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문장가의 이야기

💬  님, 한편을 같이 읽어요! ‘인플루언서와 미디어’를 주제로 세상에 영향력을 떨친 명문들을 소개해드리고 있습니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글쓰기는 명성을 날릴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인데요. 글쓰기의 위력이 큰 만큼, 작가로 성공하지 못하는 데 따르는 좌절도 크리라고 짐작되지요. 그리하여 오늘은 대문호 연암 박지원의 라이벌로 역사에 남아 있는 옛사람의 글을 들여다보려고 해요. "사랑하는 만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조선 후기의 문장가 유한준이 직접 쓴 묘지명과 그에 관한 평설입니다. 
저수(著叟, 유한준)는 사람됨이
온전한 것은 적고 결함이 많으며
활달하지가 않고 붕 떠 있으며,
견실하지가 않고 소탈하며
남들 아래에 거처하기를 좋아하고,
남들 앞장서기를 부끄러워한다.
욕망에 대해서는 한 치의 장점이 있어,
욕심 없다 한다면 수긍할 만하다.
남이 짙은 술 마신다면 나는 술지게미 먹고,
세상이 시장 같다면 나는 담박한 물.
본성상 기욕하는 바가 없고,
기욕은 문사(文辭)에 있어
처음 손을 대어 글을 쓸 때는
진(秦), 한(漢)처럼 바깥으로 치달리고
『장자』의 해학과 굴원의 원망을 담고,
사마천의 방자함과 한유의 기이함을 드러내며
한입에 물어 삼키고 뚫고 가르면서,
오십 년이 되었건만
결국 무엇을 얻었단 말인가,
서글프게 저녁나절 돌아간다.
여우는 죽을 때 언덕으로 머리 향하고,
사람은 궁하면 근본으로 돌아가는 법.
도는 육경에 있음을 알고,
사서에서 온축을 하여
처음엔 헷갈려 깨닫지 못하다가,
깨닫고 보니 죽음이 가깝다.
지혜는 투철하지도 심오하지도 못하고,
행실은 급수 따라 나아가지 못해
후회한들 뒤미칠 수 있겠는가,
정성을 쏟건만 노령에 이르다니.
적막한 밤에 잠을 못 이루고,
이리저리 생각해 보나
문도(文道)는 정수가 아니고,
저술은 껍질일 따름.
이것을 끌어안고 끝마친다면,
뒷날 누가 저수를 알아주랴.
저수는 이름도 지위도 없고,
저수는 자손도 없어
다른 날 청산에 간다면,
누가 무덤에 띠 묶어 표시해 주랴.
명의 글을 스스로 지어 두고,
광중에 넣을 날을 기다려
후인으로 하여금
저수의 무덤인 줄 알게 하리라.
 
─ 유한준(兪漢雋, 1732~1811년), 
「저수자명(著叟自銘)」 중에서

글이야말로 이름을 영구히 썩지 않게 하는 사업이라고 자각했던 유한준이 77세 되던 1808년(순조 8년)에 쓴 「저수자명」이다. 산문으로 된 152자의 서문이 앞에 있고 운문으로 된 이 장편의 명이 이어진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활동했던 문장가인 유한준은 박지원의 친구이되 박지원을 라이벌로 의식했다. 문장가로서의 평가는 박지원에 비해 낮았지만, 그의 가계는 개화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저명한 지식인들을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유한준은 호를 저수(著叟)라고 했다. 삼불후(三不朽, 썩지 않을 세 가지인 덕(德)과 공(功)과 말(言)을 세우는 일) 가운데 입언(立言)을 평생 사업으로 정한 그는 평소 자신의 글을 정리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52세에 ‘자저(自著)’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시문을 엮은 것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시문을 보충하고 산정하고는 했다. 호에도 아예 ‘저(著)’라는 글자를 사용했다.  

유한준은 박윤원(朴胤源)과 인척이었다. 곧 박지원의 집안과 혼척이었으며, 젊은 시절부터 박지원과 사귀었다. 그러나 박지원 선친의 묘소 문제로 양가에 갈등이 일어나, 두 사람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정조가 『열하일기』를 패관소설의 문체로 지목하자, 이를 기화로 박지원을 폄하했다. 

유한준의 가계는 서울에 대대로 거처했던 노론계다. 고조부 유황(兪榥)은 이정귀의 문인으로 전라 감사와 승지를 역임했으며 병자호란 때 척화파였다. 증조부 유명뢰는 송시열의 문인으로 단양에 은거했다. 아버지 유언일은 선릉 직장을 지냈다. 아들 유만주(兪晩柱)는 조선 후기 문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흠영(欽英)』을 저술했다. 개화기 때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저술한 유길준(兪吉濬)은 바로 유한준의 현손이다. 

본래 이름이 한경(漢炅)이었으나 이름을 고쳤다. 나이 열여섯에 아버지를 여의고, 이듬해 형도 잃었다. 고아가 된 유한준은 호서 지역으로 피신했다가 얼마 뒤 서울로 돌아왔으나 생활이 순탄치 못했다. 1788년(영조 44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음보로 벼슬에 나아갔으나, 벼슬살이에 뜻을 두지 않았다. 만년에는 송시열을 존숭하며 성리학에 몰두했다. 

1795년(정조 19년)에 쓴 「석농 김광국(金光國)의 수장품에 부친 글(石農畵苑跋)」에서 유한준은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며, 보면 쌓아 두게 되니, 그저 쌓아 두는 것이 아니다.(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 而非徒畜也.)”라는 말을 남겼다. 문화유산에 대한 안목을 얻는 방법을 말한 것으로 이해되어 널리 유행한 말이다. 대개 “사랑하는 만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식으로 의역되어 전한다. 유한준은 문장에 공력을 쏟아서 한때 자부심을 갖기도 했으나, 만년에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저수자명」에서 “본성상 기욕하는 바가 없고, 기욕은 문사에 있었다.”라 말하고, “한입에 물어 삼키고 뚫고 가르면서 오십 년이 되었건만, 결국 무엇을 얻었단 말인가, 서글프게 저녁나절 돌아간다.”라고 했다. 

유한준은 문장으로 스스로 즐겼으며, 시운과 운명이 자기편이 아닌 것을 서글퍼했다. 동곽의 맹인 전(田) 선생을 찾아가 자신의 운명을 점쳐 달라고 했다. 전 선생은 척전법으로 점을 쳤다. 여섯 번 동전을 던져 건지리(蹇之離)를 얻었다. 즉 건괘가 본괘이고 이괘가 지괘였다. 그 효사에 “구멍 난 나무, 천년 된 사슴, 산속의 바위(竅之木, 千歲之鹿, 山中之石)”가 나왔다. 전 선생은 다음과 같이 풀었다. 

“구멍은 비어 있음이다. 사슴은 오래됨이다. 산속의 바위는 고요함이다. 그대가 곤궁해지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다. 사물에는 넉넉한 면도 있지만 넉넉하지 못한 면도 있다. 운수에는 미치는 면도 있지만 미치지 못하는 면도 있다. 어떻게 조제할 수 있겠는가? 사물을 어찌 갖출 수 있겠는가? 그대는 사람에게 상서롭지 못한 것이 네 가지가 있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는가? 첫째는 세(勢), 둘째는 이(利), 셋째는 영(榮), 넷째는 명(名)이다. 세는 나를 욕되게 하고 이는 내게 독이 되며, 영은 나를 가혹하게 하고 명은 내게 질곡이 된다. 그렇기에 지혜로운 자는 흘겨보고 밝은 자는 그것들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대여 그만두게나.” 

전 선생은 “가난과 동무하라” 하는 노래를 불렀다. 유한준은 망연자실하여, 남산 아래에 거처하며 공명에 대한 뜻을 끊어 버리고 저서를 업으로 삼았다고 한다. 전 선생의 말은 곧 유한준 자신의 말이다. 

글쓰기는 나의 운명이라고 자각했지만, 만년에 이르도록 문장가로서 이름을 얻지 못한 삶은 대체 어디에 가치가 있는 것일까? 남에게 박수갈채를 받지 못하는 글쓰기의 가치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유한준은 규장각 직제학으로 있던 남공철과의 대화에서 자신의 글쓰기를 변호했다. 유한준은 자신의 글쓰기가 발분하여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시비와 선악을 따지려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아무 쓸모가 없는 유희일 따름이라고 했다. 

그는 아들 유만주에게 큰 기대를 걸고, 둘이서 문장을 짓는 즐거움을 누렸다. 그러던 아들이 먼저 죽자 “하늘이 빼앗아갔다.”라고 통곡했다. 「자전」을 지으면서, 더 이상 문장에 공력을 들이지 않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는 글을 짓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글쟁이였다. 만년인 69세 되던 1800년에 유한준은 「사영자찬(寫影自贊)」을 지었다. 자기 초상화에 자기가 평어를 붙인 것이다.


이 노인이 아니면 뉘런가 
고요함에 처하는 기상인 듯하되 성정이 침울하고 
멀리 내다보는 사려를 지닌 듯하면서 마음이 성글다. 
이것이 그가 평생의 거처로 삼은 바였다. 
옛사람도 아니고 지금 사람도 아니며 
실상도 아니요 허상도 아니며 
도가도 아니고 선가도 아니며 
은사도 아니요 방사(放士)도 아니로다. 


자기의 정체성을 반어적으로 규정했다. 고요함 속에서 생각을 맑게 가라앉히며 마음의 참된 바탕을 내관(內觀)하는 기상은 선가 수행자의 침착한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사물의 변화를 관찰하여 멀리 내다보는 사려는 도가풍의 초월적인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렇지만 “도가도 아니고 선가도 아니다”라고 스스로를 규정한다. 유한준은 만년에 남산 아래 태창(太倉) 부근에 살며 시문을 짓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자신은 옛사람도 아니고 지금 사람도 아니며 실상도 아니고 허상도 아니라고 했다. 모든 것을 부정함으로써 부정을 행하는 나 자신을 확인한 것이다. 

─ 심경호, 『내면기행』 중에서


심경호는 1955년 충북 음성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문과와 동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일본 교토대학 문학연구과 박사과정(중국문학)을 수료하고 교토대학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98년 국문학연구회 논문상, 2002년 성산학술상, 2006년 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제1회 동양문자문화상, 2011년 연민학회 학술상을 수상했으며 한국학술진흥재단(현 한국연구재단) 선정 제1회 인문사회과학 분야 우수학자로 뽑히기도 했다. 이 책 『내면기행: 옛사람이 스스로 쓴 58편의 묘비명 읽기』는 『한시기행』, 『산문기행』, 『나는 어떤 사람인가: 선인들의 자서전』과 함께 옛사람의 자취를 찾아 떠나는 기행 연작의 첫째 권으로, 2010년 우호인문학 학술상을 수상했으며 영어, 독일어, 중국어로 번역 출간될 예정이다. 『강화 학파의 문학과 사상』(공저), 『조선 시대 한문학과 시경론』, 『국문학 연구와 문헌학』, 『다산과 춘천』, 『한문 산문 미학』, 『한국 한시의 이해』, 『한시의 세계』, 『한시의 서정과 시인의 마음』, 『김시습 평전』, 『한국 한문 기초학사』(전 3권), 『자기 책 몰래 고치는 사람』, 『안평: 몽유도원도와 영혼의 빛』 등을 썼으며 다수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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