을 어떻게 사유 속에서 다루어 낼 것인가 등의 여러 문제가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ㄱ) 트위터에서 OOO 사상가들인 이언 보고스트, 티머시 모턴, 도미닉 보이어가 기후재난을 겨냥해서 COOL AMERICA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을 보았습니다. 프로젝트 이름은 '미국을 차갑게 만들자'와 '미국은 쿨하다'라는 중의적인 뜻을 가진 것 같고 프로필의 설명에 따르면 “지구상에서 가장 큰 문제는 가장 해결하고 싶은(해결할 욕구가 생기는) 문제여야 합니다” 입니다. 좀 다른 방식(문제 해결 과정 자체를 cool하고 매력적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기후재난이라는 문제에 접근해보려는 것 같습니다.

[트위터] Cool America

여기 올라온 이미지 중 하나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굶어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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