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예능 프로그램 PD가 되겠다는 꿈을 꾸며 방송국 입사 준비를 했었습니다. 처음 서류 합격을 한 한 방송사의 자기소개서 첫 문항은, 역시나 재미없게도 ‘귀사 지원 동기’였습니다. 저는 눈눈이이(눈에는 눈/이에는 이) 마인드의 소유자라, 성의 있는 질문엔 성의 있는 답변을, 성의 없는 질문엔 성의 없는 답변을 하곤 하는데요. 그런데 지원자 입장에서 또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나름의 임팩트 있는 사연을 적고자 노력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결과로 탄생된 이야기의 키워드는 ‘눈물’이었습니다. 눈물 이야기는 대충 이렇습니다. [어렸을 때는 눈물이 없는 것을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했지만. 사실 속으론 슬플 때 눈물이 나는 사람이 부러웠습니다. 그랬던 저의 눈물을 찾아준 것이 바로 tv 예능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저의 꿈은 다른 사람들의 눈가를 적실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되었습니다.] …라고 쓴 다음, 이어지는 단락에서 지원하는 방송사의 특정 프로그램을 언급하며 ‘눈물을 흘리게 하는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예시를 드는 전략이었습니다. 너네 이런 눈물 프로그램 만드는 곳이라 지원했다는 거죠.

 

[NO.006]

옷 사러 갑니다

2022년 4월 9일

 

이걸로 첫 서류를 통과하자, 전 한동안 이 레파토리를 재활용하여 다른 방송사 자기소개서의 지원 동기 항목을 채웠었습니다. 모두 먹혔던 것은 아니지만요. MSG가 약간 가미된 건 맞는데, 그렇다고 아예 사실이 아닌 것도 아니라 어느 곳에 써먹어도 적합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저는 실제로 어릴 때 스스로 눈물이 나지 않는 저 자신에 대해 걱정을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슬픈 영화를 보거나 슬픈 이야기를 들어도 왜 나는 눈물이 나지 않는 건지. 이러다 부모님의 장례식장에서도 눈물이 나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런 고민을 하곤 했었죠.

 

그런 저에게 눈물을 찾아준 첫 tv 프로그램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만 어른이 되어(?) 이제 눈물이 나기 시작한 다음부터, 제가 보면서 자주 눈물을 흘렸던 두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무한도전’과 그리고 강형욱 훈련사가 출연하는 반려견 프로그램들입니다.

 

‘무한도전'이나 ‘개는 훌륭하다’가, 아니 특히 ‘개는 훌륭하다’가 얼마나 위대한 프로그램인지에 대하여 열변을 토할 수 있지만.. 영화 뉴스레터니까 그에 대해 적지는 않겠습니다. 언젠가 이에 대해 말할 기회가 있겠죠. 아니 근데 그냥 말하고 싶네요. 저는 그 강한 고집으로 자신의 태도가, 자신이 살아온 방식이 옳다고 굳게 믿고 있던 한 아이가 마침내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변화의 첫 발걸음을 때는 순간. 그 순간이 너무 감동적이어서 그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참지를 못합니다.

 

영화 아니라서 안 말한다고 했으면서 끝내 이것을 말해버린 것은, 그냥 단순하게 개가 변하는 그 순간이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어떤 순간들이랑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치 영화의 주인공이 마침내 모든 역경을 버텨내고 용기 내어 한걸음을 내미는 순간. 주인공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느려지고, 주인공의 귀에만 누군가의 음성 혹은 웅장한 배경음악이 들리게 되는 온 세상(영화)이 흔들리는 바로 그 순간 말입니다.


쓰고 보니 너무 흔한 클리셰 같긴 하네요. 그런데 사실 모든 영화는 그 순간을 그리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얼마나 세련되게, 제가 앞서 묘사했던 것과는 훨씬 멋지고 창의적으로 그 순간을 표현하느냐의 문제겠지요.

 

지난주 언급했던 <스펜서>에 그런 장면이 있었습니다. (지난주에 적었으니 다들 보고 오셨겠죠?^^)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연기한 다이애나라는 주인공은 왕세자의 아내이기 때문에 그의 모든 행동들을 엄격하게 감시 받고, 또 제한당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게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다이애나의 옷입니다. 다이애나는 2박3일의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왕실 가족이 모여 있는 성에 도착하는데, 곧 그 기간 동안 입어야 할 옷들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점심 식사 때 입는 옷, 둘째 날 저녁 만찬 때 입는 옷, 짧은 산책 나갈 때 입는 옷, 긴 산책 때 입는 옷들이 모두 정리되어 옷장에 걸려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다이애나는 어느 날 옷을 바꿔 입어 봅니다. 나 빨강 싫어, 오늘은 검은 색 입고 싶어, 하면서요. 그랬더니 왕실이 쟤 지금 뭐하는 거냐고 난리가 납니다. 또 한 번 크게 난리가 난 사건이 있습니다. 다이애나에게는 파파라치가 많았습니다. 왕실뿐만 아니라 언론의 감시 또한 많이 받았던 것이죠. 그래서 방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 커튼을 촘촘히 치지 않으면 파파라치에게 사진을 찍히게 되어 (왕실의 말에 따르면)왕실의 명예를 실추할 수도 있게 되는데, 어느 날 다이애나가 커튼을 치지 않은 채 옷을 갈아입은 모양입니다. 다이애나는 바로 왕실 매니저에게 한 소리를 듣게 되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방에 걸린 모든 커튼을 고정 당하는 ‘벌’을 받게 됩니다.

 

영화에서 언급하고 싶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다이애나가 그 커튼을 잘라내는 순간입니다. 커튼을 잘라냄으로써 다이애나는 빛을 받게 됩니다. 이 빛은 물론 파파라치들의 카메라부터 반사된 빛이기도, 말하자면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선택을 통해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이 ‘선택이 없는 장소’를 변화시키려는 한 인물의 의지가 느껴졌습니다. 저번엔 ‘다이애나가 자신의 이름을 스펜서라고 말하는 순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적었었지만, 그에 앞서 커튼을 잘라내는 순간이 있었기에 자신의 이름을 바꾸는 순간까지의 감동이 이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옷을 바꾸고 자신의 방을 바꿨기 때문에, 이름까지 바꿀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그렇군요, 문제는 옷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주말엔 옷 한 벌을 사야겠습니다.



             - ONE DAY ONE MOVIE by 김철홍 -

 



드리는 말씀

1. 커튼을 잘라낼 때 다이애나와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표정이 정말 최고였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아카데미 시상식의 결과를 알고 난 다음에 봤기 때문에 이 엄청난 연기를 한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여우주연상을 받지 못한 것을 정말 의아하게 생각했었습니다. 도대체 제시카 차스태인이 얼마나 훌륭했던 거지? 그러고 있었는데 얼마 전 디즈니+에 공개된 <타미 페이의 눈>을 보고.. 제시카 차스테인에게 설득당해버렸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차스테인이 연기한 주인공의 ‘노래’가 나오는데요. 영화 마지막에 노래 부르는 건 정말 반칙 아닌가요? 다음 주엔 이 반칙 같은 순간(들)에 대해 적어 보겠습니다.

 

2.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비롯한 저의 생각이, 그리고 제가 무슨 옷을 살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네? 안 궁금하시다구요? 전 궁금한데요? 이런 오만한 저의 뺨을 날려주실 분을 찾습니다. [김철홍 vs 아카데미 영화모임]. 몇 자리 남지 않았습니다. 오는 화요일에 시작합니다. 자세한 공지사항은 https://stib.ee/JE25 여기서 확인 부탁드립니다.

 

3. 왓챠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클럽 하우스 : 한화 이글스> 추천드립니다. 야구를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우리가 알기 힘든 구단의 속사정, 감독의 속사정, 선수들의 속사정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재밌는 시리즈라고 생각하구요. 야구를 좋아하지 않으시더라도 꽤 감동적인 순간이 여럿 등장하는 드라마로 봐도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4. 메일 늦어서 죄송합니다.

sti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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