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께 보내는 서른여섯 번째 흄세레터

님 설 연휴는 잘 보내셨나요? 잘 쉬고 잘 먹고 잘 노는 명절이면 좋겠지만, '명절 스트레스 지수'를 묻는 설문을 살펴보면 매번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은데요, 그중에서도 '가족에게 받는 스트레스'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합니다. 한편 귀성길 차량이나 기차역을 찍은 방송에서는 기다리는 가족들 보러 고향에 간다는 사람들의 밝은 표정을 볼 수 있죠. 이 간극 때문에 명절에는 자연스럽게 '가족'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저는 이번 설에 만난 친구들과 가장 사랑하거나 증오하는 존재로서의 가족, 온갖 시련이 지나간 후 다시 처음부터 서로를 알아가고 있는 가족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 나눴습니다.

이런 애정과 증오의 공동체인 가족 서사는 문학사의 오랜 주제이기도 하죠. 《밸런트레이 귀공자》에는 증오라는 칼끝을 벼리고 벼려 서로에게 겨누는 두 형제가 나옵니다. 그들에게 가족이란 뭘까요. 왜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일까요. 오늘은 편집자 세&랑이 뽑은 《밸런트레이 귀공자》 미리보기와 추천 콘텐츠를 소개해드릴게요.


흄세레터는 오늘을 마지막으로 잠시 쉬어갑니다. '결정적 한순간'을 테마로 한 시즌4로 금방 다시 찾아올게요. 당분간 흄세 인스타그램도 눈여겨봐주세요! 

《밸런트레이 귀공자》 미리보기 1


“오, 하느님.” 그가 말했다. “많은 은총을 내려주셔서 하느님께 감사하고 제 아들도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저희가 얼마간 평화를 누릴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저희를 그 사악한 남자로부터 지켜주세요. 거짓말하는 그자의 입을 세게 때려주세요, 하느님!” 마지막 말은 비명처럼 튀어나왔다. 그러고 나자 예전의 분노가 떠올라 숨이 막혀 말할 수 없었는지, 이런 걸 기도라고 하는 것이 아주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어쨌든 갑자기 멈췄다. 그러고는 잠시 후 모자를 다시 머리에 얹었다.


“듀리스디어 경, 한마디를 잊으신 듯합니다.” 내가 말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과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주시옵소서. 오, 주님, 그 나라와 능력과 영광은 영원히 주님의 것입니다. 아멘.”


“아! 그렇게 말하기는 쉽지.” 듀리스디어 경이 말했다. “매켈러, 말이야 아주 쉽지. 하지만 나더러 용서하라고! 내가 용서하는 척한다면 내 꼴이 아주 우스꽝스러워질걸.”


“아이를 생각하세요, 듀리스디어 경!” 나는 약간 엄격하게 말했다. 그가 내뱉은 표현이 어린애가 듣기에는 적합하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 맞는 말이야.” 그가 말했다. “아이에게는 지루한 일이지. 새 둥지를 뒤지러 가자꾸나.”


바로 그날이었는지 며칠 뒤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듀리스디어 경이 내가 혼자 있는 것을 보고는 동일한 주제에 대해 마음을 조금 더 터놓았다.


“매켈러.” 그가 말했다. “나는 지금 무척 행복하다네.”


“그러신 것 같습니다, 듀리스디어 경.” 내가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보면 제 마음도 기쁘고요.”


“행복에는 의무가 따르는 것 같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그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말했다. “슬픔에도 의무가 따르고요. 우리가 여기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제 소견에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빨리 사라질수록 모두에게 더 낫겠지요.”


“그래, 하지만 자네가 내 입장이라면 자네는 그를 용서하겠나?” 듀리스디어 경이 물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나는 약간 당황했다. “용서는 우리 모두에게 엄격하게 주어진 의무입니다.” 내가 말했다.


“허허!” 그가 말했다. “그건 다 하는 말이고! 자네 자신은 그 남자를 용서했나?”


“글쎄, 아니요!” 내가 말했다. “신께서 저를 용서해주시길! 저는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에 대해 합의하고 악수하세!” 듀리스디어 경은 명랑한 기색으로 외쳤다.


“그런 나쁜 감정에는 합의할 수 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리스도교인이라면 말이지요. 저는 복음서의 가르침에 더 맞는 상황에 합의하겠습니다.”


나는 약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듀리스디어 경은 큰 소리로 웃으며 방을 나섰다.(222~224쪽)

세's pick

제 이름에는 '용서'라는 뜻을 지닌 한자가 들어갑니다. 이름에 걸맞게 살라고들 하던데, 용서라는 게 뭔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매켈러는 자신이 용서하지 못했음을 시인하고(이것도 대단한 용기라고 생각해요), 외려 신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앞으로도 자신은 밸런트레이 귀공자를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아서일까요? 아니면 용서가 자신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일까요?

《밸런트레이 귀공자》 미리보기 2


나는 많은 일을 하면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지름길로 가서 두 사람의 만남을 은밀히 엿보려 했다. 어느 날인가는 거의 일주일간 다른 일 때문에 못 가다가 조금 늦게 도착했는데, 새로운 진전이 있었음을 알고 깜짝 놀랐다. 밸런트레이 귀공자의 집 벽에는 평소에 손님들이 주인과 흥정할 때 앉곤 하는 긴 의자가 있다는 말부터 해야겠다. 이 의자에 듀리스디어 경이 앉아서 지팡이를 만지작거리며 기분 좋게 만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서 1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밸런트레이 귀공자가 앉아 바느질하고 있었다. 둘 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았고, (이 새로운 자리에서도) 듀리스디어 경은 자기 적에게 단 한 번의 눈길도 던지지 않았다. 그는 서로 닿을 만큼 인접한 몸에서 가까이 있음을 더 직접 맛보았고, 의심할 바 없이 증오에 찬 즐거움을 깊이 들이켰을 것이다.
듀리스디어 경이 자리를 뜨자마자 나는 그에게 대놓고 다가갔다.

“주인님, 주인님.” 내가 말했다. “이건 품위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걸로 난 살이 붙고 있다네.” 그가 말했다. 이런 대답 자체도 이상했지만, 그의 특이한 표정에 나는 너무나 놀랐다.
“듀리스디어 경, 이런 악한 감정에 빠지는 것은 위험합니다.” 내가 말했다. “이것이 영혼에 더 위험한지, 이성에 더 위험한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둘 다 망가뜨리는 길로 가고 계십니다.”
“자네는 이해할 수 없을 걸세.” 그가 말했다. “자네는 나처럼 산더미 같은 원한에 가슴이 짓눌린 적이 없지 않은가.”
“더 이상 이런 일이 없더라도.” 내가 덧붙였다. “틀림없이 그 사람을 극단으로 몰아가실 겁니다.”
“그 반대라네. 나는 형의 기를 꺾고 있거든.” 듀리스디어 경이 말했다. (중략)

듀리스디어 경은 자기 친구들이 지나가면 쾌활하게 소리쳐 불렀고, 자기 형에게 좋
은 충고를 해주러 왔다고 소리쳤다. 형이 지금은 (아주 기쁘게도) 아주 부지런해졌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도 귀공자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받아들였다. 그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신만이, 아니면 악마만이 알 것이다.(314~315쪽)

랑's pick

여기 조용히 자라는 증오가 느껴지시나요?  

👀편집자의 추천 콘텐츠👍

〈밀양
아들을 잃은 신애는 교회에 나가게 되고,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씀에 따라 용서를 결심합니다. 그 결심을 전하려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찾아간 신애. 그러나 유괴범은 평화로운 얼굴로 자신은 이미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 마음이 편안하노라 말하죠. 그 모습에 신애는 한 번 더 무너지고 맙니다.
복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용서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입니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이 영화는 모성이라는 신화화된 속성을 가뿐히 무시해요. 지금껏 반복되어온 '모녀 갈등'의 서사를 되풀이하지 않고도 서로를 숨막히게 하는 감옥으로서의 '모녀'를 보여줍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후에도 오랫동안 '모성'과 '관계'에 대해 생각해야만 하는데요, 분명 편하게 볼 수는 없지만 꼭 추천하고 싶어요.
포스터에 예고편 링크도 걸어두었어요:)
4개월마다 만나는
하나의 테마, 다섯 편의 클래식
📚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시즌 3. 질투와 복수
011 폭풍의 언덕

에밀리 브론테 | 황유원 옮김

012 동 카즈무후

마샤두 지 아시스 | 임소라 옮김

013 미친 장난감

로베르토 아를트 | 엄지영 옮김

014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

보리스 비앙 | 이재형 옮김

015 밸런트레이 귀공자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 이미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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