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SDF 다이어리> 독자 여러분.
 
아직 여름의 무더위가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지만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그 속으로 바람을 거스르며 걷고 있는 수행자.
 
왠지 떨어지는 나뭇잎과 시원한 바람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으신가요?

이 그림은 어떤가요? 깊은 밤 다듬잇돌 두드리는 방망이 소리가 귓가에 울리시나요?
모두 목판 위에 그림을 새기는 이철수 화가의 그림들입니다.

이철수 화가의 그림에 대해 어떤 이는 "기막히게 청각을 시각화해내는 표현들그동안 지나쳤던 것들에 대한 세심한 시선들이 단박에 나를 사로잡았다."고 평가합니다.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셨던 법정스님도 이철수 화가의 작품을 많이 아꼈습니다.
 
"단순하고 질박한 그의 판화가 곁들인 간결한 화제는 그림과 어울려 선미(禪美)를 풍겨주고 있다. 그의 그림에는 시()가 깃들어 있다. 이런 질박하고도 구수한 문장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한 목소리다."
 
화가 이철수의 삶은 그의 목판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습니다. 혼란스러웠던 1980년대 그의 판화는 울분과 함성과 저항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청년기를 지나면서 그의 작품은 더 본질적이고 깊숙한 내면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과 위로를 건네는 대중적인 작품을 지향하게 됩니다. 살면서 마주치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안에서 귀한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들리지 않는 자연의 소리에 주목하는 그의 작품 속엔 그래서 따뜻한 통찰이 스며있습니다.  

그는 1985년 홀연 서울을 떠납니다. 충청북도 제천 평동마을 천등산 아래에 터를 잡고 35년 넘게 손수 농사를 짓고 흙을 묻혀 가며 자연의 순리에 따르고 있습니다. 그의 그림과 글은 이런 흙과 자연을 통해 빚어진 산물이기도 합니다. 사연이 많은 목판화가. 햇살 좋은 날 제천의 작업실에서 한창 작업 중인 그를 만났습니다. (올해로 데뷔 40년을 맞은 이철수 화백은 현재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이기도 합니다.)

Q. 어떻게 지내셨나요. 요즘은 어떤 작품에 몰두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10년 전에 30년 기념 전시하고 난 뒤로는 제가 평소에 꿈꾸던 삶의 모습에 조금 더 가까워져서 살아요. 자급자족을 꿈꾸는 삶을 살고 있는 건데 농사 열심히 짓고 틈틈이 판화 새기고 전시 거의 안 하고요. 요즘 같이 더울 때는 새벽에 일어나서 해 뜰 때까지 농사일 열심히 하고 낮 시간에는 더우니까 이 안에서 판화 새기는 일을 하고 또 저녁에 해 지려하면 나가서 일하고 2천 평 안 되는 농사를 하고 있어요.

그림은 주로 연작 작업 중심으로만 하고 올해는 '무문관(無門關)'이라고 하는 선불교 공안집을 연작하고 있어요. 쉽게 설명하면 선문답을 주고받는 책인데 '무문관'의 삽화를 그리는 작업이 아니고 제가 '무문관' 문답에 끼어들어서 제 이야기를 함께하는 그런 판화를 만들고 있어요. 48개의 에피소드가 있는 책인데 앞뒤 시작과 마무리하는 것까지 덧붙여서 50개의 판화 연작으로 작업하고 있고요.
Q. 사실 그동안 작품 세계를 보면 상당히 많은 변화들이 있었는데요. 80년대 민중 판화가 이철수로 기억하는 분들도 많을 것 같고요. 한 편으로는 그런 과거를 모르는 독자 분들도 많을 것 같아요.
지금도 자꾸 옛날얘기 묻는 분들이 많아요. 왜 데모할 때 쓰던 거친 이미지들에서 명상적이거나 성찰적인 그림으로 바뀌었는지를 묻는 분들 여전히 많으시고요. 사실 시위 현장에서 쓰이던 그림 그리던 시기는 한 10년 정도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게 강렬했던가 봐요. 그 시기는 그런 거친 이미지들이 필요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는데, 민주주의가 실종되어있던 시기여서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함께 싸우자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 시대였으니까 그 그림이 있을 수 있었죠. 저는 젊은 사람이었고.

그런데 이후로는 아주 성찰적인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됐는데 그것도 그 이유가 있었던 거예요. 우리가 이후에 맞닥뜨린 시기는 시장 경제가 우리를 주도하고 지배하며 자기 확장을 거듭하던 시대였잖아요. 그 속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현실은 예전처럼 눈에 보이는 폭력이 문제가 아니라 돈 중심의 사회, 있고 없는 사람들의 차이가 눈에 띄는 시대, 그리고 물질 때문에 우리들 스스로의 정신세계가 피폐해지거나 소외를 경험하게 되는 그런 시대로 변했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그런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게 됐던 거죠. 성찰적이거나 혹은 자신을 돌아보는 일. 저처럼 사람에게 관심이 있었던 작가로서는 결국 마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쪽으로 옮겨 앉을 수밖에 없었어요.

Q. 어떻게 보면 현실의 모순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작품들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그림으로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한 건데 특별한 변화의 계기가 있었나요?   
초기 그림의 감정이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어 정직하지 못하다는 생각도 들고 내면에 있던 감정이 현실에 대한 분노를 과장하도록 만든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곤 했어요. 그러던 중 석 달 가까이 유럽에서 전시회를 한 적이 있었는데 독일 전시회 때 어떤 사람이 제 청년기의 작품을 보고 전체주의적인 냄새가 난다고 한마디 했어요. 그 이야기 한마디가 가슴에 박혀 그 질문에서 놓여날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한 1년 반을 아무 작품도 못하고 텃밭 농사만 하면서 계속 그 이야기를 화두처럼 붙잡고 있었죠.
 
그러다 농사일로 해가 저물던 어느 날 농기구들을 수레에 싣고 그날 일을 마무리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내 마음속에 어떤 말이 하나 이렇게 왔어요.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다"라는 이야기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얼른 집에 들어가서 쉬어야 되겠다는 생각밖에 없는 아주 지친 상태였는데 그런 이야기가 들렸어요. 그 경험은 제가 판화로 새겨놓은 게 있어요.
 
청년기 이후 오랫동안 바랐던 것들을 어떤 것 하나도 누리거나 얻을 수 없어 지니고 있던 좌절이나 열등감 같은 것들을 그 순간 다 놓아버릴 수 있었던 경험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당시의 내 표현으로는 '내 정신세계의 누추함에서 벗어났다고 이야기하게 됐는데 정신적인 가난을 벗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참 좋았어요. 이성적인 설명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은데 뭔가 조금 더 자유로워진 것 같고, 무겁게 늘 지고 다니던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놓여났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순간이었던 거죠. 그래서 그 이후로 마음공부가 늘 자연스러워진 사람처럼 됐어요. 이후의 내 그림 세계가 거기에서 멀리 가 있지 않고 계속됐던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Q. 그림에 대한 모티브는 어디서 나오나요
좀 전에 얘기했던 경험 이후로 만나게 되는 모든 것들로부터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어요. 뭔가 계속 나한테 얘기를 걸어와서 어떤 때는 외출하는 게 조금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어요. 하도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될 것 같기 때문에. 새로운 자극을 받으면 끝없이 뭔가가 막 환기가 되니까 그래서 그때는 그림 메모가 막 쏟아지듯이 있었어요. 자칫 잘못하면 좀 신비적인 것으로 오해될 것 같아서 그런데 좀 과하게 그 시기에는 각성 상태에 있었던 것 같아요. 과민해진 상태가 계속됐던 것 같아요. 그림 그릴 거리가 너무 많아져서 살았던 시기가 있었어요. 도저히 메모를 그림으로 다 새길 수 없을 정도로.
 
그러니까 관점 같은 게 생겼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때는 제 그림을 좋아한다는 분들한테 자주 권했어요. 당신 주변에서 내 그림이 보여주는 것 같이 뭔가 자기 생각을 좀 거기에서 좀 찾아보시라고. 그리고 그걸 메모하듯이 적어보시라고. 나는 1인분밖에 보여드릴 수 없다. 그런데 당신이 나 같은 태도로 사물과 만나거나 사람과 만나거나 일상과 만나면서 길어 올리게 될 지혜가 있다면 우리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지혜가 엄청 많아지고 풍부해질 테니까 제발 당신 주변에서 그걸 길어 올리라고. 당신이 내 그림에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은 똑같은 생각을 당신 주변에서도 길어 올릴 능력이 있다는 뜻일 거다

Q. 평상시 자본주의 사회와 현대사회의 소외된 인간에 대한 문제의식이 남다르다.
자본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을 이렇게 비인간화하는 어떤 힘이로구나. 가난한 사람, 힘없는 존재, 작은 것들, 우리 눈에 쉽게 보이지 않는 것, 숨겨진 듯이 보여 지는 것 뭐 이런 것들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거기에 좀 더 눈길을 주게 되더라고요. 즉 세상에 모든 소외된 것들에 대한 관심인데 그 소외가 남의 일이냐고요.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같이 살아가는 동시대 모든 사람들의 삶이 다 그렇죠. 내 삶, 남의 삶 가릴 것 없이 모두 연민의 눈으로 살펴봐야 할 불쌍한 존재들이 되어있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우리를 불쌍한 존재로 만들어 놓고 있는 힘이 어떤 것인지, 그것에 대해 눈을 부릅뜨고 봐야 할 필요도 있고. 그래서 사회를 살피는 눈이 한 개인의 눈이 되기보다는 전체 사회의 눈이 되도록 애써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제 그림이 좀 더 대중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80년대 반성의 핵심 중의 하나였어요.

Q. 아픔과 상처 많은 현대인들에게 위로가 되고 작게나마 힘이 되는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신념으로 활동해 오셨잖아요
정말 열심히 했어요. 농사짓고 사는 주변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삶의 지혜도 찾고 싶었고, 거기에서 온통 자기 긍정으로 차 있는 삼라만상들을 보면서 '사람만 예외구나.'라는 생각을 할 만큼 나는 이 자리가 좋아요 지금도. 요즘 같은 폭염에, 가뭄에 시들어 죽는 생명들도 있어요. 그런데 죽기까지 열심히 살아요. 생명이라고 하는 게 얼마나 놀라운 건지 몰라요.
 
그래서 생명의 그 내재율에 관해서 언제나 만날 때마다 경이로움을 느끼게 되고 내가 여기에서 이렇게 살게 된 걸 축복이라고 생각할 때가 정말 많았어요. 지금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생각하고 살고 있고. 그래서 제가 텃밭 농사도 많이 권하고, 도시에 주말농장도 하는 것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시라고 권하고 정 어려우면 화분 농사라도 해보라고 권할 만큼 이런 초록 생명들하고 관계하는 일은 참 행복한 일이에요.

이 속에서 얻게 되는 지혜가 너무 많거든요. 그냥 지식으로 이성으로도 얻는 것이 있고 온몸으로 느끼는 기쁨들도 많지만 자연의 놀라운 점이 뭔지 아세요. 자연은 잘난 놈인지, 세상에 이름이 좀 알려져서 허명이라도 좀 있는 놈인지 이런 것에 배려하는 생각이 없어요. 무위자연이라고 하는 것은 만물을 평등하게 대하거든요. 밭에 제가 등장하면 아마 짐승 하나가 옆에 왔다고 생각할 거예요, 거기 무슨 차별이 있겠어요. 잘난 아무개, 잘난 이철수 이런 거 전혀 없거든요.
 
그래서 그 자리가 늘 좋은 자리 같았어요. 훨씬 편하고 자유로워지고 인정을 받아야 되겠다는 욕심도 낼 수가 없죠. 그래서 그런 자리에 늘 들어가서 설 수 있었기 때문에 제가 덜 나빠졌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쨌든 작은 지혜라도 거기에서 발견하고 그걸 그림으로 그리는 일이 저한테도 행복한 일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 해준 건 아마 공감한다는 뜻이었을 테니까 그것도 좋은 관계라고 생각했어요

Q. 그런데 왕성한 활동이 언제부터인가 좀 뜸해졌다는 얘기도 들으셨을 것 같은데요.
제가 60년 넘게 살아온 시대를 돌아보면 날이 갈수록 물질과 돈과 시장의 원리가 압도적으로 힘을 쓰게 된 것 같아요. 내가 살아오는 동안에는 한 번도 위축되지 않고 계속해서 힘이 커져요. 한동안은 제가 건져 올린 작은 아포리즘 같은 것들도 역할을 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훨씬 더 절망적이 됐어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 시대의 시장 속에서 상품이 되어 상처받고 있어요. 성공한 사람도 똑같이 상처받아요. 그래서 서로 상처받은 짐승처럼 변해있어요, 우리 시대에 만나게 되는 많은 사람들이.
 
작은 기회라도 얻고 거기에서 안정적이 된 사람들은 거기 집착하게 돼요. 반대로 거기에서 탈락하게 되거나 낙오하게 될 것에 관한 두려움으로 남의 성공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때로는 질시하기도 하면서 행복해지지 않는 거예요. 남의 성공이나 성취를 함께 기뻐해 줄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있고 그래서 내면 풍경에서는 성공한 친구가 추락하기를 바라기도 하는 것 같아요. 처참한 풍경이죠.
그런데 실제로 그런 내면들을 가지고 살아요. 내가 내 그림에 절망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나는 그렇게 솔직한 이야기를 그림으로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현실은 그렇거든요. 내가 점점 밭에 나가 있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하고, 책상에 앉아있는 일이 불편해진 것도 아마 그것 때문일 거예요.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들고.
Q. '아 내가 하는 작품들이 이제 위로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구나' 이런 걸 느끼신 건가요?
음 말하자면 좀 더 단위가 높은 약이 필요해진 시대인 것 같아요. 내가 그려놓은 그림들은 말하자면, 너무 약한 처방들인 거죠. 그래서 우리가 값싼 카운셀링을 통해서 극복할 수 없는 삶의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조금 더 결정적이고, 조금 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 것 같이 느껴져요. 지금도 뭔가 깊은 지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고 욕망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고 가정하면, ‘욕망을 이성적으로 내려놔야 할 때야.’라고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내가 그림 그리는 일에 선뜻 손이 잘 안 가게 된 이유도 나의 그림이 '값싼 위로'가 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에요. 제 그림을 스스로 보면서 아무 얘기나 못 하겠어요. 위로될 것 같지 않은 거예요. '당신은 위로를 버릇처럼 만들어내는 사람이구나.' 라고 누군가가 힐문을 할 것 같아 조금 조심스러워졌어요. 그래서 그림 그리는 일이 예전에는 신이 났는데, 요즘은 그림 그리면서 나한테서도 쉽게 기쁨이 생기지 않고. 그래서 그냥 쉽게는 안 하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 시대에 혹은 우리 개인에게 가장 절박한 문제를 화두처럼 좀 붙들고 사는 일부터 시작해보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죠. 에고(ego)에 관한 그림 하나 그려서 세상과 나누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에고(ego)'라고 하는 말을 계속 붙잡고 있어요. 에고(ego), 욕망 이런 것들이 지금 제가 붙잡고 있는 화두에요.

Q. 그래서 가벼운 위로보다는 내면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쪽으로 시선이 향해있는 거군요.
지금 우리 시대 제일 큰 문제는 '에고(ego)'의 문제인 것 같기도 해요. 진짜 나와 만나는 일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도 에고인 것 같고요. 참된 나도 아니면서 에고라고 하는 것은 내 안에서 웃자라 자존감을 지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고 쓸데없는 자존심을 지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에고가 이물질처럼 들어와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나하고 똑같이 생긴 물건 하나가 내 뒤에 업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내 머리 위에 짐처럼 올라 앉아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게 수시로 출몰해 내 말을 안 들어요. 틀림없이 내 안에 있고 나하고 아주 깊이 밀착되어있는데 말을 안 들어요. 심지어는 존재를 느끼겠는데 그 존재가 나를 이겨 먹는 대목이 많아요. 그래서 에고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그려봐야 되겠다 싶은데, 요즘은 하나 붙잡으면 고민이 그렇게 오래 가더라고요. 그래서 정작 작품은 못 만들고 몇 년이 지나가고 있는데 아직 하나도 못 만들고 있네요. 요즘은 소소한 이야기들, 아기자기하게 하는 것에 별로 마음이 잘 안 가요.

40년간 새겨온 목판화가 몇 개나 되는지 아느냐는 질문에 이철수 화백은 '허허' 웃으며 밥 먹은 시간보다 칼로 나무를 새겨온 시간이 더 많았고 칼로 나무를 새기는 일이 밥 먹는 것보다 더 편하다고 했습니다. 수많은 작품들 가운데 애착이 가는 보물 같은 작품이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머루 나무가 뜰에 있는데 아버지가 단독주택에 사실 때 가지고 계시던 걸 옮겨 와서 계속 가꾸고 있어요. 어느 해 송이가 부실해 그걸 이렇게 보면서 나도 모르게 '겨우 요거 달렸네.'라고 생각하면서 머루를 따려고 가까이 갔는데 갑자기 머루가 나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최선이었어요.'라고 하는 소리를요. 아무도 쳐다보는 사람 없는데 머루 나무, 머루 송이 앞에 서서 스스로 막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더라고요. 그날 그림을 그렸어요. '겨우 요것 달았어?' 그랬는데 '최선이었어요' 라고 머루가 대답하고 '몰랐어, 미안해' 이렇게 이제 제가 사과하는 그림을 그렸죠.
 
그런데 누가 그러더라고요. 입시 철만 되면 대한민국 집집마다 그 그림을 하나씩 복사해서 나눠주고 싶다고. 꼴찌 하는 아이라도 최선을 다 했을 텐데. 야단을 맞아야 하거나 자신의 최선에 관해서 의심을 받아야 하는, 하하. 많은 가련한 영혼들을 위해서 하나씩 나누어주고 싶다고 한 사람이 있었는데, 저도 그렇게 나누어주고 싶을 때가 있어요. 이제 그런 그림을 보면 '아이고 그때 머루하고 그 이야기를 나눈 것이 참 다행이다' 싶은 생각이 들죠."

이철수 화백은 본인을 성정이 좀 날카로운 사람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야수적인 동물성을 지닌 사람이기 보다는 식물적인 감수성을 지닌 것 같다고 말합니다.
 
스스로 능동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수동성은 있지만 씨앗을 바람에 실어 보내고 향기를 만들어서 뭔가 매개가 될 작은 생명들을 불러오기도 하는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식물. 그는 이런 식물적인 지혜가 당장 눈앞에 보이는 효용은 떨어지는 듯 보여도 아주 장구한 세월 한 자리에 붙박이로 존재하는 마을 앞 거대한 정자나무처럼 품격 있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이 느껴져 닮고 싶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그림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에게 위로가 될 것 같지 않아 아무 얘기나 하지 못하겠고, 선뜻 손이 잘 안 가게 된다는 진정성 어린 고백을 들으면서 이철수라는 묵직하고 든든한 버팀목이 동시대를 함께 살고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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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애 기자 다양한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마음을 모으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는 없다 믿으며 SBS D포럼을 총괄 기획해 오고 있습니다. 사회부, 국제부, 경제부, 시사고발프로그램 ‘뉴스추적’ 등을 거쳤으며 2005년부터 ‘미래부’에서 기술과 미디어의 변화, 그리고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어떻게 다르게 같이 살아가야 할 지 고민해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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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11 │ 다 알고 있다는 착각 [E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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