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란 영향력을 얻는 수단

💬  님, 한편을 같이 읽어요! 오늘은 버지니아 울프의 저 유명한 「자기만의 방」을 전해 드립니다. 1928년, 여성과 픽션에 대한 강연을 의뢰받은 울프는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돈 그리고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의 강연문을 발표합니다. 「자기만의 방」의 탄생이었습니다.

기혼 여성의 재산 소유가 가능해진 지 불과 48년, 투표가 가능해진 지 고작 9년이 지난 당시 여성의 일이란 주로 집안일과 아이 기르기였습니다. 여성이 영향력을 발휘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던 시대에, 바로 그 이유로 여성은 글을 써야 한다고 버지니아 울프는 주장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가상의 여동생인 주디스 셰익스피어의 이야기를 통해서요. 
셰익스피어에게 놀랄 만한 재능을 가진 누이, 이를테면 주디스라 불리는 누이가 있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를 상상해 보도록 하지요. 

셰익스피어 자신은 문법학교에 다녔음이 거의 확실합니다. 그의 어머니가 유산 상속인이었으니까요. 그곳에서 그는 라틴어와 문법 원칙, 논리학을 배웠을 겁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토끼를 밀렵하고 사슴을 사냥한 거친 소년이었으며, 이웃에 사는 여자와 지나치게 이른 나이에 결혼해야 했고, 그 여자는 적절한 시기보다 훨씬 이르게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 엉뚱한 짓으로 해서 그는 출세의 길을 찾아 런던으로 갔지요. 그는 연극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무대 출입구에서 말을 돌보는 시종으로 연극 생활을 시작했지요. 곧 그는 극장에서 일거리를 얻게 되었고 성공적인 배우가 되었으며 우주의 중심에서 살았습니다. 모든 사람을 만나고 모든 사람을 알게 되었으며 배우로서의 기술을 익히고 길거리에서 재치를 발휘하고 심지어 여왕의 궁전에 접근하기도 했지요. 

그동안 특별한 재능을 가진 그의 누이는 집에 남아 있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녀도 셰익스피어만큼이나 모험심이 강하고 상상력이 풍부하며 세계를 알고 싶은 열망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학교에 다니지 못했지요. 그녀에게는 호라티우스와 베르길리우스를 읽을 기회는커녕 문법과 논리학을 접할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그녀는 때때로 책을, 아마도 오빠의 책이었겠지만, 집어 들고 몇 쪽을 읽었지요. 그러면 그녀의 부모님이 들어와서 양말을 꿰매거나 국을 끓이는 데 신경을 쓰라고, 책이나 논문 따위를 붙들고 멍하니 시간을 보내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호되게 나무랐지만 그것은 선의에서 나온 꾸지람이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자들의 삶의 조건이 어떠한지를 알고 있는 현실적인 사람들이었으며, 딸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그녀는 아버지에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존재였을 겁니다. 

그녀는 아마 사과 창고에서 은밀히 몇 쪽을 휘갈겨 썼겠지요. 하지만 조심스럽게 숨기거나 불에 태웠지요. 그녀는 십 대를 벗어나기도 전에 이웃에 사는 양털 중개상의 아들과 약혼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그 결혼이 혐오스럽다고 소리쳤지요. 그 때문에 그녀는 아버지에게 심하게 맞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딸을 더 이상 꾸짖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자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라고, 결혼 문제로 더 이상 망신시키지 말라고 사정했습니다. 그녀에게 목걸이와 멋진 페티코트를 주겠다고 말했지요. 그의 눈에는 눈물이 어렸습니다. 그녀가 어떻게 아버지의 말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녀가 그를 비탄에 잠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녀 자신의 강렬한 재능이 그녀를 몰아세웠습니다. 그녀는 조그마한 짐을 꾸려 어느 여름날 밤 밧줄을 타고 내려와 런던으로 가는 길에 섰습니다. 그녀는 열일곱 살도 채 되지 않았지요. 산울타리에서 노래하는 새들도 그녀보다 더 음악적일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녀는 오빠와 똑같은 재능 즉 단어의 음조에 대한 예리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지요. 셰익스피어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연극에 소질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무대 출입구에 서서 연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지요. 남자들은 그녀의 면전에서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감독(뚱뚱하고 입이 가벼운 사람이었는데)은 너털웃음을 웃었습니다. 그리고 여자가 연기를 하는 것은 푸들이 춤추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내뱉고는 어떤 여자도 배우가 될 수 없다고 단언했지요. 그가 넌지시 암시했는데, 여러분은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그녀의 재능은 훈련을 받을 수 없었지요. 그녀가 선술집에서 저녁을 먹거나 한밤중에 길거리를 배회할 수 있었을까요? 하지만 그녀의 재능은 픽션을 추구했고, 남자들, 여자들의 삶과 그들의 생활 방식을 풍부하게 보고 관찰하기를 갈망했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아주 젊었고 기묘할 정도로 시인 셰익스피어와 얼굴이 닮았으며 똑같은 회색 눈과 둥근 이마를 가졌기에 배우 감독인 닉 그린이 그녀를 동정했습니다. 그녀는 그 신사의 아이를 임신했음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시인의 마음이 여자의 몸속에 갇혀서 엉망으로 뒤엉켜 있을 때 그것이 분출할 열기와 격렬함을 누가 측정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겨울밤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지금은 엘리펀트 앤 캐슬 바깥쪽의 버스 정류장 근처 교차로 어딘가에 묻혀 있습니다.

만일 셰익스피어 시대에 한 여성이 셰익스피어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이야기가 아마 이렇게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젊은 여성들이여, 결론이 나오고 있으니 집중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겠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여러분은 수치스러울 정도로 무지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종류이건 중요한 것을 발견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제국을 뒤흔들거나 군대를 전투로 이끈 적도 없습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여러분이 쓴 것이 아니며, 여러분은 야만인들에게 문명의 축복을 전달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무어라고 변명할 겁니까? 여러분은 교역과 기업 또는 사랑놀이에 바쁘게 몰두하고 있는 흑인, 백인, 커피색 피부의 주민들로 꽉 차 있는 지구의 거리와 광장과 숲을 가리키면서 우리는 다른 일을 책임지고 있었다고 말하겠지요. 우리가 일하지 않았더라면 대양을 횡단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이 비옥한 땅들은 황무지였을 거라고요. 통계에 따르면 현재 존재하는 십육억 이천삼백만의 인간들을 우리가 낳았고 어쩌면 예닐곱 살까지 기르고 씻기며 가르쳤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 일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말에는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여러분에게 상기시켜 드릴 것입니다. 1866년 이래 영국에는 여성을 위한 대학이 적어도 두 곳 존재해 왔으며, 1880년 이후에는 기혼 여성이 자신의 재산을 소유하도록 법적으로 허용되었고, 1919년에 여성은 투표권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또한 대부분의 전문직이 여러분에게 개방된 지 대략 십 년 정도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드릴까요?
 
여러분이 이 막대한 특권들과 그것들을 누릴 수 있었던 기간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 이 순간에도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연간 500파운드 이상을 벌 수 있는 여성이 약 이만여 명 있다는 사실을 숙고해 본다면, 기회가 부족하고 훈련이나 격려를 받지 못했으며 여유와 돈이 없다는 변명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에 동의할 겁니다. 게다가 경제학자들은 시턴 부인이 아이를 너무 많이 낳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여러분도 계속 아이를 낳아야겠지요. 하지만 그들이 말하기로는 열이나 열두 명이 아니라 둘이나 셋이어야 한다는군요. 그리하여 여러분의 손에 남게 된 시간과 여러분의 두뇌에 쌓인 학식으로 (내가 느끼기로는, 여러분은 다른 종류의 지식은 충분히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탈교육화되기 위해서 대학에 보내집니다.) 분명 여러분은 매우 길고 무척 고되며 대단히 미천한 경력의 또 다른 단계에 착수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영향력을 가져야 할지를 제시해 주려고 수천 개의 펜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나의 제안은 약간 환상적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픽션의 형식으로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더욱 좋겠지요. 

이 강연의 중간에서 셰익스피어에게 누이가 있었다고 여러분에게 말했지요. 그러나 시드니 리 경의 시인전에서 그녀를 찾지 마십시오. 그녀는 젊어서 죽었고, 슬프게도 글 한 줄 쓰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지금 엘리펀트 앤 캐슬 맞은편 버스가 정류하는 곳에 묻혀 있지요. 

이제 나의 신념은 글 한 줄 쓰지 못한 채 교차로에 묻힌 이 시인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여러분 속에 그리고 내 속에, 또 오늘 밤 설거지하고 아이들을 재우느라 이곳에 오지 못한 많은 여성들 속에 살아 있습니다. 그녀는 살아 있지요. 위대한 시인은 죽지 않으니까요. 그들은 계속되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우리 속으로 걸어 들어와 육체를 갖게 될 기회를 필요로 할 뿐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힘으로 그녀에게 이런 기회를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백 년 정도 살게 되고 (우리가 개인으로 살아가는 각자의 짧은 인생이 아니라 진정한 삶이라 말할 수 있는 공동의 생활을 언급하는 겁니다.) 각자가 연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을 가진다면,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와 자유의 습성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가 공동의 거실에서 조금 탈출하여 인간을 서로에 대한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리얼리티와 관련하여 본다면, 그리고 하늘이건 나무이건 그 밖의 무엇이건 간에 사물을 그 자체로 보게 된다면, 아무도 시야를 가로막아서는 안 되므로 밀턴의 악귀를 넘어서서 볼 수 있다면, 매달릴 팔이 없으므로 홀로 나아가야 하고 남자와 여자의 세계만이 아니라 리얼리티의 세계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그것이 사실이므로)을 직시한다면, 그때에 그 기회가 도래하고 셰익스피어의 누이였던 그 죽은 시인이 종종 스스로 내던졌던 육체를 걸칠 것입니다. 

그녀의 오빠가 그러했듯이, 그녀는 선구자들이었던 무명 시인들의 삶에서 자기 생명을 이끌어 내며 태어날 것입니다. 그러한 준비 작업 없이, 우리 편에서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그녀가 다시 태어날 때 그녀가 살아갈 수 있고 자신의 시를 쓸 수 있다고 느끼게끔 만들겠다는 결단 없이, 그녀가 출현할 것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그녀를 위해 일한다면 그녀가 출현하리라는 것과, 비록 가난한 무명인의 처지에서라도 그것을 위해 일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라고 단언합니다.
 
━ 버지니아 울프, 이미애 옮김, 『자기만의 방』, 72~172쪽에서

💬  버지니아 울프에게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이름 없이 사라졌던 수많은 재능 있는 여성들을 살아 있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여성이라는 이유로 누군가의 가능성을 닫아 버림으로써 빈곤해졌던 문학과, 세상을 위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왜 글을 써야 하는지, 그 글들이 왜 더 많은 영향력을 가져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며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한 자기만의 방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1882년 런던에서 태어나 당대 최고 수준의 지적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비평가이자 사상가였던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의 서재에서 책을 읽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오빠 토비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한 후 리턴 스트레이치, 레너드 울프, 클라이브 벨, 덩컨 그랜트, 존 메이너드 케인스 등과 교류하며 ‘블룸즈버리 그룹’을 결성하기도 했다. 평생에 걸쳐 수차례 정신 질환을 앓았으며 1907년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리먼트》에 서평을 싣기 시작하면서 『댈러웨이 부인』, 『등대로』, 『파도』 등 20세기 수작으로 꼽히는 소설들과 『일반 독자』 같은 뛰어난 문예 평론, 서평 등을 발표하여 영국 모더니즘의 대표 작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소설가로서 울프는 내면 의식의 흐름을 정교하고 섬세한 필치로 그려 내면서 현대 사회의 불확실한 삶과 인간관계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1970년대 이후 「자기만의 방」과 「3기니」가 페미니즘 비평의 고전으로 재평가되면서 울프의 저작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졌고, 「자기만의 방」이 피력한 여성의 물적, 정신적 독립의 필요성과 고유한 경험의 가치는 우리 시대의 인식과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평화주의자로서 전쟁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쳐 왔던 울프는 1941년 독일의 영국 침공이 예상되는 가운데 정신 질환의 재발을 우려하여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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