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 호
(통권 54호) 2022. 3. 10
🤘 열린 세미나 🤘

제20대 대통령 선거에 대한 평가와 향후 전망


코로나 정국이라는 위기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세계적인 긴장감도 어느 때보다 고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 치러진 제20대 대선의 결과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또 어떤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지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관심 있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토론입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 일정: 3월 17일 목요일 저녁 7시 30분
  • 장소: 카카오톡 <열린 세미나> 오픈채팅방


👇  지난 세미나 갈무리  👇 
1

포퓰리즘 정치의 핵심은 무엇인가 2부
2월 24일() 저녁 730
   
<소주제>

1 포퓰리즘의 조건

2 표퓰리즘 정동의 위로부터의 구성

3 이대남 포퓰리즘의 특성

4 헤게모니 전쟁

반갑습니다! 오늘은 열린 세미나 <포퓰리즘 정치의 핵심은 무엇인가> 2부로, 『급진의 20대-K-포퓰리즘, 가장 위태로운 세대의』 (김내훈, 서해문집, 2022) 책을 바탕으로 논의를 진행하기로 하였습니다.


조금 산만한 구성을 가진 『급진의 20대』를 새롭게 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이 네 개의 주제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주제들 각각에 대해 읽은 바를 가지고 토론해 보고, 마지막으로 이 책의 입장에 대한 '논평과 대안'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1. 포퓰리즘의 조건
  • 낡은 것은 가고 새로운 것은 오지 않은: 포퓰리즘의 정치 경제적 계기
  • 기만과 위선의 정치: 포퓰리즘의 문화정치적 계기
  • 미래는 중단되었다: 부모보다 가난할 세대로 산다는 것

 

  1. 포퓰리즘 정동의 위로부터의 구성
  • 만들어진 세대: 20년간의 롤러코스터
  • 정치적 불균형과 협소한 정치적 상상력
  • 진짜 분노를 가리는 학습된 분노: 사유의 외주화

 

  1. 이대남 포퓰리즘의 특성
  • 혐오: 우울과 불안의 그릇된 방어기제
  • 포퓰리즘: 그들과 우리의 항시적 투쟁
  • 20대의 탈정치적 정치: 응징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
  • 외부인의 생성: 공정한 차별주의자들

 

  1. 헤게모니 전쟁
  • 헤게모니 전쟁: 2016 촛불시위와 20대 현상
1. 포퓰리즘의 조건
- 낡은 것은 가고 새로운 것은 오지 않은: 포퓰리즘의 정치 경제적 계기
- 기만과 위선의 정치: 포퓰리즘의 문화정치적 계기
- 미래는 중단되었다: 부모보다 가난할 세대로 산다는 것

ㄱ) "낡은 것은 가고 새로운 것은 오지 않았다"는 낸시 프레이저의 말이라고 합니다.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낸시 프레이저, 책세상, 2021.)


ㅎ) 이 책은 이대남을 포퓰리즘이라는 키워드로 정리하는 책인데 신자유주의의 위기를 포퓰리즘의 조건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ㄱ) 『급진의 20대』의 저자는 이를 '정치의 공백'이라고 표현합니다. 정치가 '의제의 빈곤'에 시달리고 있고 대중의 정치 신뢰도와 효능감이 바닥이라고 부연합니다.

 

ㅎ) 이 뜻의 interregnum은 가톨릭 용어로 널리 사용되어온 용어이고 낸시에게 저작권이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좌파에서 이 술어를 활용한 사람은 안토니오 그람시였습니다. (『옥중수고』)

 

ㄱ) 설명 감사합니다. 책을 검색해보니 해당 부분이 있습니다.

"그람시는 이를 '인터레그넘'이라 일컬었다. … 이 공백을 채울 뾰족한 대안과 해법이 보이지 않을 때, 포퓰리즘이 부상한다. 샹탈 무페는 이것을 '포퓰리즘 계기'라고 부른다."


ㅈ) 무페의 포퓰리즘은 위기의 외주화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신자유주의나 기타 세계적 동맹 위기에 대한 외주화인 것 같고요. 학술적 자료는 못 찾겠네요.

 

ㅎ) 2008년 서브프라임모기지로 경제적 위기를 맞은 신자유주의가 2011년 반란의 좌파 포퓰리즘과 거의 동시기의 우파 포퓰리즘에 의해 정치적 도전을 받았지만 포퓰리즘이 그 위기를 극복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의미에서 포퓰리즘의 득세를 공위기(정치적 교황이 없음) 상태의 징후로 읽자는 것이 기본 취지라고 봅니다.

 

ㅂ) 책의 소제목으로 '공공성의 붕괴'라는 말이 있는데요, 그렇다면 저자는 '정치적 교황이 없음'을 '공공성의 붕괴'로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책에서는 '공공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위험의 수준과 공동의 대응 방식의 차이를 낳는 중요한 요인이자 사회의 시스템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제시하는 틀“


ㅎ) 신자유주의는 공공성의 해체를 모토로 삼은 정치전략입니다. 흔히 국가에서 시장으로의 권력 이전이라는 상투어가 그것을 표현했습니다. 공적인 것(the public)으로서의 정치가 국민의 의사를 대표하기보다 국가 안으로는 치안(내치), 밖으로는 전쟁(전지구적 내전)의 형태를 띠었습니다. 테러에 대한 전쟁이 그것입니다.


ㅂ) 설명 감사합니다. 책에서 공공성의 해체가 의제의 빈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ㅈ) 신자유주의에서는 공공성의 범주를 확장하는 데 있어서 걸림돌들을 해체하는 것이 우선 전략이 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ㅎ) 한국에서는 신자유주의의 발전방향을 놓고 시장지상주의적 신자유주의(한나라당, 새누리당, 국민의 힘)와 사회적 신자유주의 사이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후자는 (더불어)민주당에 의해 표현되어 왔습니다.


ㅂ) 정치가 전쟁을 목적으로 하면서 '정체성 정치라는 기만'이 미국에서 생겨났고, 그런데 이 부분에서 미국과 한국에 좀 차이가 있다고 말하는 부분이 (책에서) 흥미롭게 읽혔습니다. "한국의 민주화 세력(민주당)은 미국의 리버럴과 달리 정체성 정치에 집념하지 않는다." 이 부분이 미국의 포퓰리즘과 한국의 포퓰리즘의 양상이 달라지는 이유 중 하나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ㅎ) 둘 다 공공성의 약화/해체를 지향했지만 신자유주의가 가져올 무정부성을 제어할 방안에서 태도의 차이가 있었는데 그것이 보수와 진보의 대립, 선별복지와 보편복지의 대립,… 같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ㅂ) 여기서 '둘 다'는 한국의 국힘당과 더민주당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ㅎ) 네. 정체성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PC)은 한국에서는 민주당이 아니라 정의당이나 녹색당의 의제로 되고 민주당은 정체성 정치에서 shy한 태도를 보입니다.

 

ㄱ) 저자는 라클라우 무페의 포퓰리즘 논의를 자주 언급하면서 '등가적 관계'("네가 원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라는 공감과 동의의 주고받음")에 대해서 말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11장 끝에서 세 번째 단락에 보면 2016년 촛불에 대해서 저자는 당시 "등가적 연쇄가 장기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동의하는 한두 개의 요구 아래 결집하고 연대했기 때문"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ㅎ) 우리/인민 이전의 다양한/차이나는 정체성적 요구들이 갈등하지 않는 관계 속으로 들어갔을 때, 즉 '우리'의 구성요소로 편입되어 인민을 형성하는 관계로 편입될 때를 등가관계로 보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헤게모니 기표 속에서의 요구들의 등가사슬을 지칭한다고 할까요.


ㅂ) 신자유주의의 위기가 포퓰리즘의 조건이라는 이야기가 앞에 나왔는데요, "부모보다 가난할 세대로 산다는 것"이라는 표현도 신자유주의 위기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고, 또 왜 20대를 중심으로 포퓰리즘이 과격화되고 있는지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2. 포퓰리즘 정동의 위로부터의 구성

-만들어진 세대 : 20년간의 롤러코스터

-정치적 불균형과 협소한 정치적 상상력

-진짜 분노를 가리는 학습된 분노: 사유의 외주화

ㅎ) 조국 사태 이후에 위선과 불공정이 최대 화두로 떠오르고 그것이 이른바 '이대남'적 회집의 계기가 되었는데 신자유주의를 추진하는 것과 이른바 '진보'(적폐 청산) 사이의 내적 길항이 위선 프레임의 좋은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사회적"과 "신자유주의"의 결합이 둥근 사각형처럼 사실상은 형용모순에 가깝고, 그것이 위선이라는 비판에 속수무책으로 놓이는 경향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이 책에서 '이대남'은 의제된 현상으로 파악되고 내적 자율성이 취약한 집합화로 묘사되었습니다. '만들어진 세대'라는 표현이 보여주는 바이기도 합니다.


ㅈ) 사회적 집단 능력에서 이질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고, 위선이라는 형용모순적 정치적 정당화 언술전략에 따르는 것 같습니다.

 

ㅎ) '이대남' 회집의 가장 중요한 계기가 촛불집회였음을 상기하면 '이대남'을 과연 의제된 세대, 제작된 세대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떠오릅니다.


ㅈ) 세대는 늘 제작되어야 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확인 차이일 것 같습니다.

 

ㅂ) 저자의 20대 지인들(?)의 인터뷰를 보면 무슨 의견이든 상관없이 결국 "내가 하기 달렸다. 나만(나라도?) 잘 살아야지."라는 결론으로 대부분의 인터뷰가 끝나는데요, 정치적 상상력이 협소하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는 꼭 20대만 그런 것은 아니라 생각되고요. 신자유주의가 좋아하는 정동이겠지요.

 

ㅎ) 20대 남성 세대는 한국과 세계에서 신자유주의가 절정을 향해 치닫는 시대에 성장했고 그만큼 경쟁을 깊이 내면화한 세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2008년의 反이명박 촛불집회나 2016년의 反박근혜 촛불집회에서 20대 남성 세대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거부보다 '경쟁의 공정성'이 침해당하는 것(대표적으로 최순실과 정유라)에 반대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임된) 촛불정부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지속되는 것에 직면하면서 안티세력('안티네트워크')으로 정체화해 가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안티네트워크는 촛불로부터의 전향이라기보다 다른 형태로 (자기 나름의) 촛불을 지속하는 것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을까요?

 

ㅈ) 촛불보다는 담배 피우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ㅎ) 이런 의미에서는 촛불회집체 속에서 '성폭력을 거부하는 미투페미니즘회집체'와 '페미니즘이 불공정하다고 느끼는 이대남회집체'로 균열되고 있는 것이 현시점의 특징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ㅁ) 당시 이대남의 거셌던 항의가 기억납니다. 그들의 사회정치적 입지가 바로 그 시점 그 사건 속에서 표출된 것으로 본다면 앞으로도 그들의 행진은 다양한 형태로 돌출되어 나올 것이라 예상됩니다.

3. 이대남 포퓰리즘의 특성

-혐오: 우울과 불안의 그릇된 방어기제

-포퓰리즘: 그들과 우리의 항시적 투쟁

-20대의 탈정치적 정치: 응징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

-외부인의 생성: 공정한 차별주의자들

ㅂ) '공정한 차별주의자'는 '공정한 경쟁'의 다른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ㅎ) 네, 90년대 이후생인 이대남의 공정은 한국 자본주의 전성기의 공정이고 신자유주의 경쟁의 공정입니다. 한국이 종속국이면서 권위주의 철권통치가 지배하던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공정은 민주주의적 공정이었습니다. 공정 개념의 전환이 있었고 20대남성은 이 시기에 한국이 세계경제대국으로 올라서는 것을 경험합니다. 민주공정이 자유경쟁공정에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시대체험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경쟁은 그 자체로 응징을 내포하고 잠재적으로 혐오를 포함합니다.

 

ㅈ) 순간적 혐오와 결정적 우애도 있을 것 같습니다.

 

ㅎ) 민주주의가 실질민주주의로 되지 못하고 형식적 차원에 머물면서 다중의 불행에 대한 변명이 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ㅂ) 촛불 혁명이후 문정부에 대한 분노정서가 공통적으로 생겨났다고 보는데요, 그 분노의 성격은 각기 다를 수 있고 그 중에서도 '미투페미니즘회집체'가 느끼는 문정부에 대한 분노와 '이대남회집체'가 느끼는 문정부에 대한 분노는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ㅂ) '다중의 불행에 대한 변명'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요, 좀 더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ㅎ) 미투페미니즘회집체는 가부장제를 비롯해서 과거부터 현재까지 유전하고 있는 차별에 대한 대항이라면, 이대남회집체는 그 차별을 (개인적 경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시정하려는 노력이 차별조장적(=불공정)이라고 이해하는 것이지요. 가난해도 고통스러워도 그것이 민주주의의 결과라면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리를 말합니다.

 

ㅂ) 설명 감사합니다. 최근 민주주의 자체를 혐오하는 듯한 발언들도 종종 들리곤 하는데요, 형식적 민주주의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발언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ㅎ) 경쟁력을 통한 차별시정 혹은 새로운 차별은 옳지만 정치를 통한 외부로부터의 시정은 그 자체가 차별조장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과거에 이미 정치를 통해 만들어졌고 현재까지 지속되는 (여성)차별은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합리화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정justice의 관점 "속에서" 이대남의 관점을 부정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지극히 어려워 보입니다. 그것이 신자유주의적 공정의 논리에 일관되기 때문입니다.

 

ㄱ) 정체성 정치에 대한 이 책의 관점은 무엇일까요?


ㅎ) 본격 분석이 나오는 것 같지는 않지만 (신)자유주의 정치로 파악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 민주당 정치의 기반이 되는 소수자 정치. 우리가 차이를 강조하면서도 공정을 넘어서 공통을 사유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경쟁의 공정은 차이들 사이의 전쟁을 부추길 뿐 차이들의 연합을 사유할 수 없게 합니다.

 

ㅂ) 한때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한국 사회에서 이슈가 된 적이 있었는데요, (책의 내용과는 별개로) 이 말을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justice 자체를 문제로 삼는 것 2) justice를 문제의 틀로 삼는 것. 이후 한국에서의 공정담론은 공정을 문제의 틀로 삼아 모든 것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온 것 같습니다.

4. 헤게모니 전쟁

-헤게모니 전쟁: 2016 촛불시위와 20대 현상

ㅎ) ‘20대를 세계정치경제 상황과 계급구성 상황(단편적이지만)과 연관하여 고찰하는 유익한 연구다. 20대라는 세대 개념에 집중하며 세대를 포괄하는 다중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다중의 자치, 자율, 자기조직화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세대 연구에 머무르며 적극적인 정치적 상상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가졌는데요. 헤게모니 전쟁에서 필자는 라클라우 무페의 좌파 포퓰리즘 전략에 기대면서 20대의 급진화 가능성에 큰 기대를 겁니다. 이 기대 속에서, 촛불집회에서 '박근혜 퇴진'과 같은 "헤게모니 기표"(밈)를 통해 좌파적 '우리'를 생산하는 것을 민주주의 정치의 포퓰리즘적 모멘트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아래로부터 다중의 자기조직화보다 위로부터 다중을 정세적으로 조직하는 기획을 선호하는 입장을 표현한다고 봅니다.

 

ㄱ) 저자가 정체성 정치는 여러 곳에서 비판적으로 보는 듯한데 등가사슬은 대안을 사고할 때도 나오는 개념인 것 같아서요. 등가사슬이 정체성 정치와 얼마나 다른 것인가, 둘의 관계가 무엇인가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찾아보니 다음 논문에 이런 문장도 있습니다.

"이것은 라클라우가 큰 틀에서 ‘정체성identity의 정치’라는 이론적 흐름에 속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좌파 포퓰리즘의 가능성과 난점」 김정한(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ㄱ) 저자는 왜 '분노한 자들' 대신 '위태로운 자들'로 20대를 호명하자고 할까요? 저는 잘 설득이 안 되었습니다. 책 마지막 부분의 논의입니다. 인터뷰이들의 답변에 대한 해설이나 소속 카톡방에 대한 필자의 개입 경험을 설명할 때 위로부터의 조직, 계몽의 관점을 취하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ㅈ) 헤게모니 개념틀의 확장 하에서 가능성을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ㅂ)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그 안에서 가능성을 찾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까요? (더불어 저는 자유주의에 대한 저자의 해석과 입장이 잘 파악되지 않아서 다른 분들은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ㅎ) 전위나 당(필자는 이런 정해진 주체성 조직을 언급하지 않지만)의 역할이 헤게모니 기표(레닌이라면 전술 슬로건이라고 불렀을 텐데요)를 창출하는 것으로 정립됩니다. 이러한 관점은 자기조직화와 공통화를 소홀히 할 위험이 있습니다.

20대남성의 이중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표현이라고 해석됩니다.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전통적 정의가 이중의 의미에서 "위험한 계급dangerous class"이지요. 발리바르가 대중의 이중성을 논할 때도 이 표상에 의지합니다. 대중의 (이중의미의) 공포. 정체성들이 '인민'인 '우리'가 될 때 힘을 발휘한다는 주장이므로 정체성주의가 아니라 인민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ㅂ) 위로부터 조직되는 인민주의 기획이겠네요. 고맙습니다.

 

ㅁ) 대중의 이중성은 역사적으로 많은 재해석을 가능케 합니다. 역시 이대남의 미래에 대해서도 불확실하지만 기대가 가는 사유를 던져줍니다.

 

ㅎ) 철학사적으로 라클라우와 무페는 라캉-알튀세르-발리바르의 계보 속에 놓이는데 이 계보는 기존 공산당/사회당의 당정치에 공감하면서도 그것의 위험/한계를 견제하면서 좌파 지식인들의 고유한 이론적 실천을 중시하는 흐름을 구성합니다. 중앙위원회(실천 축)/중앙편집국(이론 축)으로 구분된 레닌의 (당의) 두 개의 중심 이론에서 중앙편집국을 독립시키고 그것이 독자적으로 이론적 실천을 수행할 권리를 주장하는 계보를 진화시키는 흐름이라고 할까요.

 

ㅂ) 흥미롭습니다. '위로부터 조직되는 인민주의 기획'이 어떤 것일지 잘 상상은 안 됩니다만, 저는 좀 더 공부와 고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ㅎ) 페미니즘이 정체성에서 출발하되 정체성을 넘어서는 공통을 구축하는 방향을 취함으로써만 자신의 필요를 실현할 수 있듯이 이대남이 경쟁에서 출발하되 경쟁을 넘어서 공통을 구축하는 방향을 취함으로써만 혐오/응징의 근저에 놓인 불안과 우울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ㄱ) 『방법으로서의 경계』 9장에 라클라우/무페에 대한 비판이 있어서 찾아보고 있는데요. 이런 문장들이 있습니다.

"라클라우는 기존의 제도적 구조가 구축한 제한들 안에서만 정치의 갈등적 차원을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된다." (라클라우가 말하는 공통지대는) "어떤 종류의 공통지대인가? 그것은 포섭될 수 없는 차이를 표시하는 배제에 의존하고, 그런 이유로 포섭된 모든 그 차이들을 등가로 전환하는 배제에 의지한다. … 이 공통지대는 홉스주의적 커먼웰스commonwealth의 초월적 구조를 경향적으로 공유한다. 라클라우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본질적인 측면에서 홉스의 작업을 생각한다. 우리가 보았듯이 홉스는 자연 상태를 질서 지어진 사회의 대척점으로 제시하였다. … 그렇게 묘사한 결과, 위정자의 질서는 그것이 가질 수 있는 어떠한 내재적 가치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하나의 질서이고 유일한 대체재는 급격한 무질서라는 이유로 수용할 수밖에 없게 된다.”(45).

 

ㅎ) 윤석열이 우파 포퓰리즘 경향을 표현하는 가운데 이재명은 좌파 포퓰리즘 경향을 일정하게 표현하는데, 급진적 포퓰리즘 계기가 될 수 있는 "기본소득" 슬로건은 "유능한 경제대통령" 표상 속에 자꾸 묻혀 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준호는 자신의 기본소득을 평등과 평화의(정확한 워딩은 기억 안 나네요) 기본소득으로 설명하면서 이재명의 기본소득을 경제성장을 위한 기본소득이라고 비판하더군요.

 

ㄱ) 책에서 많은 20대들이 자동화/플랫폼 사회에서 기본소득이 지급될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는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ㅂ) 공정한 경쟁을 위해 '기본소득'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공통으로 나아가는 길이 과연 경쟁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을 저는 오늘의 과제로 남겨놓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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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선 자유토론
3월 3일() 저녁 730
   

열린 세미나에서 대선을 일주일 앞두고 자유토론을 진행하였습니다. 대선과 관련해 복잡하고 답답하게만 보이던 현상들을 논의를 통해 조금씩 풀어낼 수 있었고, 또 이전과는 다른 각도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ㅎ) 다들 좋으나 싫으나 수개월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주제이니 궁금한 것이나 의견이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ㄴ)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투표 결과가 곧 한국민이 만들어내는 '공통의 현실'이 아닐까? 하고요. 여론에 영향을 받든, 자신의 추구하는 방향이 그러해서이든 혹은 국민의 힘, 윤석열이 하는 말, 혹은 여론에 사람들이 얼마나 영향을 받을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민의 평균은 실체를 파악하고 있을까? 그것이 투표 결과가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임시적이나마 한국민의 커먼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ㅎ) 투표 결과가 "한국민의 커먼"의 상태를 반영할 것이라는 의견인데 다른 의견은 없을까요?

 

ㄱ) 광장에 투표하자, 양당제를 넘어 다른 미래를 만들어가자는 주장을 어떻게 봐야 할지 궁금합니다.

[경향신문] 당신의 광장에 투표하시라

한편 오늘 안철수-윤석열의 단일화 발표에 대한 심상정 후보의 기자회견에 대해서 용혜인 대변인(기본소득당 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은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심상정밖에 남지 않았다는 거짓말》

오늘 아침, 안철수 윤석열 후보가 돌고돌아 결국 단일화를 발표한 이후 정국이 혼란스러워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단일화는 없다면서 뒤로는 권력 나눠먹기 단일화를 발표한 국민의힘과 국민의당은 "그럼 그렇지"라는 국민의 냉소만 강화하는 뻔하디 뻔한 정치를 보여줬습니다.

이를 두고 정의당 심상정 후보는 특별 기자회견을 열어 "남은건 심상정과 국민뿐이다"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심상정 후보님, 후보님의 말씀은 사실이 아닙니다.

안철수 후보는 사라졌지만, 정의당 심상정 후보와 기본소득당 오준호 후보를 비롯해 여전히 여러 후보들이 대안정치를 하겠다며 대선레이스를 뛰고있습니다. 심상정 후보님께서 20년동안 지켜온 진보정치의 꿈을 꾸는 후보만 해도 심상정, 오준호, 이백윤, 김재연 후보가 있습니다.

원내 의석수가 적은 소수정당의 대표 정치인으로서 심상정 후보가 지금까지 겪었을 어려움은 이해하지만, 정의당보다 작은 정당의 존재를 지우고, 이들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것은 진보정당의 대표정치인이 할만한 일이 아닙니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 티비토론하는 것은 두고볼 수 없지만, 심상정 뒤의 후보들이 티비토론에 끼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 "다당제 정치"는 아니지 않습니까?

초청외 후보 토론회에 불참하며 "차라리 충청에 가는게 유리하다"고 했던 김동연 전 후보와 같은 모습이 '다당제로의 변화'를 꿈꾸는 대안정치는 아니지 않습니까?

기후대선운동본부에서 제안했던 정의당-기본소득당-진보당 대선후보 토론회가 최종 무산된 것은 정의당이 참석하지 않겠다고 밝혔기 때문입니다.

심상정의 소득보장정책과 기본소득당 오준호의 기본소득을 두고 토론하자는 오준호 후보의 제안에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민주노총의 토론 초청이 있었지만 정의당 심상정 후보는 응하지 않았습니다.

소수정당들과의 토론으로부터는 도망다니는 대신, 선거 시작부터 진보정당, 대안정당이 아닌 안철수후보를 찾아 제3지대 정치를 이야기한 결과가 바로 오늘입니다.

심상정 후보님.

"심상정만 남았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심상정 후보님의 뒤에는 오준호도 있고, 김재연도 있습니다.

'정의당까지만'은 다당제가 아닙니다.

'정의당만 존재하고 나머지는 정의당 밑으로 모이자' 역시 다당제 정치가 아닙니다.

거대양당의 사표론을 비판하면서, 오로지 나만이 대안이고 제3지대라고 다른 소수정당들의 존재를 지우는 내로남불역시 다당제로의 변화를 꿈꾸는 깃발이 될 수 없습니다.

기본소득당은 지금까지 해왔던 것 처럼, 진영과 이해득실을 넘어서 대한민국의 대안을 만들고 미래를 열어가는 정치를 해나가겠습니다.

기본소득 대한민국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를 이어가겠습니다.

2022.03.03

기본소득당 오준호후보 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

국회의원 용 혜 인

 

ㄴ) 그러게요. 애초에 TV 토론에 유력 후보만 토론할 일은 아니었다 싶습니다. 그것은 양당정치의 다이내믹을 도와주는 셈이네요

 

ㄱ) 네. 말씀하신 대로 티비토론만 보아도 그렇지만 수많은 제약조건 속에서 이루어지는 극도로 제한적인 의사표시인 만큼 투표는 커먼의 아주 일부, 왜곡된 일부만 보여주는 것 아닐까요? 오히려 커먼의 다양성을 일그러트리고 청색과 붉은색으로 억지로 녹여내는 폭력적인 장치 같습니다.

 

ㅎ) 당신의 광장에 투표한다는 것이 어떤 투표 행동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ㄴ) 대중매체가 커먼을 반영해내지 못하는 것은 분명한데…. 자신의 광장에 투표하자는…. 우리의 경우 열린세미나가 우리의 광장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의 광장을 반영하자 아닐까요? 우리의 광장을 반영해 그러한 신념을 기반으로 투표하자?

 

ㅎ) 심상정 발언의 아픈 부분을 건드리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ㄱ) 거대 양당을 찍지 말자는 것일까요?

 

ㅎ) (참여, 기권 등의) 투표 행동은 현행의 대의정치의 선거제도, 선거장치의 일부이되 개인이 국민의 자격으로 참여/기권하는 결정적인 일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선거제도는 대선의 경우 후보-선대위-당-당원; 제도언론, 비제도언론 등의 언론기관과 기자들; 여론조사기관들; 선거운동들; 선거관리위원회; 선거평론가들; 이제는 법원과 검찰, 경찰; 각 후보 지지자들과 국민 등으로 구성되는 복잡한 기계장치의 동작 한가운데에 마치 부품처럼 투표행동이 부착되어 돌아가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ㅂ) '소신투표'의 다른 표현인 것 같습니다. 문맥상 '미래'를 의미하는 것 같고요, '당신이 바라는 미래에 투표하시라' 이렇게 읽힙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가 "광장"으로 표현되는 게 좀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ㅈ) 우리나라가 규모 면에서 집단적으로 투표가 이뤄지는 것 같은데 애초에 기반이 다른 곳에서 출발하려 한 운동들은 각각의 개인적인 면으로, 침잠시키는 에너지들로 투표가 이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ㅎ) 투표와 개표 및 당선자 발표에 이르는 이 선거장치의 동작(function) 방식이 다중의 의지에 대한 재현/반영의 진실성을 규정하는데, 재현/반영의 측면에서는 일그러진 거울 혹은 환상등(phantasmagoria)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순수반영은 아닌 어떤 투영이 재현/반영/대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현재의 선거제도라고 생각합니다.

 

ㅂ) 네. 현 선거제도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광장"이라는 표현을 붙이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ㄴ) 왜요? 광장은 좀 의미를 어느 한쪽으로 제약하나요? 예를 들어 패거리 같은 거요?

 

ㅂ) 아무래도 '광장'은 직접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공간이라 생각되어서요.

 

ㅈ) 광장보다는 광야가 어울릴까요?

 

ㅂ) 일그러진 환영이 떠다니는 모습이니 (광장보다는) 막막한 느낌을 주는 광야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ㅎ) 그런 의미라면 (‘당신의 광장에 투표하라’라는 말이 ‘소신 투표하라’라는 말이라면) 하나 마나 한 말 아닌가요? 그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그러할 테니까요. 설령 한 개인이 민주당보다 정의당이나 기본소득당이 더 마음에 들지만, 국민의 힘의 집권을 저지하기 위해 민주당에 투표하더라도 그 역시 소신투표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요?

 

ㅂ)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위 필자는 '차악을 선택하는 투표'와 '소신 선택'을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견제를 목적으로 한 투표행위'는 '소신투표'로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번 선거 국면에서 이와 같은 논리가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ㄴ) 소신투표란 저자에게 자신이 속한 광장(집단)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미래를 위해 투표하자는 이야기인데 지적하신 대로 광장을 저마다의 광장으로 전제하고 글을 썼을 때 드러나는 저자의 다원주의적 입장은 직접민주주의를 포괄하지 못하는가 보다 합니다.

 

ㅎ) 그런데 불행하게도 현재의 선거제도, 특히 대선의 경우는 1) 각 개인의 (투표를 통해 표현된) "소신"을 측정하는 측면과 2) 누가 권력을 장악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대선은) 승.자.독.식의 구조로 되어 있어서 1)보다는 2)가 훨씬 중요한 의미를 갖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1)이 무의미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만 2)에 종속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총선과 지자체선거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다릅니다.

 

ㄱ) 소신과 미래와 광장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2번을 비중 있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요?

 

ㅈ) 사회를 끌어가는 기본적인 투표행위마저도 광야로 끌어내리면 더 나은 사회로 바뀔 수 있다는 소신일까요?

그래서 줄에 휘감기는 사람들만 속출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ㅎ) 현재의 선거제도 아래에서 민주당/국민의 힘 외의 정당 후보가 대권을 장악하는 이변이 벌어지리라고 보는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는 양당 외에 투표하자고 제안하는 "소신투표론"은 2)의 문제에서는 기권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실용주의투표론"(편의적 이름입니다)은 1)의 문제에서 기권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ㅂ) 저는 1)의 문제(소신)를 표현할 다른 방법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2)의 문제를 소홀히 하거나 기권하였을 때는 만회할 길이 불투명하다고 생각합니다.

 

ㄱ) 2)의 문제에서 두 양당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ㅎ) 권력의 성격 구성에서 국힘과 민주당이 보여줄 차이가 "크지 않다" 것은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민주당과 정의당의 차이는 정말로 "크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정의당과 기본소득당의 차이는 또 어떨까요? 이백윤 후보의 노동당은 또 이들 소수정당과 얼마나 다를 수 있을까요?

특정 정당이 선거를 통해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사회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정도는 "상대적인 차이", 즉 정도 차이를 결코 넘어설 수 없습니다.

시민사회-정당-국가로 조직된 근본 뼈대를 전혀 건드릴 수 없기 때문이고 운영방식만을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거를 통해 추구할 수 있는 노력은 작은 차이들을 놓고 다투는 것이지 근본적 차이를 놓고 다투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ㄱ) 소신투표, 특히 정의당을 지지하는 분들은 거대양당과 심상정 후보 사이에 결정적인 문턱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티비 토론회에서 중대재해처벌법이나 차별금지법 같은 이슈에서 권력과 자본 눈치 보는 느낌 없이 거침없이 발언하는 것은 심후보가 유일했습니다. 그런 점은 큰 차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ㅎ) 네 나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심상정은 소신을 말할 수 있었고 이재명은 소신보다 현실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당선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 소신을 말하고 당선 가능성을 놓고 현실을 재야 하는 사람은 소신 이상의 것을 고려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심과 이의 소신에 질적 차이가 전혀 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드러난 것보다 크지 않을 수 있다는 정도로 말하는 것입니다.)

 

ㄴ) 심상정 후보가 정권을 잡는다고 하더라도 애국보수를 구성하는 국민과 기득권층의 권리를 배제하는 것으로 보일만 한 일을 하기가 쉽지는 않을 듯합니다.

 

ㅎ) 권력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권력이 자본의 권력이라는 것을 훨씬 더 예민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본은 현행의 권력이 국민-다중의 권력인 것 같은 외양/관념을 부단히 유포-유지하면서 그것이 자본 자신의 권력으로 행사되도록 압력을 가합니다. 권력에 가까이 다가가면 그 압력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지요.

 

ㄴ) 말씀하신 대로 자본이 권력으로 행사되도록 가하는 압력으로 여력이 없게 될지도요. 선거에서 이긴 사람이 그 차이를 구별하려 들기는 어렵겠다 싶습니다.

 

ㄱ) 비판적 지지라는 표현이 불편하다는 분들도 많습니다. 비판할 부분이 너무 결정적이면 비판적 지지는 불가능하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래서 투표=지지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한 후보를 선택하는 것이 곧 그 후보에 대한 지지일까요?

 

ㅎ) 투표와 지지는 전혀 별개의 문제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지지는 다양한 후보들에게, 그리고 다양한 공약들에 대해 행사될 수 있습니다. 이백윤, 김재연, 오준호의 정책들에는 지지할 만한 것이 아주 많고 심상정의 정책들에도 지지할 만한 것이 많으며, 이재명의 정책 중에도 앞의 후보들의 정책들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지지할 만한 것이 많으며, 국힘의 윤의 정책들에도 지지할 만한 것이 여럿 있습니다. 그런데 투표는 단 한 후보에게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이 차이 때문에 "투표"를 통해서는 "지지"를 표현해낼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소신도 표현되지 않습니다.

 

ㄱ) 소신, 광장, 미래가 아니라 차악, 최선(예를 들어서 불꽃 박지현 님)을 말하면 배반을 하는 것처럼 비난하기도 합니다. 소신, 광장, 미래는 순수한데 최선을 말하면 불순한 것처럼 이요. 위에 말씀해주신 것처럼 모든 사람의 소신, 광장, 미래가 존중되어야 한다면 차악과 최선도 그 사람에게 소신이고 미래이고 광장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미래와 광장이 있을지 의문입니다.

 

ㅎ) "투표"는 신념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수(number)를 모아서 정치적 효과를 거두려는 전술적 행동으로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앞에서 말한 (복잡한 선거장치의) 엄청난 제약들에 연결=포위된 채로 말이지요.

 

ㅁ) 다중의 대의정치체제 내에서의 투표행위는, 승자독식구조 속에서의 최선의 선택은 결국 2)누가 권력을 장악하는가를 결정하는 선택, 즉 차선의 선택일 수밖에 없겠습니다.

 

ㅎ) 물론 대선이 아니라 총선/지자체 선거의 경우는 후보와 정당에 각 1표씩 한 개인이 두 표를 행사할 수 있게 되어 있으므로 위의 1)과 2)가 비대립적이게 즉 소신과 실리가 각각 표현될 여지가 조금 커집니다.

이러한 이것 아니면 저것 식의 갈등은 현재의 선거제도가 로또식 승자독식주의에 따라 조직되어 있어서 시민들에게 발생하는 어처구니없는 것입니다.

 

ㄱ) 광장이 계속되는 것이라면 누가 되든 운동은 계속될 것이고 그 관점에서 전술을 택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ㅎ) 이 갈등은 누구의 선택이 옳은 것인가를 놓고 결판을 벌임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중의 의지가 최대한 충실하게 재현될 수 있는 선거제도의 구축과 선거장치의 조직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ㅂ) 거대 양당체제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은데요, 그 해법도 정당정치의 테두리 내에서 사고되는 것 같습니다. 정권 획득이라는 중간과정(?) 없이 정책들이 그 자체로 서로 경쟁하는 정치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ㄴ) 내각제가 이를 보완하는 것이기나 한지 궁금합니다.

 

ㅎ) 현재의 정치개혁 대안으로 제안되는 다당제는 승자독식의 억압성을 완화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내각제는 그 장점만큼 다중의 정치적 개입 여지를 줄이는 역효과도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ㄱ) 다당제 실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ㅎ) 누가 권력을 장악하는가가 현행의 대선에서는 결정적으로 중요하지만, 선거장치들(정당, 신문, 방송, 정치평론, SNS, 이웃 등등)의 효과로 인해 양당은 완전히 동일하고 어떤 차이도 없으며 형제 범죄자들의 다툼이라고 보는 사람들에게 이른바 "소신투표"는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소신을 표현하는 것이나 어떤 당이 권력을 장악하느냐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중들 사이의 연합 조건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통령이나 정당이나 각료들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낮추고 다중 자신이 삶과 정치의 중심에 서서 스스로를 부단히 자기조직화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ㅁ) 어떤 선택이 다중이 더욱 광범위하고 강력하게 연합해 나갈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줄까요? 내일부터 부재자투표가 시작되니 기대가 됩니다.




🥁 
까판 정치인을 고발합니다.

by 현군


 윤석열 후보의 배우자 김건희 씨의 출입국 기록과 관련하여 이양수 국민의힘 선대본부 이양수 수석대변인이 논평 첫 부분에 이렇게 썼습니다.


 "최순실 은닉재산 300조 원의 허위사실 유포자이자인터폴에 적색 수배된 윤지오의 거짓말 사기극 설계자인 더불어민주당 안민석 의원의 아니면 말고 식의 거짓 폭로가 또 시작됐다."

📰 참고자료 

[매일경제] 안민석, 尹 선대본부 대변인 고소…"허위사실 유포해 명예 훼손"


이렇게 나라를 이끄시는 분이 논평이랍시고 국민 중 한 사람, 진실을 증언한 공익제보자 윤지오 님에게 '거짓말', '사기극' 프레임을 씌웠는데 문제는 그가 권력형 성범죄에 대해 증언 조서(문건)와 리스트 조서(리스트)를 직접 작성한 고 장자연 님의 증언을 이어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해당 논평 첫 부분은 증언자들에 대한 폭력 그 자체입니다. 

하여 이런 증언혐오가 더 이상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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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통진실 찾기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도둑이야!』 세미나를 진행합니다. 
이 책은 “국가도 아니고 시장도 아닌” 공통장의 역사는 인류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미래의 “공통장”을 만들어가기 위해 그 역사에서 배울 것이 아주 많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공통장의 역사를 통해 공통진실을 찾아가는 시간, 매월 2, 4주 토요일 저녁 7시 30분 실연대자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도둑이야!』

 네 번째 후기  
🦆 🐓 🦉 🐧

by 박서연


외롭지 않은 공통의 존재가 되기

 


 개릿 하딘은 공유지의 “합리적인 존재, 목동”을 강조한다. 합리적인 목동은 무리에 가축 한 마리를 추가하는 것이 현명한 과정이라고 결론짓는데 하딘은 바로 거기에서 공유지의 비극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즉 “공유지의 자유를 믿는 사회에서 그들 각자는 최대한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며 (자신의 가축 한 마리를 더 추가하려고 하며), 공유지에서의 자유는 모두를 파국으로 몰고 간다.”고 말한다.


 반대로 라인보우는 공유지는 공통인들이 선출한 관리인들이 공통을 위하여 관리하고 있었고 여기에는 일정한 룰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룰에 어긋나는 사람들에게는 “벌금을 물렸”고, 이때 공통은 “모두 함께” 관리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풀들이 자라는 시기에는 양을 방목할 수 없었고, 토탄 채굴 등은 약속한 곳에서만 할 수 있었다. 또한 메이비가 말하는 공통권리는 (202쪽) “목초지, 에스토버스, 돼지 방목권, 토탄채굴권의 권리” 였는데 이는 오히려 과소비를 방지했고, 복잡성, 독창성, 절약을 보상하기 위한 규칙과 통제에 부합했다. 이처럼 다양한 약속을 통해 공통장은 유지되고 확보될 수 있었다. 공통장은 경쟁과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권리를 위한 약속과 규칙 위에서 작동하였다. 오히려 공통의 권리를 없앤 것은 18세기 후반 빈곤 위기의 원인이 되었다.(193쪽) 그렇다면 우리는 하딘이 말한 합리적인 목동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 필요하다.


 하딘은 공통장을 경쟁의 장소로 보며 이는 결국에 고갈되어 사라질 자원으로 본다. 하지만 라인보우는 공통장은 사회적 관계인 동시에 물질적 사물이며, 이것은 상품도 아니고 자원이기만 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공통장은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사용하는 개방된 땅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평민, 열악한 조건에서 살아가는 사람(188쪽)을 가리킬 수도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인상 깊은 지점은 공통장을 “평민, 열악한 조건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말하는 지점인데 이때 공통장은 단순한 장소, 배경을 넘어선다. 그리고 라인보우는 공통장은 실제적 풍경에 속한다고 서술하는데(188쪽) 이때 풍경은 다양한 존재들로 가득 차 있는 장면이다. 나무, 풀, 꽃, 사람, 벌레, 동물들. 그리고 바람, 빛, 공기 중의 물방울이 풍경을 이루고 있다. 물론 이들이 공통장을 이루는 과정은 평화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먹고 먹히는 관계, 개체의 멸종과 탄생의 과정들은 모두가 협력해서 살고 있다는 말로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많다. 다만 여기에서 중요한 건 이때 “장(場)”은 존재하는 것들의 혼합의 찰나라는 것이다. 라인보우는 하딘이 말하는 합리적인 목동은 실은 이기적이거나 외로운 목동이라고 되짚는다.(196쪽) 또한 인클로저는 올리버 골드스미스와 같은 작가들에게 발견되는 사회적 붕괴와 우울증에 대한 감각(193쪽)이라고 말한다. 즉 공통장이기 때문에 비극이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합리성의 탈을 쓴 인클로저로 인해 외로움과 우울은, 그리고 비극은 발생한다.


 공통장을 이루는 평민과 다양한 존재들은 수군거리고, 투덜거리고, 헛소문을 퍼뜨린다(202쪽). 수군거리는 것은 다중의 목소리이고, 소문은 입에서 귀로, 귀에서 입으로의 발걸음이다. 이것은 혼자서 할 수 없다. 공통이 되는 첫 번째 감각은 고립을 넘어서 다른 존재를 인식하는 행위에서 출발한다. 이때 공통되기는 물론 이로움을 추구하는 행위이다. 다만 공통을 사회적 관계라는 실의 얽힘으로 보며 확장해갈 때 이로움을 건져내는 뜰채는 넓어진다. 넓어진 교차점의 망으로 우리는 이로움을 더욱 많이, 다양하게 건져낼 수 있다. 교차되는 지점에서 우리는 더 이상 외로운 목동이 아니라, 공통장을 이루는 무수한 존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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