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사람들이 4천원짜리 꽈배기를 먹잖아요." 이날 만난 관계자의 말이 모든 상황을 정리했다. 어여쁜 도넛들이 식품업계에 새 화두를 주었다. 노티드 도넛으로 대표되는 인스타그램풍 프리미엄 도넛이 사람들의 인기를 끌며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사람들이 값나가는 도넛을 먹기 시작한 것이다. 작은 회사들이 프리미엄 전략으로 소비자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자 큰 회사들도 새로운 활로를 찾기 시작한 셈이다. 그 활로가 오늘의 허브 키친, 대기업이 마음먹고 만든 작은 수제 도넛 공장이다.

도넛맨의 하루

이곳의 리더는 '라인장'이란 직함을 달고 있는 한성훈 님이다. 그는 전국에 있는 SPC 그룹의 도넛 공장에서만 20년을 일해 오신 베테랑, 말 그대로 도넛맨이다. 도넛맨 한성훈 라인장님은 도넛 생활 20년의 노하우에 걸맞게 공장 곳곳을 자신의 집 부엌처럼 돌아다니며 도넛 공장의 공정 단계를 알려주셨다. 알려주시는 틈틈이 도넛의 발효 상황을 체크하고 도넛 튀기는 분들을 감독하고 어떨 때는 도넛을 직접 튀겼다가 시연을 위해서 도넛에 글레이즈드 시럽을 직접 발라주시는 등, 말 그대로 도넛 계의 만능 엔터테이너처럼 맹활약하셨다. 그분 덕에 도넛 만들어지는 순서를 잘 알 수 있었다.

도넛은 간단히 말해 가루와 물이 만나 기름을 머금어 모양을 갖추는 음식이다. 도넛도 빵류의 일종이니 다양한 종류의 밀가루로부터 시작된다. 밀가루는 와일드해 보이는 기계 속에서 우당탕탕(실제로 이런 소리가 남) 반죽된다. 반죽은 거대한 국수 기계처럼 생긴 기계를 거치며 점차 부드러워진다. 부드러워진 반죽에 동그라미 틀을 눌러 동그란 모양을 찍어낸다. 온도와 습도를 맞춰 발효를 두 번 거치면 아기 볼처럼 반죽이 부풀어 오른다. 부풀어 오른 반죽을 튀기면 우리가 아는 도넛 빵이 된다. 도넛 빵에 색색의 단 소스들을 끼얹으면 도넛이다. 어릴 때 집에서 엄마와 도넛이나 수제비를 만들어본 적이 있다면 능히 상상할 수 있는 순서다.

다른 음식 공장이 그렇듯 이곳도 가정에서의 음식 제조와 순서는 비슷하고 단위가 다르다. 음식에서 생산단위가 다르면 디테일이 완전히 달라지고, 개별적인 순간마다 미세하게 변하는 디테일을 조정하는 경험치와 능력을 노하우나 내공이라 부른다. 도넛맨 한성훈 라인장님 역시 도넛 고수의 내공을 갖췄다. 매일의 온도와 습도가 달라지니 도넛 반죽에 들어갈 물의 양과 숙성 과정에서의 미세한 온습도가 다르다. 도넛을 튀길 때도 디테일이 있다. 도넛은 비중이 가벼워 기름에 뜨는데, 어떤 도넛은 살짝 눌러서 기름 아래에서 튀기고 어떤 도넛은 기름 위에 띄워 튀긴 후 타이머에 맞춰 뒤집어준다. "잘 튀겨진 도넛은 여기 라인이 깨끗해요."라면서, 한성훈 라인장은 방금 튀긴 도넛의 측면을 보여주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중에도 도넛맨의 손은 쉴 틈이 없었다. 도넛 튀김기 앞에 도넛을 뒤집어주는 전용 도구가 있다. 길이가 70cm쯤 되어 보이는 쇠젓가락 느낌의 막대기 한 쌍이다. 한성훈 라인장은 도넛을 설명하며 도넛들을 샥샥 뒤집었다. 이 작업의 난이도를 알고 싶어 한번 뒤집어볼 수 있는지 청했다. 막상 기름 앞에 다가가니 190˚C에 가까운 기름의 열기 앞에서 움츠러들었다. 멀리 있는 도넛을 뒤집으려니 기름이 튀겠고, 세게 도넛을 집자니 도넛이 찌그러질 것 같고, 이런저런 걱정 속에 겨우 뒤집었다. 한성훈 라인장과 두 배 가까운 시간 차이가 났다. 도넛을 뒤집기 전엔 한성훈 라인장이 도넛맨 정도로 보였는데 뒤집고 나자 그가 도넛의 신으로 보였다.

도넛의 신 한성훈 라인장은 내가 도넛 튀기는 기계 앞에서 엉거주춤하는 동안 오늘의 하이라이트 장면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 튀겨진 도넛에 글레이즈드 시럽 뿌리기였다. 설탕을 녹인 글레이즈드 시럽은 놀이공원에서 풍겨오는 행복처럼 달콤한 냄새가 난다. 한성훈 라인장은 폭이 좁고 길이가 긴 쓰레받기처럼 생긴 전용 도구로 글레이즈드 시럽을 끼얹었다. 땅콩 껍질 색으로 구워진 도넛 위로 두터운 흰색 설탕 시럽이 얹히는 장면을 보자 미취학 아동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어른의 고민을 모두 뒤로 한 채 저 따뜻한 도넛을 집어들고 한입 베어 물고 싶었다.

도넛왕의 반격

시대를 예상하는 인간은 보상을 얻으나 시대는 늘 인간 예상과 엇갈리곤 한다. 인스타그램이 사람들의 식생활을 바꾸어 인스타그래머블한 음식이 유행할 거라 누가 예측했을까. 그 사이에서 인스타그램에 잘 어울리는 화려한 음식들이 유행하는 중이고, 그 사이에 찍으면 예쁘게 나오는 노티드 도넛이 있다. 노티드 도넛은 도넛의 프리미엄화를 불렀고, 도넛의 프리미엄화는 도넛 강자 던킨의 각성을 불렀고, 던킨의 각성은 경기도 한 켠의 공장을 만들어냈다.

강남역 던킨 라이브와 허브 키친에서 내내 '왜 이제서야...'같은 생각이 들었다. 강남역 던킨 라이브는 강남역 인근 상권에서 상당히 훌륭한 카페다. 자리 사이의 간격도 넓고, '강남 꽈배기' 같은 강남역 매장 전용 메뉴도 있다. 허브 키친에서 만드는 프리미엄 도넛은 물론 매장에서 크림을 바로 넣어 신선한 도넛들도 있다(대신 그만큼 값이 나간다). 와이파이도 잘 되고 해피포인트 적립도 되고 화장실도 언제나 깨끗하다. 던킨의 색을 콘셉트로 한 직원 유니폼이나 인테리어 브랜딩도 나무랄 데 없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소비자가 이렇게 좋은 걸 즐길 수 있느냐다. 대기업이 마음먹고 준비하면 중소기업이나 개인사업체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완성도가 나온다. 결국 열쇠는 소비자의 주머니 속에 있다. 사람들이 프리미엄 도넛의 맛과 멋에 눈을 뜨면 기업도 화답한다. 소비자의 선택이 기업의 상품을 결정하고, 소비자의 눈높이가 제품 수준과 직결된다. 맛있는 걸 먹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과 점점 높아지는 눈높이가 수준 높은 음식과 공간을 만들었다. 그렇게 보면 맛있는 걸 찾아 먹는 일에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