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하늘을 찾아-미세먼지 해외견문록](2)인니서 날아온 ‘공포의 연무’…법 만들었지만 상징효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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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싱가포르 ‘연무 극복 분투기’



싱가포르의 9월 공기는 맑았다. 지난 6월 북·미 정상회담 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들렀던 이곳 랜드마크 마리나 베이 샌즈가 도시 어디서나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선명하게 보였다.

3년 전 이맘때는 달랐다. 보험설계사 알렉스 엥(28)은 그때를 또렷이 기억한다. 매캐한 연기 냄새가 도시에 깔렸고 시야는 뿌옇게 흐려져 땅거미가 내리면 운전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텔레비전 화면 한 귀퉁이에서는 싱가포르 환경청(NEA)이 제공하는 대기오염지수(PSI)가 수시로 업데이트됐다. 100을 넘으면 ‘나쁨’, 300을 넘으면 ‘위험’ 수준인데 수시로 400을 넘어섰다. 미국 국립산업안전보건연구원(NIOSH) 인증을 받은 N95 마스크는 어딜 가나 품절이었다. “외출했다 돌아와 샤워를 하면 온몸에서 검댕이 흘러나왔어요. 문득 ‘이게 폐까지 들어갔다면?’이라 생각하니 정말 끔찍하더라고요.”

인터넷상에서 이런 말이 유행했다. “싱가포르 플라이어를 선풍기로 만들어 연무를 인도네시아로 다시 불어 날려버리자.” 마리나 베이에 서 있는 42층 건물 높이의 관람차를 소재로 한 풍자였다. 연무의 원인을 제공한 주범국 인도네시아에 대한 원망이 짙게 깔린 표현이다.

팜유·제지 등 초국적기업들

인도네시아 밀림 태워 개간

독성 연기 주변국으로 퍼져

운 나쁘게 바람 방향 바뀌면

언제든 불어닥치는 ‘재앙’

책임소재 명확해 보이더라도

‘주범국’은 순순히 인정 안 해

싱가포르 연무법 만들었지만

외국에 통제력 미칠 길 없어

한 건의 기소도 하지 못해


말레이반도 끝단에 위치한 도시국가 싱가포르는 총면적이 약 719.9㎢로 서울(605.2㎢)의 1.2배쯤 된다. 땅 넓이로 치면 세계에서 15번째로 큰 나라 인도네시아에서는 매년 건기(4~10월)에 산이며 밀림을 불법적으로 태워 개간하는 작업이 이뤄진다. 초국적기업이 인도네시아에서 플랜테이션을 해 팜유와 제지 사업을 하면서 불은 이미 ‘산업화’됐다. 이때 나오는 독성 연기가 바람을 타고 주변국까지 퍼져나가는데, 이를 ‘연무(Haze)’라고 부른다. 이 때문에 싱가포르 사람들에게 바다 건너에서 나는 불은 마냥 구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운 나쁘게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언제든 연무가 불어닥칠 수 있다.

2015년 엘니뇨로 대지가 극도로 건조해졌을 때 최악의 산불이 일어났다. 6월 무렵부터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와 칼리만탄 지역에서 시작된 불이 10월 말 우기가 시작되면서야 꺼졌다. 인도네시아는 물론이고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까지 공항이 폐쇄되고 학교가 문을 닫았다. 세계자원학회는 당시 “인도네시아 산불로 발생한 이산화탄소는 올해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3%를 차지한다”며 “이것은 기후 대재앙”이라고 밝혔다.

산불은 명백히 인도네시아 국경 안에서 일어났다. 1997년부터 아세안(ASEAN) 나라들이 모여 이에 대한 해결을 촉구해왔는데도 거의 20년간 문제는 더 심각해지기만 했다. 그렇다면 싱가포르는 인도네시아 정부에 이 손해를 배상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중국 기여율을 놓고 논란이 이어지는 한국의 미세먼지 문제와 달리 이 문제는 책임소재가 명확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지난달 12~15일 현지에서 만난 전문가들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되 중립적으로 접근하라”고 조언했다.

■ 인도네시아 연무의 습격

싱가포르는 ‘규제의 나라’답게 대기질 관리 수준도 매우 높다. 배기가스 관리를 위해 등록된 차량 수도 엄격하게 통제한다. 이 때문에 개인이 차를 사는 것이 쉽지 않다. 정부가 발부하는 자동차등록증(COE)은 때로 차값보다 비싸다. 교민 이영옥씨(56·가명)는 지난해 1500㏄ 중형 세단을 4만5000싱가포르달러(약 3650만원)에 샀는데, COE 비용이 무려 6만5500싱가포르달러나 들어 총 11만500싱가포르달러(약 8960만원)를 지출했다. 게다가 10년이 지나면 이 승용차는 폐차해야 한다. 배기가스 때문에 노후 차량은 아예 쓰지 못하도록 정부가 규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1월부터는 더 친환경적인 차량 구매를 장려하기 위해 ‘차량 배출가스 제도’도 도입됐다. 모든 차량에 대해 이산화탄소(CO2)뿐만 아니라 탄화수소(HC), 일산화탄소(CO), 산화질소(NOX), 입자상 물질(PM) 배출량까지 따져 환급을 해주거나 과징금을 매긴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당 200g인 경우 일반 차량은 2만싱가포르달러(약 1630만원)를 내야 한다. 택시는 과징금이 이보다 1.5배 세다.

별다른 국내 요인이 없는 데다, 연무는 성분도 명확해 원인이 인도네시아에 있음을 알아내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주범국’은 순순히 문제를 인정하지 않았다. 연무가 심했던 2013년 싱가포르가 문제 해결을 촉구하자 인도네시아의 아궁 락소노 복지부 장관은 이런 말을 했다. “싱가포르는 어린애처럼 굴지 말아야 한다.” 이는 큰 반발을 불러왔고 결국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당시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연무 사태에 대해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2015년 최악의 산불 때도 이런 일이 있었다. 한 달간 연무가 계속되자 주변국이 인도네시아에 문제를 해결하라고 했다. 유수프 칼라 인도네시아 부통령이 이렇게 응수했다. “그럼 지난 11개월 동안 좋은 공기를 마셨다는 건데 언제 인도네시아에 감사한 적 있느냐.” 싱가포르 사람들로선 가슴을 칠 수밖에 없는 발언이었다.

인도네시아는 아세안이 2002년 채택한 ‘아세안 월경성 연무오염에 관한 협정’도 12년 동안 비준하지 않았다. 협정은 국경을 넘나드는 연무를 통제하기 위해 토지와 삼림 화재를 예방, 감시, 완화하는 데 서로 협력하자는 취지를 담았지만 실행되지는 못했다. 상징적 효과는 있었지만 아세안을 통해 연무 문제를 풀어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싱가포르 정부는 국내법이라도 만들어 연무를 유발한 기업과 개인을 처벌하기로 했다. 2014년 9월 ‘월경성 연무오염법’이 제정됐다. 해외에서 연무를 일으켜 싱가포르에 영향을 끼친 기업이나 개인을 찾아내 민형사상 책임을 묻는다는 게 골자다. 인도네시아는 ‘자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라며 민감하게 반응했다. 영토 밖에서 일어난 화재에 대해 책임자를 찾아내 처벌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리첸첸 싱가포르국제문제연구소(SIIA) 정책프로그램국장이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위 사진). SIIA는 연무와 관련된 동남아 지역 정보를 모아 누구나 실시간으로 볼 수 있도록 ‘헤이즈 트래커’를 서비스하고 있다. 싱가포르 | 최미랑 기자


■ 국내에서 할 수 있는 것부터

연무법은 현실적으로는 ‘상징적 조치’일 뿐이었다. 연무법에 따른 기소는 지금까지 단 한 건도 이뤄지지 않았다. 다만 싱가포르 정부가 이 법에 근거해 책임자들에게 정보 제출을 요구한 적은 있다. 2015년 9월 싱가포르 정부는 환경청 조사 결과 4곳의 인도네시아 기업에 화재와 연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는 결과를 통보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양국의 신경전은 이듬해까지 계속됐다. 2016년 6월 싱가포르에 입국한 인도네시아 종이 생산업체 관계자를 조사하려 하자 인도네시아 당국은 자국민을 보호하겠다고 반발했다. 당시 유수프 칼라 부통령은 “우리 국민이 싱가포르 법에 따라 기소되는 건 용납하지 않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올해는 운이 좋았을 뿐일까 2013년 6월 인도네시아 산불로 발생한 연무가 싱가포르 시내에 자욱하게 깔려 중심업무지구 건물들이 희미하게 보인다(왼쪽 사진). 연무가 없는 올해 9월 마리나만에 관람차와 마리나 베이 샌즈가 선명하게 보이는 상황과 뚜렷이 대조된다.


■오염 당사국이 가장 큰 피해…스스로 깨닫게 하고 협력해야

이 같은 외교적 갈등만이 제약조건은 아니다. 무엇보다 기소를 위해서는 결정적 ‘증거’를 확보해야 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 난 불에 대한 책임자를 싱가포르에서 찾는다는 것은 인도네시아 정부 협조 없이는 불가능했다. 조사에 응하지 않는다 해도 제재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싱가포르와 직접 연관 있는 기업이라면 정부의 개입 여지가 좀 있었다. 산불에 대한 책임이 드러난 세계적 제지 회사 아시아펄프앤드페이퍼그룹(APP)의 경우가 그랬다. 이 기업은 싱가포르에 본사를 두고 있었다. APP에 대한 싱가포르의 조치는 강력했다. 2000년대부터 연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 운동의 필요성을 얘기해온 앙펑화 난양공대 교수(61)는 “정부가 조달하는 제품 목록에서 APP 제품을 제외한 것은 의미가 컸다”고 평가했다. “이 조치는 펄프가 얼마나 친환경적으로 생산됐는지에 큰 관심을 두는 유럽연합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어서 연무 문제에 대한 APP의 책임의식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고 앙 교수는 말했다.

앙 교수는 국가 단위의 접근보다는 책임 있는 기업에 대한 불매운동이 효과적이라고 본다. 그는 1997년 연무를 겪은 이후부터 책임이 있는 기업들 제품을 불매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2015년 최악의 연무 이후에는 실제로 불매운동이 일어났다. 싱가포르소비자협회가 APP에 대해 불매를 선언했고 한때 APP 제품은 슈퍼마켓에서 모두 퇴출됐다.

■ “중립적으로 접근하라”

“인도네시아에서 플랜테이션을 하는 많은 팜유와 제지 회사가 싱가포르에 본부를 두고 있습니다. 이건 정부나 우리 같은 연구소가 더 직접적으로 이 문제에 개입할 여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해요.”

민간 싱크탱크인 싱가포르국제문제연구소(SIIA)의 리첸첸 정책프로그램국장(42)의 말이다. “연무 문제는 두 나라 모두 정치적으로 굉장히 민감한 이슈입니다. 싱가포르로서는 인도네시아만 탓할 게 아니라 가진 장점을 모두 쓰면서 다양한 접근법을 고민해야 해요.” 예컨대 금융 중심지인 싱가포르 소재의 투자기관들이 연무에 연루된 기업에 대출 기준을 높인다면 연무를 줄이는 압박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인도네시아는 조코 위도도 대통령 취임(2014년 10월) 이후 연무 문제에 대한 태도를 바꿨다. 일단 인도네시아 정부가 문제 해결 의지를 보인 이상 이를 북돋우고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리 국장은 강조했다. “싱가포르에서 대기오염지수가 400을 넘어 모두가 경악했을 때 인도네시아 일부 지역에서는 1800이 넘었어요. 그곳 주민들은 그야말로 불 옆에서 연기를 들이마시며 산 겁니다. 연무는 사실 그 누구보다 인도네시아의 사람과 환경, 경제에 가장 큰 해악을 끼칩니다. (문제를 일으킨) 당사국이 이를 깨닫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다음은 우리가 당사국을 도와 같이 문제 해결을 해나가는 것이고요.”

자국 문제를 깨닫기는 했다지만 인도네시아는 산불 관련 정보를 주변국에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을 여전히 꺼린다. 또 책임소재를 가리려면 불이 난 땅이 어느 기업의 플랜테이션 농장인지, 혹은 누구 소유인지를 명확히 알아야 하는데, 이와 관련해 통일된 지도가 없는 것은 인도네시아 정부에도 큰 고민이다.



싱가포르에서는 현실적 대안을 찾아 나섰다. 시민들에게 연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SIIA가 올해 개설한 ‘헤이즈 트래커(Haze Tracker)’를 통해서다. 웹사이트에 접속하면 현재 대기오염지수와 함께 화재와 관련한 동남아 지역 정보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화재 가능성이 있는 지역은 붉은 점(핫스폿)으로 표시되고,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도 화살표로 보여준다. 핫스폿이 찍힌 지역이 벌목 허가를 받은 곳인지, 아니면 펄프나 팜오일 농업을 하는 곳인지도 대략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이런 작업은 “대기오염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는 세계 비정부기구(NGO)와 힘을 모았기에 가능하다”고 애런 추 SIIA 국제문제 및 디지털미디어 부국장은 말했다. 미국에 본부를 둔 환경연구기관 세계자원연구소(WRI)와의 협업은 큰 도움이 됐다. 프로젝트 비용은 싱가포르 정부가 댔다.

이런 웹페이지를 왜 환경청이 직접 운영하지 않을까. 리 국장 설명에 따르면 정부가 직접 운영할 경우 ‘중립성’에 의심을 받을 가능성이 커서다. “헤이즈 트래커는 인도네시아 정부를 규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정보를 모아 주변국 어디서나 볼 수 있게 제공하는 것이죠.” SIIA는 인도네시아의 NGO뿐 아니라 인도네시아 정부가 만든 이탄지대복원기구(BRG)와도 활발히 교류한다. “국경을 넘어 공통의 목표를 가진 NGO, 무역협회, 지방정부, 지역 공동체, 전문가, 기업 등 이해관계가 닿는 모든 곳과 협력해야 합니다.”

여전히 인도네시아에서 개간을 할 수 있는 가장 쉽고,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은 불을 내는 것이다. 초국적기업이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도록 압박하는 것, 현지 농부들이 개간을 위해 불이 아닌 다른 방식을 택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교육하는 것, 새로운 농업 방식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 등은 팜유와 종이를 필요로 하는 다른 나라들도 함께 고민할 문제다.

연무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지금 시점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했다. 리 국장은 답을 했다. “안타깝지만 환경 문제에 마법 같은 해법은 없어요.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할 수밖에요. 특히 작은 나라들엔 창의력이 절실한 시점입니다.”

특별취재팀 김기범·임아영(산업부), 배문규(정책사회부), 김상범(뉴콘텐츠팀), 최미랑(모바일팀)

취재 지원 : 한국언론진흥재단





최미랑 기자 ra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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