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박상현의 미디어 인사이트
씨로켓 인사이트
2020.7.27

포드의 죽은 브랜드 살리기

요즘 미국 고등학생들에게 인기있는 자동차는 뭘까? 아무리 잘 사는 나라라고 해도 모든 고등학생이 차를 가질 수 있는 건 아니고, 차가 있다고 해도 대개는 부모가 타던 중고차를 물려받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부모가 갑부는 아니지만 새 차를 사줄 만큼의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 아이들이 원하는 자동차는? 지프(Jeep)다. 지프 중에서도 오프로드 차량인 랭글러(Wranger). 이런 현상은 오래되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 미국 고등학교의 학생 주차장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새 차의 모델을 지프 랭글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Wranger l Jeep
그런데 왜 갑자기 랭글러 같은 오프로드 SUV가 인기를 끌게 되었을까? 단정지어 말하기는 힘들지만 자동차의 자동화(automation)가 급진전을 하는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요즘 새로운 자동차들은 무인운전 전단계에 가까와서 내비게이션은 물론, 차선이탈방지, 충돌방지 자동브레이크를 갖추고 있는 경우가 흔하고, 일부 차량들은 무인운전의 테스트 버전이 탑재되기도 한다. 즉, 자동차는 이제 운전자의 개입이 최소화되는 테크제품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는 디지털 손목시계가 보편화되고 스마트폰이 시계를 대체하게 되자 갑자기 아날로그 시계가 크고 고급스럽게 변신, 부활한 현상에 비유할 수 있다. 잘 닦인 도로를 매끈하게 운행하는 차량을 떠나 운전자가 모든 결정에 개입해야 하는 오프로드에 대한 환상이 커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헐리우드에서 카우보이와 인디언이 등장하는 서부영화가 큰 인기를 끈 것은 인디언들을 보호구역으로 몰아넣고, 카우보이들이 사라진 후부터 였다. 우리는 사라져가는 것에 낭만을 느낀다. 사실 오프로드 차량을 갖고 있다고 실제로 오프로드를 달릴 사람들이 몇이나 있을까?)

그런 이유로 미국에서 오프로드 차량에 큰 인기가 생겼는데, 그 이득은 크라이슬러의 지프가 사실상 독차지하고 있는 상황이 벌어졌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오프로드 차량은 작은 세그먼트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다른 메이커들은 지프가 독차지하게 내버려 뒀을 뿐 아니라, 지프 조차도 오프로드 차량 만으로는 장사가 되지 않으니 일반 SUV를 주력으로 팔아왔다.

브롱코의 과거
하지만 오프로드 차량이 인기를 끌면서 다른 기업들도 지프가 장악한 시장에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관심을 보인 자동차 회사가 포드다. 하지만 새로운 브랜드를 런칭하는 데 큰 비용이 들고 그렇기 때문에 브랜드의 전통을 중요시하는 미국 시장에서 완전히 새로운 브랜드를 바닥부터 만들어 홍보하는 일은 쉽지 않다. 미국 소비자들이 그만큼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오프로드의 인기는 앞에서 말했듯이 낭만적인 이미지에 크게 기대고 있다. 몰스킨 노트가 과거 문인과 아티스트들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과 같은 이유. 가령 지프보다 훨씬 고급이지만 랜드로버 디펜더(Defender)나 벤츠의 G바겐도 오랜 전통의 덕을 톡톡하게 보고 있다. 2차대전과 6.25 전쟁터를 누비던 지프처럼 영국의 특공대나 탐험가들이 타고 아프리카를 누비던 랜드로버의 이미지, 이란의 샤 왕조의 요구로 군용 차량으로 개발된 G웨건의 이미지는 ‘오프로드의 낭만’을 불러일으키기에 아주 좋은 레거시다. 즉, 오프로드 브랜드를 띄우기 위해서는 이런 전통이 필요하다. 

다행히 포드에게는 브롱코(Bronco)라는, 수십 년 동안 단종되었던 브랜드가 있었다. 이걸 살려낸다면 소비자들이 큰 관심을 가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이 브랜드에는 오명이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아마 한 번 쯤 들어봤을 유명한 사건이 있다. 바로 NFL 선수 출신으로 영화에도 진출한 스타 O.J. 심슨(Simpson)이 아내를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자 체포를 피해 로스앤젤레스의 고속도로를 달렸던 대형 추격전. 흑인 선수가 모델 출신의 백인여성과 결혼했다는 것도 관심을 끌었는데, 그 여성을 살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자 전국적인 뉴스가 되었고, 거기에 고속도로를 달려 도망하는 장면이 나오자 미국 매체들은 이 장면을 생중계하면서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했다. 그런데 그 때 O.J. 심슨이 타고 달아나던 승용차가 흰색 포드 브롱코였다.

심슨은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검찰의 실수였다는 주장이 강하게 대두되었고, 그가 무죄냐 유죄냐를 두고 흑백의 인종갈등이 빚어졌을 만큼 미국사회를 뒤흔든 사건이었다. (이 재판에서 심슨의 무죄판결을 끌어낸 변호사가 로버트 카다시안으로, 유명 모델이자 연예인 킴 카다시안의 아버지다). 이런 악명 높은 사건을 통해 '브롱코’라는 브랜드가 나쁘게 각인되면서 브랜드의 이미지는 크게 손상을 당하게 되었다. 

물론 웃자고 하는 행동이지만 지금도 심슨이 탔던 흰색 브롱코를 모는 소유주는 번호판에 “NOT OJ”(OJ아님)를 붙이고 다니는 일이 흔할 만큼 미국인들에게는 '브롱코=살인자의 탈주차량’이라는 이미지가 붙어버렸다.

오프로드 레거시
포드는 O.J. 심슨 사건이 일어난 지 2년 만에 브롱코 모델/브랜드를 은퇴시켰다. 당시 포드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브롱코의 퇴역이 심슨과는 무관하다고 했지만 다들 심슨 때문에 브랜드에 타격을 입은 탓이라고 알고 있을 만큼 이미지가 나빠졌던 것은 사실이다.

사실 포드가 브롱코를 은퇴시켰던 배경에는 안전과 관련한 이미지 문제도 있었고, 무엇보다 1990년대에 성장하던 SUV 시장의 요구와도 관련이 있다. 미국인들이 큰 차량을 원하면서 소위 '사커맘'(Soccer Mom)들은 미니밴을, 남성들은 SUV를 선호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지금은 사커맘들도 미니밴을 싫어해서 모두 SUV로 몰리고 있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설명하자). 그런데 이들이 SUV를 타려는 이유는 그저 일반도로에서 타는 일반 승용차를 대체하는 큰 차량이 필요했을 뿐 오프로딩과는 상관이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전통적인 오프로드 차량은 오히려 불편한 존재였다.

포드를 비롯한 자동차 메이커들은 일반도로를 편안하게 달리는 SUV를 원하는 소비자들의 심리를 파악하고 익스플로러(Explorer), 익스페디션(Expedition) 같은 모델을 만들어내는 전략을 사용했다. 그 과정에서 이미 익스플로러와 외관이 비슷해진 브롱코는 이미지도 나빠졌는데 굳이 따로 유지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던 것.

그러나 (물론 지금와서 포드가 자랑하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포드의 브롱코는 나름 전통이 있는 오프로드 브랜드다. 1966년에 첫 선을 보인 이 모델은 뒷발질을 하는 말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잘 길들여지지 않아서 등에 탄 사람을 떨어뜨리거나 다른 동물들을 공격하기 위해 뒷발질을 하는 말을 가리켜 브롱코(bronco, broncho)라 부른다. 빠른 스포츠카에 머스탱(Mustang)이라는 말 이름을 붙인 포드에게 길들여지지 않은 브롱코의 이미지는 오프로드 차량에 적절한 선택이었다.

게다가 지프가 지금은 크라이슬러의 소유가 된 브랜드이지만 포드도 한 때 군용지프를 생산하기도 했다. 지프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포드는 피그미(Pygmy)와 윌리스(Willys) 등의 모델을 만들어냈는데, 미군의 지프는 포드의 GPW 모델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지프 브랜드가 크라이슬러로 넘어간 후 지프처럼 터프한 4륜구동 오프로드 모델을 만들어내기로 한 건,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크라이슬러의 전설적인 회장 리 아이아코카가 포드를 이끌던 시절이다. 이 때 만들어낸 모델이 브롱코였던 것. 따라서 브롱코는 포드가 자랑할 만한 꽤 길고 괜찮은 역사를 이미 갖고 있었다.

모델의 부활, 브랜드의 탄생
포드는 브롱코를 부활시키면서 단순한 모델이 아닌 (서브) 브랜드로 승격시켰다. 말하자면 현대가 제네시스에서 현대를 숨기고 그 브랜드 아래로 여러 모델을 만드는 것 처럼 브롱코에서 포드라는 로고는 트렁크 밑에서 꺼낼 수 있는 선반 외에는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2021년형으로 세 가지 모델을 동시에 선보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세 모델의 라인업을 보면 지프의 오프로드 라인업을 의식한 것이 보인다. 즉, 포드는 브롱코 브랜드를 통해 지프를 정면으로 겨냥한 것이다. 

반응은 엄청나다. 근래들어 미국에서 새로운 모델, 그것도 부활하는 모델이 이만큼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킨 적이 있을까 싶을만큼 대단한 반응이다. 브롱코의 부활을 기다렸던 소비자들은 물론이고, 각종 리뷰어들이 침이 마를 만큼 칭찬을 한다. 왜일까?

브랜딩을 너무나 완벽하게 해냈기 때문이다. 한 분석을 빌자면 이렇다: 오래된 오프로드 브랜드를 유지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과거에 유명했던 외양을 그대로 유지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그 외양을 현대적으로 바꿔서 내놓는 방식이다. G바겐과 지프가 전자에 해당한다면, 랜드로버의 디펜더가 후자에 해당한다. 그런데 포드는 브롱코를 현대적으로 새롭게 디자인하면서도 초창기 모델이 가졌던 개성을 완벽하게 살려내는 제3의 길을 선택했다는 거다.

Bronco l Ford
특히 브롱코의 토크와 등판능력 등 오프로드 팬들이 중요시하는 스펙을 탄탄하게 채워서 지프를 누르고 있고, 오프로드 운전자들의 행동을 연구해서 고프로와 스마트폰을 장착해서 촬영할 수 있는 스탠드를 붙이고, 폰의 오프로드 맵을 내비게이션에 연동시키는 등 소셜미디어에서 자랑하고 싶은 심리를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사양을 넣었다.

그 결과, 아직 판매를 시작하지도 않은 모델들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면서 동호회가 만들어지는 등 대박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이를 감지한 포드는 초기 생산량을 두 배로 늘려잡았다. 오래된 브랜드를 어떻게 부활시켜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사례가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O.J. 심슨이 만들어낸 나쁜 이미지는 어떻게 해결했을까?

포드는 이에 대해서 별도의 언급을 하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브롱코 라인업을 O.J. 심슨의 생일인 7월 9일에 발표했다. ‘우리는 이 브랜드가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윙크를 몰래 날린 셈이다. 물론 이에 분노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우연히 겹친 것일 뿐이라고 하면 그만이다. 문제있는 브랜드에 악동의 이미지를 부여해서 재런칭하는, 위험천만하면서도 대담한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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