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마주하는시간 #라이너쿤체

[주말에 뭐 읽지]  2021-03-25 #49

책, 책방, 사람 이야기를 전해 드립니다
주말의 책꽂이

photo by pixabay
   
 영혼이 깜빡일 때 시를 읽는다
라이너 쿤체 지음, 전영애 외 옮김
봄날의책 펴냄  

남에게 그림자만 드리우지 않아도(‘은엉겅퀴’/ 〈시〉, 2005, 라이너 쿤체) 행복할 내 깜냥에 6년이 넘도록 독립 다큐멘터리 한 편을 만들고 지키는 일은 곤경 대잔치였다. 그 곤경들 중 으뜸이라면 많은 글을 쥐어짜내야 했던 일을 꼽겠다. 인터뷰를 기록하려고, 지원을 받으려고, 후원을 받으려고, 고립 영화가 되지 않으려고… 넘치도록 토해놓은 성긴 언어들이 머릿속 늪에서 어지럽게 얽히다 못해 뻣뻣이 굳어 있었다.

모니터 화면 속에서 껌벅이는 커서처럼 퍼석한 영혼이 무심히 점멸할 때, 손보자기로 냇물을 길어 올리듯 단어 하나도 살포시 보듬는 라이너 쿤체의 시만 한 ‘가성비’ 좋은 텔레포트도 없다. 흰 벚꽃이 흰머리 위에 내리는 통에 봄을 볼 수 없다(‘우리를 위한 하이쿠’)며 품격 넘치게 샐쭉거리는 여든여섯 살 독일 할아버지의 새 시집 〈나와 마주하는 시간〉(2019)을 찾은 이유다.

시도 버거운 세상에 번역시가 가당키나 한 일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우크라이나 내전 속에서도 그의 시를 번역했던 이에게 시인이 헌사한 시 ‘번역자의 특권’을 권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겠다.

독일어는 전혀 몰랐지만 4D 영화관급의 시적 체험까지 가능했음을 나는 간증할 수 있다. “플릭트 데 포글 우베 미히 힌벡/ 드룩케 이히 임 디 다우믄(‘뒤처진 새’).” 나란히 인쇄된 원문을 번역 검색창에 옮겨넣고, 아무도 안 볼 때를 틈타 따라 읽기까지 해보고 나면 시가 몸에 와서 찰싹 붙는다. 좋은 시집이라면 쉼표나 행간의 너비, 종이의 질감까지 시로 느끼게 만드는 법이고, 좋은 시라면 가닿을 마음만 필요한 법이다.
라이너 쿤체는 ‘서정시(Lyrik)’라는 파일명(Deckname)으로 관리되었던 동독 시절의 블랙리스트였다. 서정시가 위험했다니 우습지만, 혐오 언어의 두께에 눌려 시 없는 우리 일상을 떠올리고 나면 그 웃음도 드라이아이스처럼 휘마른다.

시인은 박해받던 이가 가해자를 닮아가는 흔한 오류를 비껴 걸어왔다. 그리고 시인은 먼 길을 걷는 동안 삼켜왔던 울음을 소박한 단어들로 길어내 독자 앞에 보듬어놓는다. “우리가 없어도/ 지구가 있고 우주도 있지만/ 시는 없다(‘인간에게 부치는 작은 아가雅歌’).”

우리의 언어가 시가 되었고 음악이 되었던 날들을 돌이켜본다.
영화 〈1991, 봄〉 속 ‘카바티나’의 마지막 음을 퉁기던 강기훈 선배의 마음이 다시 내게 눈처럼 내려앉는다.

권경원(독립 다큐멘터리 <1991, 봄> 감독)


시사IN 기자들이 주목한 책
기억의 전쟁
이길보라 외 3명 지음, 북하우스 펴냄

“산 자가 죽은 자를 대신해 용서할 수 있는가.”

베트남 중부에는 한국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마을이 있다. ‘하늘에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마을에 세워진 증오비마다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의 참상이 기록되어 있다. 영화감독인 저자는 증오비와 위령비 앞에서 카메라 녹화 버튼을 누르는 대신 기도를 하고 향불을 올렸다. “카메라를 내려놓은 곳에서부터 영화는 시작되었다.” 지난해 2월 개봉한 영화 〈기억의 전쟁〉의 제작팀이 미처 영화에 담지 못했던 이야기를 책으로 엮었다. 제작 여정만 5년이 걸렸다. 50년 넘게 ‘기억되지 못한’ 증언들을 따라간다. 왜 어떤 역사는 기록되지 못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몰랐나. 영화 개봉 후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생존자가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일본의 굴레
태가트 머피 지음, 윤영수·박경환 옮김, 
글항아리 펴냄

“일본은 거대 문명의 자기장 바로 바깥에 위치한 사회에 대한 완벽한 사례다.”

일본에 대한 책은 나오는 족족 팔려 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함량 미달의 책도 베스트셀러가 되곤 했다. 친일이냐 반일이냐, 이 질문은 일본과 관련된 책이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답이 선명할수록 잘 팔렸다. 〈일본의 굴레〉는 그런 공식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일본을 정말로 이해하고 싶어 하는 독자를 겨냥한다. 한 나라를 이해한다는 것은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문화와 역사를 모두 이해하는 동시에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까지 이해한다는 뜻이다. 말이 쉽지 불가능한 도전에 가까운데, 저자인 태가트 머피는 모든 영역을 넘나들며 ‘일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아 나간다. 갈수록 전문 영역의 장벽이 높아지는 현대사회에서 이 책이 보여주는 종합적 시야야말로 귀중한 미덕이다.
아니, 이 쓰레기는 뭐지?
다키자와 슈이치 지음, 김경원 옮김, 
현암사 펴냄

“쓰레기장은 그곳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하나의 척도가 된다.”

오늘 처음 출근한 아프리카 기니 출신 청소부는 “아까워라, 아이고 아까워라” 하면서 쓰레기를 수거했다. 통학로를 지나갈 때 “냄새 나니까 빨리 가” 하고 욕을 하는 초등학생이 드물지 않다. 쓰레기 안에서 꽁치 가시가 나왔기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꽁치를 샀다. 다섯 살 아이가 “나중에 어른이 되면 나도 쓰레기 청소부가 될까?” 하고 말했다.
저자는 생활비 40만 엔이 필요하다는 아내의 불호령에 인기 없는 코미디언을 하다가 쓰레기 수거 회사에 취직했다. 청소부 일을 하며 겪은 수많은 군상과 시시콜콜한 에피소드를 배꼽 빠지게 묘사했다. 킬킬대며 읽다 보면 일본의 어느 뒷골목에 서 있는 것 같은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책보다 더 적나라한 일본 사회 리포트다.
 
 책 자세히 보기 >>  

글쓰기에 대하여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박설영 옮김, 
프시케의숲 펴냄

“그 속은 깜깜해요.”

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가 2000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글쓰기를 주제로 강의 요청을 받았다. 뛸 듯이 기뻤고 ‘너무 기술적이지도, 그렇다고 필요 이상으로 모호하게 설명하지도 않을 생각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머릿속은 백지상태가 되었다. 고민 끝에 작가가 서 있는 위치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했다. 그가 붙든 질문은 세 가지다. 누구를 위해 글을 쓰는가? 왜 글을 쓰는가? 글은 어디에서 오는가? 글쓰기 과정에 대한 수많은 묘사들의 공통 요소는 ‘앞을 볼 수는 없지만 앞으로 길이 나 있으며 가다 보면 결국 앞을 볼 수 있게 될 거라는 느낌’이었다. 이야기를 찾아가는 여정은 어둡고 복잡했다. 작가가 직접 경험한 어둠, 그 속에서의 욕망이 특유의 위트 있는 문장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난다.
 
책 자세히 보기 >>  
그림의 영토

1980년대에 낙서로 이름을 알린 아티스트가 있었다. 흔히 ‘검은 피카소’로 알려진 장미셸 바스키아다. 그래픽노블 〈바스키아〉는 1980년대 미술계에 갑자기 등장해 불꽃처럼 타오르다 요절한 바스키아의 일생을 보여준다.
그는 열다섯 살에 집에서 뛰쳐나와 거리에서 살았다. 그는 거리에서 세상을 배웠고 마약 딜러, 사기꾼, 하층민의 삶에 대해 빠삭했다. 그가 그림 그릴 곳으로 캔버스가 아니라 길거리를 선택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인다...


산을 좋아하는 선배가 있습니다. 국내는 물론 제게는 이름조차 낯선 외국 산에 훌쩍 떠났다 오곤 하지요(물론 코로나19 이후로는 불가능한 일이 됐습니다만;;;;). 그런데 이 선배가 배낭을 꾸릴 때 꼭 하나 챙기는 게 있다고 합니다. 바로 시집입니다. 무게가 가벼울 뿐 아니라 원정 등반시 한국어가 그리울 때 아무 페이지나 펴들고 읽을 수 있어 꼭 시집을 챙긴다고요.
 
등산과 시. 얼핏 생각하면 별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이지요? 그 못지 않게 부자연스러운 조합이 또 있습니다. <시사IN>은 지난해부터 100일간 시사지 기사를 함께 읽는 챌린지 프로젝트(#하루시사)를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즌1] 참가자 한분이 이런 쪽지를 남기셨더라고요. “시사지를 읽으니 자꾸 더 불행해지는 것 같아요”라고요.
그래서는 아닙니다만, 언젠가부터 #하루시사를 진행하는 저희 기자중 한 명이 프로젝트 참가자들에게 매일 시 한 편을 보내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참가자 입장에서는 매일 추천 기사 한 편, 시 한 편을 받아보게 되는 셈이지요. 사실 시사지 기사라는 게 악다구니 가득한 현실을 담아내다 보니 시(특히나 서정시)와는 어울리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시를 받아보는 많은 분들이 '시사와 시'의 조합을 크게 어색하게 여기지 않는 듯했습니다.
 
이유가 뭘까, 궁금해하던 중 오늘의 추천 책 칼럼을 읽으며 실마리가 풀리네요. 불행해진다고 현실을 들여다보는 일을 회피할 수는 없습니다. 시인들이 그렇듯이요. 다만 평범한 사람들은 이렇게 맞닥뜨린 현실에 울분이나 혐오로 반응하는 일이 흔하죠. 일상이 메말라 갈수록, 영혼이 깜빡일 일이 많을수록 시를 읽어야 하는 것은 이때문일 것 같습니다. 어떻게 ‘박해받던 이가 가해자를 닮아가는’ 오류를 비껴갔는지 시인의 통찰을 통해 배울 수 있을테니까요. 이번 주말에는 '나와 마주하는 시간'을 선사할 봄날의 시를 골라봐야겠습니다.
 

"뭔가 독자인 제게 말을 걸어주는 느낌이었습니다."
"좋은 책 추천 감사드려요."

지난 뉴스레터를 받아본 독자들이 남겨주신 사연입니다💌
편집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언제든 아래 버튼을 누르고 의견을 남겨주세요.
더 나은 뉴스레터를 만드는 데 귀한 참조가 될 것입니다.
 


<시사IN> 뉴스레터를 아직 구독하기 전이라면 여기

💬 받은 이메일이 스팸으로 가지 않도록 이메일 주소록에 book@sisain.kr 등록해주세요.  
수신거부 원한다면 여기를 눌러주세요 

(주)참언론
webmaster@sisain.co.kr
카톨릭출판사 빌딩 신관3층 02-3700-3200
수신거부 Unsubscr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