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르단 고루보비치 감독 인터뷰

2021-10-04


올해 개막작 <아버지의 길>은 전쟁이 조국 세르비아에 남긴 깊은 상흔을 20년간 영화에 담아온 사회파 감독 스르단 고루보비치의 네 번째 장편이자, 문제적 최신작이다. 굶주림을 못 견딘 아내의 극단적 행동 이후 두 아이마저 지방정부에 빼앗길 위기에 처한 어느 일용직 노동자가 중앙정부에 호소하기 위해 수도 베오그라드까지 300㎞를 도보 여행한다. 불의에 저항할 줄 모르던 힘없는 아버지의 각성이자, 이 맨발 투쟁은 국경‧언어를 넘어선 울림을 안긴다. 놀랍게도 세르비아 한 남성의 실화에서 출발했다. 영화제 개막 전 e메일로 인터뷰한 스르단 고루보비치 감독은 이 영화가 세르비아 사회에 던진 충격에 대해 솔직한 생각을 들려줬다

스르단 고루보비치 감독 ⓒMaja Medic

Q.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 선정을 축하한다.
A. 영화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영광이다. 첫 작품 <빗나간 과녁>(2001)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아 한국 관객을 만난 적이 있는데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올해 영화제에선 온라인으로 찾아뵐 수밖에 없어서 안타깝지만, 화상 GV로 한국 관객과 어떤 의견을 주고받을지 기대된다.
 
Q. 지난해 베를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관객상, 에큐메니칼 심사위원상(인간 내면을 깊이 있게 탐구한 영화에 주는 상) 2관왕을 차지하는 등 여러 영화제에서 호평 받았다.
A. 버림받은 개인이 홀로 시스템에 맞서 싸우는 과정을 그린 영화고 이 싸움에서 니콜라를 이끄는 것은 아이들을 향한 사랑이다. 이 사랑의 힘으로 그는 가족의 재결합이란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이건 보편적인 전제다. 니콜라가 겪은 부당한 일은 세르비아, 한국, 미국, 러시아… 어디에 사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거의 불가능해보이는 이 전투에서 이기려 애쓰는 한 아버지의 투쟁 또한 누구나 공감하고 감동할 수 있는 순수한 감정이다. 베를린, 몽펠리에, 도하, 시애틀….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항상 영화의 같은 지점에서 울고 웃었다


Q. <아버지의 길>은 전쟁 후 세르비아의 힘겨운 삶을 그려온 전작들의 주제를 잇는다. 영화의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었나.
A. 정의를 쟁취하기 위해 자기 고향에서 베오그라드까지 거의 200㎞를 걸어간 한 남성의 실화가 토대다. 영화 초반 설정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실제 사건과 다르게 극화됐지만, 아무튼 그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를 직접 만나러 찾아갔다. 그의 의지, 용기, 스토이시즘적인 태도에 감명 받았고 영화로 만들고 싶어졌다. 사회에 자극을 주는 주제를 다루는 것이 감독으로서 책임이자 예술의 의무다. 예술은 비판할 것을 비판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 오직 진실로써. 예술은 정치, 사회의 하수인이 아니라 양심이 돼야 한다.
 
Q. 니콜라의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의 전직장을 찾아가 체불된 임금을 달라며 극단적 행동을 하는 첫 장면부터 충격적인데.
A. 영화의 첫 장면이 충격적이고 강렬했으면 했다. 주인공 니콜라가 등장하지 않는 유일한 장면이다. 그리스 비극을 연상시키는 자기희생적인 장면이다. (아이들의) 어머니는 절망으로 인해 자신을 희생하지만 동시에 이런 행동이 남편을 일깨우고 움직이길 희망한다. 아내의 희생이 있었기에 니콜라는 여정에 나선다.
 
Q. 니콜라가 병원, 사회복지기관 등을 전전하는 초반부 장면에선 그의 모습을 등뒤에서 배경음악 없이 자연광과 정적인 카메라 움직임만으로 지켜보는 앵글이 반복된다.
A. 이 영화에선 상황, 액션, 과정, 움직임, 프레이밍 등의 반복이 많다. 반복은 카프카적이고, 관료주의적인 세계의 폐쇄된 집단들과 이 시스템 속에 놓인 보통 사람의 처지를 드러내는 극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니콜라의 여정은 이 세계와 시스템을 벗어나는 어떤 것이고, 이 지점부터 그는 존엄성 나아가 희망을 되찾게 된다. 니콜라의 여행길은 프레이밍 방식이 다르다. 더 자유로워 보이면서도 카메라가 그를 아주 미세한 수준까지 따라붙길 원했다. 그에게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감독으로서 판단하지 않고 그저 그의 입장이 되어 그와 함께 걷고 그를 뒤따르며 그보다 더 영리하게 굴지 않도록 하려고 노력했다. 대본을 쓸 때도 그저 플라스틱 물통 한병을 손에 쥐고 걸어가는 한 남자의 모습을 상상했다. 바로 이번 영화의 핵심 이미지다

Q. 실제 촬영도 극중 여정에 맞춰서 했나.
A. 세르비아 전역을 돌며 두 달 남짓 촬영했다. 이번 영화를 통해 조국을 더 자세히 알게 됐다. 세르비아는 아름다운 나라지만, 많은 것을 빼앗겼고 가난을 겪고 있다.
 
Q. 경비원, 떠돌이 개, 주유소 직원, 트럭 운전사 등 힘없는 존재들이 니콜라와 공감을 나누는 묘사들이 인상깊었다. 그래서 영화 마지막 10분간 니콜라가 겪는 일들이 조금은 뜻밖이었다.
A. 영화의 마지막 10분이 가장 중요했다. 이 시퀀스에서 우리는 새로운 니콜라를 보게 된다. 더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위풍당당하며 흔들림이 없다. 니콜라의 것을 훔쳐간 사람들은 악의 화신이 아니다. 그들도 자신들이 잘못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이 나약하고 잘못을 저지르게 만든 것은 가난이다. 잘못을 알기에 숨고,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부끄러워한다. 그들은 니콜라를 피해 달아나고 숨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의 부끄러움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다


Q. 미국 드라마 파고등으로 얼굴을 알린 배우 고란 보그단이 주연을 맡았다. 실제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유고슬라비아 출신이라고.
A. 고란은 전쟁통에 자랐다. 그가 11살 때 전쟁이 났고 그의 고향에선 끔찍한 전투가 벌어졌다. 고란은 훌륭한 배우고 지적이고 교양이 풍부해서 함께 작업하는 동안 즐거웠는데, 촬영 3개월 전부터 매일 몇 시간씩 리허설을 했다. 대사가 거의 없이 침묵과 내면연기로 일관하는 역할은 그도 처음이었고 우리 둘 다에게 도전이었다. 또 다른 어려움은 고란도, 저도 가난을 경험해보지 않았단 것이었다. 우리는 이 세계를 이해하려 노력했고 결코 오만하지 않으려고 주의했다. 니콜라와 그의 세계를 현실적이고도 진실되게 표현하기 위해 고란은 몸무게를 20㎏ 가까이 뺐고 비숙련 배우처럼 연기하려 했다.
 
Q. 이번 영화에 대한 세르비아 내 반응은.
A. 세르비아에선 강한 반응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건 우리 현실이 아니라는 사람들이 있는 한편, 세르비아인의 삶 그 자체라는 이들도 있었다. 정치적 논쟁으로까지 번졌다. 세르비아 정치인들은 세르비아를 부정적인 모습으로 내보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슬프지만, 세르비아의 이런 이미지는 정말로 우리 현실이다. 정치인들은 그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이 영화가 예상밖에, 그리고 부당하게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을 위한 세르비아 대표작(국제영화상 부문)으로 뽑히지 않았을 땐 큰 소란이 있었고 타블로이드 언론들은 저를 반역자,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기까지 했다. 세르비아 정치 풍속상 으레 있던 일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걱정되거나 하진 않지만 말이다.
 
Q. 장편 데뷔작 <빗나간 과녁>부터 20년간 네 편의 영화에서 전후 세르비아의 사회상을 다루는 동안 실제 현실에서 목격한 변화도 있을까.
A. 지난 20년간 세르비아는 역사적인 면에서 상당히 변화해왔지만, 본질적으로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대통령의 독재 집권 시기에 첫 영화를 찍기 시작했는데 이 영화를 다 찍기도 전에 그는 축출됐다. 이후 진보적이고 민주적이고 친유럽 성향 정권이 들어섰지만 이를 이끌던 조란 진지치 총리가 3년 만에 암살당했다. 그 순간부터 세르비아는 원을 그리며 돌고 있다. 민주적이고 개방된 사회로 나아갈 가망성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주로 과거를 직시하지 못하는 무능함과 민족주의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다.
 
Q. 매 작품마다 아버지란 존재가 부각된다.
A. ‘아버지는 분명 제 영화들의 중심에 있다. 저는 아주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그 흔적을 안고 살아왔다. 이 관계성, 혹은 결핍이 저를 결정지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연유로 언제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에 강하게 끌린다. 두 번째 영화 <트랩>(2007)<아버지의 길>은 둘다 자식을 구하기 위한 아버지의 투쟁이다. 아버지라는 모티프는 <써클즈>(2013)에도 있다. <써클즈>의 주인공은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범의 아들을 자신의 새로운 아들로 맞이한다. <빗나간 과녁>에선 동생과 나이차가 많은 형의 관계가 사실상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띠고 있다. 전쟁은 세르비아에서 살아가는 모두의 삶에 상흔을 남겼다. 우리는 10년 동안 전쟁의 그늘에서 살았다. 저는 전쟁터에 나간 적은 없지만, 전쟁은 언제나 우리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 <써클즈>를 제외한 다른 세 작품은 전쟁을 직접 다루진 않았지만, 전쟁의 그늘과 여파는 주인공의 운명을 결정짓는 요소로 작용한다.
 
Q. 차기작도 이같은 주제를 이어갈까.
A. 저는 늘 이야기를 찾는 데 시간을 많이 들인다. 생각하는 것들은 있지만 밝히긴 이르다. 확실히 사회 현실을 다룰 테지만, 인물들이 살아가는 세계에 그 현실이 스며있도록 그릴 것 같다. 흥미롭고 사회에 경종을 울릴 만한 작품이 되길 희망한다
나원정(중앙일보 기자)
극장 어둠 속이 가장 행복한 영화 기자. 영화와 사람에게 살아가는 의미를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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