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희 기자 #우울증 #조울증

[주말에 뭐 읽지]  2020-12-04 #36

책, 책방, 사람 이야기를 전해 드립니다
주말의 책꽂이

image by pixabay  
리베카 울리스 지음, 강병철 옮김
서울의학서적 펴냄  

J와 한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다. 가장 친한 사람이 나였기 때문에 다들 내게 그의 안부를 물었지만 나도 소식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답장을 기다리다 지친 나는 J의 집을 찾아갔다. 대학 동기들과 우르르 몰려가서 치킨에 맥주를 마시던 자취방이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얼굴을 확인하기 전까지 돌아가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읽은 J는 한참 뒤 문을 열어줬다.

“야! 너는 왜 연락을 다 씹고!” 버럭 소리를 치며 집안에 들어서던 나는 곧 입을 다물었다. 내가 들어설 공간이 없었다. 쓰레기가 집안에 가득 차 있었다. 청소를 며칠 미룬 수준이 아니었다. J에게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걸 집안 풍경이 말해주고 있었다.

며칠 후 J를 설득해 함께 정신의학과를 찾아갔다. 진단 결과는 양극성 정동장애, 조울증이었다. 의사는 조울증을 ‘평생의 기쁨과 슬픔을 미리 끌어와서 한순간에 터뜨리는 폭죽’에 비유했다. 평생의 기쁨과 슬픔이라니.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J는 자신의 의지가 약한 게 아니었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혼자서 얼마나 자책했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푹푹 꺼졌다.

진단을 받고 난 뒤에도 J는 힘들어했다. 겨우 용기를 내 가족과 직장 동료 몇몇에게 자신의 상황을 알렸지만, “다 네가 마음먹기에 달린 일이다”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심지어 나도 가끔 J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잘 몰라서 그랬다’며 사과했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실제로 조울증에 대한 정보를 얻을 곳이 없었다.

9월 말 발간된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탄성을 질렀다. 조울증이나 조현병 등을 앓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매뉴얼이 꼼꼼하게 정리돼 있었다. 만약 이 책이 조금 더 빨리 나왔다면 내가, J의 가족이, 이 사회가 그에게 상처를 덜 주지 않았을까. 구급상자와 함께 비치해야 할 책이다.

나경희 기자 

시사IN 기자들이 추천하는 책
아빠가 육아 휴직을 결정했다
임아영·황경상 지음, 북하우스 펴냄 

“너무 자라서, 이제 숫제 늙어가면서야 나는 나 자신을 좀 더 설명하는 법을 매일매일 배우고 있다.”  

‘다 큰 어른도 이렇게 자랄 수 있구나’ 생각하게 만드는 에세이다. 잔잔하게 미소 띠게 하다가도 가끔 울컥하게 만드는 글을 일간지 기자 동기 부부가 함께 썼다. 계기는 남편의 육아휴직. 여덟 살 두진, 네 살 이준 두 아이를 아빠가 6개월 동안 도맡았다. 2019년 남성 육아휴직자 수는 2만2000여 명. 그래서 아직도 남자가 하는 육아는 “대단하다”라는 상찬을 받기에 엄마 아영은 억울하다가도, 드디어 남편과 진짜 동지가 되었다고 느낀다. 아빠 경상은 평범해 보이는 일상이 유지되기 위해 누군가 항상 뒤에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두 사람은 육아로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는 현실을 미화하지 않는다. 대신 그만큼의 사랑과 깨달음도 함께 기록했다. 엄마 아빠의 성장기다.
빛의 핵심
고재현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  

“우주에서 가장 속도가 빠른 빛은 진공 속에서 1초에 30만㎞를 날아간다.” 


한때 책 제목에서 어떻게든 물리학 냄새를 지우려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은 분위기가 확실히 달라졌다. 몇몇 용감한 물리학자들이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 진출해 물리학을 친숙하게 만들어냈고, 한국어로 물리학 대중서를 써낼 수 있는 전문가 작가의 층도 두꺼워졌다. 이제 물리학은 꽤 많은 독자가 흥미를 갖는 콘텐츠다. 고재현 교수(한림대)도 물리학 대중서 필자로 주목받아온 연구자다. 10대 청소년 대상 과학책을 몇 권 쓴 뒤 〈빛의 핵심〉을 내놓아 기대에 부응했다. 책은 빛의 물리학적 속성으로 시작해서 그 지식이 현대인의 실생활에 응용되는 장면으로 이야기를 확장해 나간다. 빛의 물리학을 읽다 보면 세상의 빛깔이 다르게 느껴진다.  


조용한 희망
스테퍼니 랜드 지음, 구계원 옮김 
문학동네 펴냄 

“내 아이는 노숙인 쉼터에서 걸음마를 배웠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작가의 꿈을 키워가던 스테퍼니 랜드는 짧은 연애로 계획에 없는 임신을 하게 된다. 남자친구는 그를 학대하는 사람이었다. 스테퍼니와 그의 딸 미아는 집을 나와 노숙인 쉼터에서 지내게 된다. 스테퍼니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가사도우미 일을 시작하고, “타인의 삶이 완벽해 보이도록 쓸고 닦는 동안 나의 존재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유령과 같은 일상을 반복한다. 하지만 결국 그는 몬태나 주립대학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해 자신이 6년 동안 가사도우미로 지내며 겪었던 사회적 약자의 삶을 생생히 증언한다. 책의 제목인 ‘조용한 희망’은 절망의 시간 동안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언젠가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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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민음사 펴냄  

“인간은 변할 수가 없다고 누가 말하는가? 인간은 지금까지 변화밖에 한 것이 없다.”  

〈섬〉이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알베르 카뮈의 스승으로 알려진 장 그르니에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에세이스트이자 미학자이다. 장 그르니에는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일화를 성찰적 어조로 풀어내는 데 뛰어났다. 〈섬〉을 비롯해 장 그르니에 선집 〈카뮈를 추억하며〉 〈어느 개의 죽음〉 〈일상적인 삶〉은 편히 읽히면서도 마음에 오래 남아 울림을 준다. 40년 만에 이 책을 새로 번역한 김화영 번역가는 장 그르니에를 ‘절제와 정신의 헐벗음을 가장 큰 덕목으로 삼아 생각하고 글을 쓰는 철학자’라고 소개했다. 따라서 번역문의 단어 및 음절 수를 가능한 한 적게 사용해서 그 자체로 섬들처럼 고독하도록 유의했다. 번역의 탁월함도 느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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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영토

<기억 전달자>

‘주어진 행복’을 깨면 ‘존재의 이유’가 보인다  

미래의 어느 날, 사람들은 시스템 '커뮤니티'에서 평화롭게 살아갑니다. 차별, 갈등, 전쟁, 기아 같은 끔찍한 기억들은 봉인되고, 안온한 일상이 모두에게 주어지죠. 그뿐인가요. 이곳에서는 열두 살만 되면 시스템이 미래의 직업을 알아서 결정해줍니다. 이곳에서 가장 고귀한 직업을 갖게 된 주인공 앞에는 과연 어떤 삶이 펼쳐졌을까요...

오늘의 추천책 기사를 읽다 뜨끔했습니다. 얼마 전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온 친구에게 저도 똑같은 말을 했거든요. “괜찮아. 다 마음 먹기 달렸어.” 요즘 따라 '굴을 파고 들어앉은 듯' 마음이 힘들다는 것이 친구의 하소연이었습니다. 그 얘길 한참 듣다 보니 저도 가슴이 답답해져 격려한답시고 반응한 것이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은 우울증 전력이 있는 친구에게 함부로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네요.
 
힘들었던 한 해가 지나갑니다. 정신과 의사들에 따르면 코로나19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불안을 넘어 우울과 분노 증세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더군요. 그래서인지 올해는 정신질환을 앓는 이들이 직접 쓴, 주목할 만한 책이 여럿 나오기도 했습니다. 관련 기사를 쓴 임지영 기자에 따르면 우울증의 경험이 각축을 벌이듯 출판 시장에 쏟아졌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였다는데요.
 
이들은 질병으로 인해 고통스러웠지만 성숙하기도 했다고 말합니다. "조울병을 앓지 않았더라면 내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보내준 지지와 응원에 감사하지 못했을 것이고, 내가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몰랐을 것이다"(이주현, <삐삐 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라고요. 다만 같은 정신질환자라도 주변의 지지가 조금이라도 있는 경우와 제로인 경우의 차이는 엄청나다” 하네요(이하늬, <나의 F코드 이야기>)

그러니 주변에 우울의 기미를 보이는 가족이나 친구가 있다면 그 세계를 이해하는 책 읽기부터 시작을 해보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전문적인 치료를 따로 권하되, 정신과 의사 정혜신씨 말마따나 그저 당신이 옳다며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 마음 먹기 달렸어따위 충조평판(충고·조언·평가·판단)’은 걷어치우고요. 저도 올해가 가기 전에 친구에게 다시 연락을 해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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