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인스피아 저널, (6), 2021.9.8, 1-5 (5pages)

(Source)     Journal of the Inspia

안녕하세요. 해찰하면서 느릿하게 걷는 것을 좋아하는 에디터 김스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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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항상 SNS에 접속하기 전 심호흡을 한번 합니다. 

원래 넷플릭스만 보고 있었지만 최근 아마존프라임과 왓챠도 추가로 구독했습니다. 정작 보진 않으면서 찜한 영상 목록만 매일 늘어가고 보지 않은 주간지와 배송받은 책들은 포장째 식탁 구석에 쌓였고, 이것저것 추가해둔 수많은 뉴스레터 덕에 메일함은 어느덧 +999에 돌입한지 오래입니다. 

좋은 콘텐츠들은 수없이 많은데, '안' 읽은 내가 잘못입니다. 이런 부담감을 노려 콘텐츠 업계는 수없이 많은 새로운 상품들을 만들어냅니다. '죽기 전에 봐야 할 영화 1001' '쉽게 읽는 간추린 고전' '지적인 대화를 위한 무지 넓은 지식' '한주의 신작 트렌드' 등등. 제목만봐도 체할 것 같은 기분입니다. 만약 콘텐츠도 밥처럼 많이 먹으면 탈이 난다면 벌써 급체로 몇번 병원에 갔어야할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는 점이 그나마 다행일까요.

이번 레터에선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방법>과 <왜 책을 읽는가?>를 통해 독서에 대한 부채의식에 대해 고민해보기로 합니다.

<공부안하고 백점맞는 방법> <놀면서 서울대가는 법>류 책의 공통점은 저자가 백점맞는 사람이고 서울대생이라는 것입니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의 저자 피에르 바야르 역시 열정적인 독서가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은 제목에 대한 기대감으로 책을 펼쳐든 사람들에게 꼼수를 알려주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당신이 읽지 않아서 부채감을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책들은, 사실 읽지 않아도 된다'가 이 책이 주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바야르는 로베르트 무질의 소설 <특성 없는 남자> 일부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독서론을 펼칩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스툼 장군은 '모든 책을 다 읽어치우겠다'는 기세로 의기양양하게 도서관에 들어왔다가 엄청난 양의 책을 보곤 화들짝 놀랍니다.

그리고 스툼 장군이 사서에게 이 수많은 책을 어떻게 속속들이 알고 있는지 비결을 묻자 사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장군님 제가 어떻게 이 많은 책들을 모두 알 수 있는지 궁금하지요? 그것은 바로 어떤 책도 읽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엄청난 독서가로 유명했던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해 독서 경험의 취약성에 대한 생각을 남겼는데요. 수상록 중 일부를 인용해봅니다.

"내가 좀 배운 사람이긴 하지만 그러나 나는 기억으로 간직하는 데는 영 젬병이다."

"이미 수년전에 꼼꼼히 읽고 주까지 이리저리 달아놓은 책들을 마치 한번도 접한 적이 없는 최신 저작인양 다시 손에 든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기에, 나는 내 기억력의 그러한 배반과 극심한 결함을 어느정도 보완하기 위해 책의 말미에 그책을 다읽은 때와 그책에 대한 개략적인 판단을 덧붙이곤 한다. 그렇게하면 적어도 책을 읽으면서 품게된 저자에 대한 전체적인 관념과 그 분위기만이라도 남을 것 같기 때문이다."

-미셸 드 몽테뉴, <수상록>

영국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비독서'의 철학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와일드는 서평에 대해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요. "나는 내가 평문을 써야 하는 책은 절대 읽지 않는다. 너무 많은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 어찌보면 황당한(!) 문구는 이 책 서문이기도 합니다. <특성 없는 남자>의 사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숲을 보기 위해선 때론 의도적으로 나무에 주목하지 말아야할 때가 있는 법이고, 와일드는 이를 위한 수단으로서 적극적인 '비독서'를 주장했던 것이죠.

결국 와일드와 바야르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창조'입니다. 쉽게 말해 독서의 행위보다는 그것을 씹고 소화시켜 나의 생각으로 만들어내는 행동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피에르 바야르가 말하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입니다. 많은 책은 읽지 않아도 됩니다. 읽더라도 읽자마자 스쳐보내야 합니다. 모든 중요한 책의 내용을 통달해야한다는 생각은 외려 전체적인 맥락에서 사안을 읽는 능력과 창조력을 질식시킬 수 있습니다.

<왜 책을 읽는가>를 쓴 샤를 단치 역시 맹렬한 독서가입니다. 시니컬한 내용에 비해 책의 제목이 상당히 점잖고 둥글한데, 만약 전반적인 책이 풍기는 포스를 반영해 제목을 다시 짓는다면 아마 이런 느낌일 것 같습니다. <너, 책 왜 읽냐?>

누군가에게 어떤 책은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그는 책의 서두에서 경고합니다. "경고! 생각과 취향을 너무 한 방향으로 몰고가는 독서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경우엔 이런 책들을 읽으면 안됩니다. 극도의 우울한 상태에 빠졌을 때 스콧 피츠제럴드의 <균열>을 읽거나, 물가가 치솟은 나라에서 살면서 몇년 째 실업상태일 때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읽는다든지 하는 일은 굉장히 위험할 수 있습니다. 즉 어떤 책이든 자신의 상황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통한 맥락이 있는 독서를 해야한다는 것이죠. 

개인적인 생각으론 이 구절의 핵심은 '많이 읽어본다'보다는 '일단 신어본다'인 것 같습니다. 신발 가게에서 100켤레를 신어봤다고 그걸 다 사지 않듯이, 이렇게 둘러보다보면 사실 안 읽어도 되는 책이 더 많겠죠? 어떤 책이든 내 몸에 새겨져야 소용이 있고, 어떤 책들은 읽지 않느니 못한 경우도 많으니까요. 신어본 신발을 죄다 신고다닐 수 있도록 발이 200개가 아닌걸 한탄할 게 아니라, 어떤 신발은 신어만 보고 안 신기로 결심해야만 합니다.

아참,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읽을 책 목록은 터져 나갈 지경이고, 욕심은 과해서 '속독'을 하려고 하다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자고로 밥과 책은 천천히 꼭꼭 씹어 소화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