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제연구소 뉴스레터 <史랑> 2020. 04. 14 
이이화를 보내며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자 동료, 그리고 벗이셨던  이이화 선생님께서 
2020년 3월 18일 오전 11시경 영면하셨습니다.
민중사학의 길을 닦고 열어주셨던 선생님께서는  
당신 스스로가 그야말로 민중이셨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역사학자 이이화의 생애
“1986년은 내 인생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난 해다.
하나는 역사문제연구소의 탄생이고또 하나는 내 딸 응소가 쉰둥이로 태어난 것이다
역문연이 나의 학문 활동에 커다란 전기가 됐을뿐더러 나를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는 요시찰 인물로 만들어주었다면늦둥이 딸은 가정생활에 재미와 활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쓰다한겨레출판, 2011, 191
1936.8 대구 비산동 출생
1952.  고아원에 가면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부산 영도 신성동의 고아원
          (서울 애린원)에 들어감.
1955.  가짜 중학교 졸업장을 위조하여 광주고등학교 입학
1956.  학생 소식지 『광고 타임스』 투고 첫 시 게재.
1958.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학문예창작과 장학생으로 입학
...
그의 글, 생각, 마음
금강산에 다녀와서
역사문제연구소 회보39(1999)
 
"
양쪽의 감시원들은 길을 사이에 두고 서로 섞이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남쪽 할머니들도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젊은이들도 따라 춤을 추었다. 여기에는 조동걸 교수 일행도 끼어 있다가 춤을 추었다. 이것이 대동춤이다. 이들 춤에는 분명히 이념과 체제가 없었다. 남루하거나 화려한 차림의 차이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뒤로 물러 나왔다. 그리고 담벽 밑으로 가서 한참 울었다.
"

새로운 각오로 10주년을 맞이합니다.
역사문제연구소 회보30(창립10주년 기념호)
 
"
우리는 암흑의 시기에 창립을 보았습니다. 어두움 속에 비치는 한줄기 빛은 그 찬란함을 더해줍니다. 우리는 한 줄기 빛이라고 자부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은 기울여왔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 땅에서 불모지였던 근현대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이를 대중화할 것을 표방해왔습니다.
이런 일을 하면서 10년의 세월을 쌓았습니다. 10년은 안정된 사회에서는 짧은 세월이겠지만 격동의 시대에는 아주 긴 터널일 것입니다.
"
1989.4.29~30 역사문제연구소 한국사교실
보은지역 역사기행
'쉰둥이'응소와 함께
정석종의 역사관과 민중사적 시각

정석종, 그의 삶과 역사학, 역사비평사, 2020 발췌

"정석종은 기존의 연구에 안주하지 않고 창의적인 이론을 제시하면서 독창적인 민중사의 영역을 파고들었다. 먼지 속에 파묻혀 사장(死藏)되어 있는 사료 발굴도 병행했다. 그리하여 1980년대와 1990년대 한국 사학계를 이끈 리더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운 친구야, 이제부터 연구에 
매진하겠다고 했는데
정석종그의 삶과 역사학, 역사비평사, 2020 발췌

"다음 해 여름 역문연 수련대회를 이곳에서 가졌는데 정석종 교수가 참석했다. 건강이 괜찮을 무렵이었다. 그는 우리 몇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조금 진지한 모습으로 나는 오래 못 살아. 역문연을 잘 꾸려주기 바라요라고 말했다."

남겨진 기억들
이이화 선생을 보내며
 서중석(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세상 잘못 돌아가는 일에 하실 말씀 많겠지만 이제는 모든 근심 우려 다 거두시고 평안히 가십시오. 그렇게 좋아하던 술 담배도 이제는 끊으시겠지요. 그래도 선생은 오래오래 사실 줄 알았는데, 아무리 강단이 좋아도 선생 말씀처럼 인명은 재천인가 봅니다. 그 어느 누구도 메울 수 없는 거대한 빈자리를 남기고 선생은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우리는 선생의 활달하고 격정적인 모습, 환한 웃음을, 뜨겁게 사셨던 선생의 삶·정신과 함께 언제까지나 마음속에 간직하겠습니다. 선생이 좋아하시던 개나리 진달래 꽃 온몸에 맞으며 화창한 봄날 모든 것 잊으시고 고이 잠드소서.
 
아이처럼 천진한, 하늘같이 맑은...
윤해동(역사문제연구소 전 사무국장)

"그토록 열정적이지만 막막한또 쇠처럼 의지적이지만 무모한 날들을 술과 함께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와 함께 무르익은 열정도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동학농민전쟁 백주년 기념사업추진 그리고 연구소 기금 마련을 위한 화전이었다. 경기대학교 근처 충정로 뒷골목의 맥주집에서, 이이화 선생과 몇몇 無謀漢들은 이를 통해 연구소의 새로운 역전을 기도하고 있었다."

‘이이화’의 결정적 장면
허영란(역사문제연구소 이사)

"돌이켜보면 선생님은 누구에게나 꾸밈없고 진솔한 분이셨다. 아이 같은 면도 있었다.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시국에 대한 의견을 물을 때나, 전봉준 동상 만드니 기부 좀 하라 하셨을 때나, 동상 만드는 일 도와주는 아들이 대견하다 하셨을 때나, 타국에서 아르바이트하며 공부하는 딸내미 자랑할 때나, 아닌 척 꾸미거나 속마음을 감추는 일이 없었다."


이이화(李離和) 형을 추도함
 이만열(역사문제연구소 고문)

"그가 1996년부터 10여 년 간에 걸쳐 집필한 한국사 이야기는 한국 근현대 사학사에서 역사관의 일관성이나 분량 면으로 볼 때 한 개인이 집필한 한국전사(韓國全史)로서는 그만한 것이 없을 정도다. 중요한 것은 이 책을 통해서도 그가 그 전에 거의 역사 연구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민중의 존재를 역사의 전면에 부각시켰다는 점이다. 그를 두고 민중사학 개척자라고 한 것은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이화 선생님을 추모하며
정석희(역사문제연구소 후원회원)

"예나 지금이나 빨갱이 타령을 입에 달고 사는 수구세력들의 극렬 탓인지 한국전쟁 피해 유족들이 주관하는 모임에는 여야를 떠나 보수 진보를 가리지 않고 참석을 꺼리는 일들이 잦아지면서 의지할 데 없는 저희로서는 궂은일에 항상 앞장서 주시는 선생님을 모셔 덕담을 듣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아버지 없이 평생을 살아온 유족들에게 선생님은 곧 아버지 같았고 형님 같은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2017.01.06 연구원들과의 모임
2016.08.15 민중사반 파주 워크샵
이이화 선생님을 그리며 
김아람(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좋은 논문을 썼네. 나도 사실 피난민이지. 아주 중요한 주제야.”
 선생님의 유년시절은 어땠을까요. 스스로 피난민이었다고 말씀하시는 그 삶의 무게는 얼마나 고된 것이었을까요
선생님께 다시 한 번, 존경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많이 그립다는 말씀도요

그립습니다 선생님.
이정은(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그립습니다 선생님. 어떤 세상에 가시더라도 선생님 방식대로의 치열하고도 흥겨운 삶을 사실 것을 알고 있지만선생님의 부재는 역시나 큰 상실을 불러옵니다조금이라도 선생님의 뜻과 활동을 닮아갈 수 있도록부끄럽지 않은 연구자, 그리고 애주가가 되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존경하는 선생님편히 쉬십시오

이이화의 '장면들'
1996.02.15 연구소 창립10주년 기념행사
2016.02.29 연구소 창립 30주년 기념행사
자택 서재 전경
2019년 10월에 멈춘 달력
연구소 홈페이지 내 '이이화 추모관'개설

역사문제연구소 홈페이지에 이이화 선생님을 추모하고 기억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마련하였습니다.

이이화 선생님과 관련한 기록물, 추모글을 계속 업로드할 예정이니

추모글을 보내고 싶은 분께서는 하단 링크의 안내에 따라 메시지를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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