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아이 석상에 얽힌 비밀





💬 님, 한편을 같이 읽어요. 오늘은 갑자기 분위기 미스터리! 이스터섬 석상의 비밀을 파헤칩니다. 태평양 저 멀리 떠 있는 이스터섬의 모아이 석상에 얽힌 비밀을 세계적인 역사학자 클라이브 폰팅이 밝혀내는데요. 장구한 역사 속에서 《한편》 1호의 주제 '시대와 세대'에 관한 진실이 떠오릅니다.

이스터섬은 지구상에서 가장 외진 지역 중 하나다. 겨우 400제곱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구역 안에 있는 이 섬은 남아메리카 서부 해안에서 3200킬로미터 떨어진 태평양에 자리하고 있다. 최전성기에도 이스터섬의 인구는 7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 섬의 역사가 인류에게는 아주 음울한 경고를 해 주고 있다.
 
1722년 부활절(이스터(Easter)) 일요일,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네덜란드 사람 야코프 로헤베인 제독이 아레나호를 타고 이 섬을 방문했다. 로헤베인이 발견한 것은 누추한 갈대 오두막이나 동굴에서 원시적인 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전쟁으로 날을 지새우는 인구 3000명 정도의 섬사람이었다. 섬 안에 식량이 워낙 부족한지라 필사적으로 보충하려고 하다 보니 이들은 가끔 서로 잡아먹기까지 하고 있었다.
 
많은 인류학자가 20세기 초반에 이스터섬의 역사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는데, 한 가지 점에서 의견이 일치했다. 유럽인이 처음 방문했을 때 봤던, 가난에 찌들고 뒤떨어진 상태에서 사는 원시 부족이 그런 거대한 조각상을 만들고 나르며 세우는 것과 같은, 사회적으로 진보되고 기술적으로도 복잡한 일을 해냈을 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이스터섬은 하나의 ‘미스터리’가 되어 버렸고, 그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설이 제기되었다. 그중에서도 기상천외한 발상을 들자면, 외계인이 방문한 흔적이라든지, 지금은 태평양으로 가라앉아 버린 사라진 문명의 흔적이라든지 하는 얘기들이었다. 

그러나 이스터섬의 역사는 사라진 문명과 비밀 종교적 지식의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사회가 환경에 의존한다는 사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환경을 파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 주는 섬뜩한 일례다. 

최초로 이스터섬에서 생활한 사람들은 폴리네시아인으로, 태평양의 광대한 해역에 걸쳐 탐험하고 정주한 위대한 과정의 일부였다. 장기간에 걸친 대항해에 사용한 배는 카누 한 쌍을 나란히 묶고 그 위로 넓은 판을 놓아 사람과 식물, 동물 및 음식을 싣고 다니는, 이른바 쌍동선이라는 것이었다. 이 항해는 어쩌다가 먼 곳으로 표류해 가서 사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른 곳을 개척하려는 뚜렷한 의도와 계획을 가지고 행한 식민화 사업이었다. 이들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려면 태평양의 파도와 바람을 거슬러야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상당한 수준의 항해술과 선박 조종술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5세기 무렵에 정착민이 몇 명이나 도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많아야 20~30명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인구가 점차 증가하면서 다른 폴리네시아 지역과 유사한 사회조직이 들어섰다. 사회의 기본 단위는 함께 땅을 소유하고 경작하는 확대가족이었다. 밀접하게 연결된 가족 구성원들은 문중과 씨족을 이루고, 각 문중과 씨족에는 고유의 종교와 의식 활동의 중심 장소가 있었다. 각 씨족을 통솔하는 족장은 여러 가지 작업을 조직하고 지휘하며 음식과 기타 필수품을 씨족 내에 분배했다. 바로 이런 씨족이라는 조직들과 그 사이의 경쟁이 이스터섬 최고의 성취를 이룩해 내기도 했고, 궁극적으로는 그 섬을 붕괴시키기도 한 것이다.

이스터섬 주민들은 정교한 의례와 기념비 건축에 몰두했다. 의례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제사 장소는 아후였다. 300여 개의 아후 제단이 주로 바닷가를 따라 섬에 남아 있다. 아후가 배치되는 위치는 고도로 복잡한 천문학적 의미를 따져 정해졌다. 즉 하지와 동지, 춘분, 추분 등의 날에 태양이 떠오르는 방향과 각도에 맞추어 지은 것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당시 섬 주민의 지적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각각의 아후에는 한 개에서 열다섯 개까지의 거대한 석상이 세워져 있다. 이들이 세월을 견뎌 내고 남아, 지금은 사라져 버린 이스터섬 사회를 기억하게 하는 구조물이 되고 있다.
 
바로 이 석상군이 서민들의 막대한 노동력을 잡아먹은 것이었다. 이 돌을 운반하는 문제에 관한 이스터섬 사람들의 해결책이 그 후 그 사회 전체가 맞이한 운명을 설명하는 열쇠를 제공한다. 섬에는 수레를 끌 만한 가축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나무둥치를 잘라 깔고 그 위로 석상을 굴려 돌들을 운반했다. 섬의 인구는 5세기 무렵의 작은 집단에서 점점 늘어나 최전성기인 1550년에는 7000명에 이르렀다. 시간이 갈수록 씨족 집단의 수가 증가했고, 더불어 그들 사이의 경쟁도 치열해졌을 것이다.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수백 개의 아후가 세워졌고, 그와 함께 600여 개의 거대한 석상이 조각되었다. 

그러다가 그 절정기에서 이스터섬 사회는 갑자기 붕괴해 버렸다. 그 석상들의 절반쯤을 채석장 주변에 미완성으로 남겨둔 채. 붕괴 원인은, 그리고 이것은 이스터섬 ‘미스터리’를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한데, 바로 섬 전체의 나무를 베어 냈기 때문에 초래된 대규모 환경 악화였다.

1600년 이후 이스터섬 사회는 쇠퇴기에 접어들어 점차 원시적인 상태로 퇴행해 갔다. 나무가 없었고, 따라서 카누를 만들 수도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스스로 자초한 환경 파괴의 결과를 피할 도리 없이 이 외딴 섬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사회도 문화도 삼림 파괴에서 타격을 받았다. 석상을 더는 세울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키워 온 신앙 체계와 사회조직이 파괴적인 영향을 입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복잡한 사회가 세워진 기반 자체가 흔들렸음이 틀림없다. 줄어들기만 하는 자원을 둘러싼 갈등은 점점 심화되어 마침내는 전쟁이 끊이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이긴 자가 진 자를 노예로 부리는 일이 흔해졌고, 구할 수 있는 단백질이 부족해짐에 따라 식인 풍습까지 생겨났다. 전쟁의 주목적 중 하나는 상대편 부족의 아후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아후 중에서 몇 안 되는 곳은 공동묘지로서 남았지만, 대부분은 버려졌다. 너무 커서 파괴할 수 없었던 석상들은 쓰러뜨렸다. 18세기에 처음 이곳을 찾았던 유럽인들은 그나마 선 채로 남아 있는 석상을 몇 개 볼 수 있었지만, 1830년 무렵에 가서는 모두 다 쓰러져 버렸다. 외부에서 온 방문객들이 원주민들에게 어떻게 이 석상들을 채석장에서 옮겨 왔느냐고 물으면, 이제는 미개인이 되어 선조들의 업적을 기억 못 하게 된 섬사람들은 이 거대한 석상들이 섬을 가로질러 “걸어왔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나무라고는 없는 이상한 섬의 경관을 보면서 유럽인들도 논리적인 답을 발견할 수 없었기에 원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오리무중에 빠지고 말았다.

이스터섬 주민들은 수 세기에 걸쳐 난관을 헤쳐 가며 그 유형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앞선 사회를 건설해 냈다. 1000년 동안 이들은 정교한 사회적・종교적 관습에 맞추어 생활해 왔는데, 이 관습은 어느 정도까지는 이들이 단순히 생존해 가는 상태를 넘어 번영을 구가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것은 인간 재능의 승리였고 어려운 환경을 극복한 위업이었다. 하지만 늘어나는 인구와 섬 주민들의 문화적 야망은 한정된 자원이 감당해 내기에는 너무 컸다. 약탈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환경이 파괴되자 사회는 빠른 속도로 붕괴되어 거의 야만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스터섬의 운명은 더 폭넓은 함의를 가진다. 이스터섬과 마찬가지로 지구에는 인간 사회와 그들의 요구를 충족할 수 있는 자원이 제한되어 있다. 섬의 주민들처럼 인류 역시 지구를 떠날 방법이 없다. 세계의 환경이 어떻게 인류의 역사를 형성해 왔고, 인간은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어떤 모습으로 만들고 변화시켰던가? 이스터섬의 원주민들과 같은 덫에 빠졌던 사회는 없었을까? 

지난 200만 년 동안 인간은 늘어나는 인구와 점점 복잡해지는 기술 문명, 진보하는 사회를 감당하기 위해 더 많은 식량을 확보하고 더 많은 자원을 뽑아 쓰면서 살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과연 자기들이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을 치명적으로 고갈시키지 않고, 자기들의 생명 보전 체계를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파괴하지 않는 생활양식을 찾아내 실천하며 살아오는 데 이스터섬 사람들보다 더 성공적이었던 사회가 있었는가?

💬 환경사의 고전, 『녹색 세계사』의 1장 '이스터섬의 교훈'이었습니다. 양장본 636쪽, 무게 1kg에 달하는 책의 시작으로 손색없네요.(이 책의 편집자는 600쪽 겨우 넘으니 벽돌책에 속하지 않는다고 항변했지만요!) 5세기의 흥기에서 19세기의 몰락에 이르기까지, 숨가쁘게 읽은 이스터섬의 역사는 21세기 우리의 문제에 그대로 포개집니다. 앞 세대가 이룬 세계는 고스란히 후대의 손에 달려 있다는 교훈. 

클라이브 폰팅은 영국의 역사가로, ‘빅 히스토리’의 개척자라고 평가받는다. 크림 전쟁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 윈스턴 처칠 등 여러 가지 주제를 다룬 저서들로 명성을 얻었다. 특히 방대한 인간 문명사를 지구 환경의 관점에서 정리한 세계적 베스트셀러 『녹색 세계사』는 환경사의 명저이자 고전으로 꼽힌다. 마거릿 대처 행정부에서 국방부 고위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중에 포클랜드 전쟁 관련 문서를 노동당 의원에게 건네 은폐된 진실을 밝히려고 했다. 결국 기밀을 유출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한 행동이었다고 스스로 변호함으로써 배심원들이 유죄 판결을 거부하게 했다. 공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스완지 대학에 재직했으며, 현재는 스코틀랜드 국민당에 합류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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