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레터에서 저는 편집자가 일을 통제하는 감각과 그것의 쾌감에 대해 언급했었는데요. 불과 한 달 사이에 그 쾌감이 절망감으로 변하는 경험을 했답니다. 담당자의 과욕, 저자의 불신, 미뤄진 출간 일정, 그래도 부족한 작업 시간... 하필 '뭐든지 하면 다 되는구나!' 하는 짜릿한 승리감에 도취해 있던 터라 절망감의 여파는 깊고 넓었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쏟아진 폭격 같은 말들이 종종 떠올라 하루에 몇 번씩 가슴이 벌렁거리기도 했고요. 더 이상 줄일 수 없을 정도로 빠듯했던 출간 일정을 마른 마른 걸레에서 물을 짜내듯 압축했고, 30분 단위로 작업 일정표를 짜 협업자들에게 공유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저는 이런 위기(?) 속에서도 매주 풋살 모임을 주관했고, 독립출판 축제에도 다녀왔고, 어머니와 건강점진을 받으러 병원에도 갔다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10번째 레터도 발행했고요.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과거의 제가 벌려놓은 일들 덕분에 절망감에 빠져 있을 겨를도 없이 오늘까지 흘러오게 된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10월을 보내셨나요? 부디 분주하셨기를 바랍니다. 지난 한 달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ㅍㅈㅈ: 책을 만들면서 내가 느낀 ‘재미’가 누군가에겐 식상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은 없나요?
편집자 A:전 제가 마이너 취향임을 늘 인지하고 있습니다... 제가 재밌어하고 즐거워하는 걸 대중들이 좋아할 확률은 좀 낮아요. 그래서 식상하고 따분할 것을 걱정하기보다는, 이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너무 낯설지 않을지를 고민합니다. 제 취향이 이런 것을 바꿀 순 없을 테고, 여기서 타협점을 찾을 수 있는 건 표지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표지를 밝고 화려하게, 모두에게 익숙할 만한 레퍼런스를 찾아서 참고하고 있죠. 함께 일하는 디자이너분이 항상 고생 많으시죠. 이 세계가 첫 허들을 넘기가 어렵지, 다음 단계부터는 정말 재미있거든요(이것도 제 착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표지에 속아서 이쪽에 발을 담그도록 만드는 게 1차 목표입니다!
(...) 그가 디자인한 표지에는 일종의 슬픔 같은 것이 묻어있는 듯합니다. 예술가는 작품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고 했나요. 재킷에서도 그런 면모가 드러나는 표지가 참 많았습니다. 책 내용의 설명을 바탕으로, 그가 표지 디자인에 다가가는 모습이 마치 악보를 읽어 내려가는 느낌이 들기도 했어요. 더불어 실제로 세상의 빛을 본 표지들과 달리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대결하다 결국 탈락하게 된 표지들까지 실려 있어 비교해보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저자가 책의 표지를 디자인할 때 생각하는 것들, 접근하는 방식이 궁금하다면 꼭 한번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마음에 들었던 표지들을 아래에 덧붙입니다. 참고로 한국어판이 있는 도서들이니 한국어판 표지와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네요. (...)
(...) 예를 들어 유명한 맛집을 조사하고, 그 식당을 찾아가 시간을 들여 웨이팅을 하다가 마침내 음식을 먹으며 머릿속으로 나름의 평가를 내리는 일련의 과정이 모두 콘텐츠입니다. 또 여행 계획을 짜고, 여행지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고, 여행지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을 보고, 다른 여행객들을 조용히 관찰하는 순간도 콘텐츠가 될 수 있겠죠. 안 그래도 콘텐츠의 바다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너무 가혹한 제안일까요? 이왕 너른 바다에서 사는 김에 마음껏 헤엄치고, 깊게 잠수도 해보고, 둥둥 떠다녀보는 것도 좋겠다 싶습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글이 엄청 길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