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께 보내는 마흔여섯 번째 흄세레터

출근해서 자리에 앉은 어느 날, 침대에서 눈 뜨고 지금까지 어떤 선택들을 했는지 떠올려봤습니다. 옷을 골랐고, 사람으로 가득한 버스를 타야 할까 고민했고, 삼각김밥은 어떤 맛을 먹을까 등 이른 아침인데도 열 개가 넘는 선택을 했더라고요. 당시 《악의 길》을 편집하고 있었는데, 책 속에는 순간순간마다 “어떻게 하지?”라는 문장이 많이 나왔거든요.

그들이 이토록 갈등하는 건 진실이 안개 속에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택이 옳은지 판단하기 어렵고, 판단할 수 있는 순간에도 강렬한 욕망이 그들을 뒤흔들죠. 이런 혼란 속에서 주인공 '마리아'와 '피에트로'는 끝내 외면할 수 없는 갈림길 앞에 서게 됩니다. 삶이 송두리째 바뀌게 될 순간이요.

《악의 길》은 시즌 4의 테마인 '결정적 한순간'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마리아와 피에트로의 선택을 지켜보면서 님이 마주하고 있는 선택의 순간들도 살펴보기를 바라며 이번 레터에서는 편집자가 뽑은 《악의 길》 미리보기와 추천 콘텐츠를 소개해드릴게요.  

《악의 길》 미리보기 1


“아, 사람들은 그냥 자네가 거칠고 화를 잘 낸다고 하더군.” 니콜라 삼촌이 크게 말했다. “실제로 지금 화가 난 것 같은데. 지팡이 필요한가?” 
니콜라 삼촌이 지팡이를 내밀며 그것으로 누군가를 때리는 시늉을 했다. 피에트로가 웃었다.

“사실입니다.” 피에트로가 솔직히 털어놓았다. “제가 어렸을 때 장난꾸러기였던 건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벽이란 벽은 다 뛰어넘었고 온갖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으며 친구들을 막대기로 때리기도 했어요. 사나운 말들의 등에 올라타고 달리기도 했고요. 그렇지만 어릴 때는 다 그러지 않습니까? 돌아가신 어머니는 가끔 저를 묶어놓고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가게 했습니다. 저는 끈을 이빨로 물어뜯어 끊어낸 뒤 달아나곤 했지요. 하지만 곧 고통을 알게 되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조그만 우리 집 지붕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저는 추위와 배고픔과 온갖 병을, 버려진다는 게 뭔지를 알게 되었지요. 늙으신 숙모 두 분이 저를 도와줬지만 두 분 역시 가난했답니다! 그래서 저는 인생이 뭔지 알게 되었어요. 아, 빌어먹을. 배고픔은 훌륭한 선생입니다! 저는 남의 밑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고분고분 말 잘 듣는 법과 일을 배웠지요. 그래서 지금 일하고 있습니다. 집을 다시 수리하고 마차와 황소 두 마리, 개 한 마리만 가질 수 있다면 곧 아내를 얻어서…….”

“이런, 제기랄, 제기랄, 아내를 얻으려면 먹을 게 필요해…….” 니콜라 삼촌이 사르데냐의 오래된 속담을 말했다.
루이사 이모는 실을 자으며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오른쪽 입술 주변에 생긴 가느다란 주름이 실룩거렸다. ‘거지들 같으니! 굶어 죽게 생겼어도 장가갈 꿈을 꾼다니까!’ 루이사 이모가 생각했다. 
“됐네.” 니콜라 삼촌이 지팡이로 벽난로의 돌을 두드리며 말했다. “이제 일 이야기를 해보세. 서로 조건이 맞는지 봐야지.”

서로 맞았다.(19~20쪽)

세's pick

이렇게 피에트로는 마리아 노이나의 집에서 하인으로 일하게 됩니다. 피에트로의 결핍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한데요, 훗날 마리아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피에트로를 우리 집에 들이기로 결정한 그날처럼 불행한 날이 있을까……'

《악의 길》 미리보기 2


그는 유령들만 활개 치던 끝없는 회색 길이 막연하게 떠오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거대한 납색 구름들 사이로 환상적인 달이 이따금 나타나는 골짜기에서 흐릿한 달빛이 어렴풋이 비치는 거친 오솔길들을 따라 걸을 때였다.
‘어디로 가야 할까, 어디에서 걸음을 멈출까?’ 그는 본능적으로 물었다.
헐벗고 황량한 그 골짜기의 이상한 가을밤은 불가해한 암시가 담긴 꿈을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피에트로는 권총을 만지작거렸다. 이따금 수풀 뒤에서 걸음을 멈추면 그의 적수가 달빛이 어슴푸레한 고요한 오솔길로 지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권총을 쏘았다. 총소리가 골짜기의 불안한 침묵을 깨뜨렸다. 곧이어 사방이 다시 조용해졌다.
그는 격렬하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벌써 범죄를 저지른 것만 같았다. 불현듯 정신을 차렸고 사악한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다시 길을 걸었다.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어디로 가야 할까, 어디에서 걸음을 멈출까?’
그는 구름이 여기저기 떠 있는 신비한 하늘 아래에서 걷고 또 걸었다. 때로는 어두웠다가 때로는 도망치는 달이 남긴 푸르스름하고 희미한 빛에 모습을 드러내는 거친 오솔길이었다. 그의 영혼도 희미한 빛의 지배를 받았는데 그 빛은 이따금 완전히 꺼져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꿈속에서처럼 끝이 없고 불가사의한 악의 길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다음 날 피에트로는 아직 사용할 수 있는지 권총을 다시 살펴본 뒤 아무도 모르는 무성한 수풀 속 오목한 돌 두 개 사이에 숨겼다. 그리고 다시 일을 시작했을 때 그는 딴사람이 된듯했다. 길고 긴 꿈에서 깬 기분이었다.(192~193쪽)

랑's pick

피에트로는 자신이 숨겨둔 권총을 다시 꺼냈을까요? 

👀편집자의 추천 콘텐츠👍

〈미스터 노바디〉, 2013

아홉 살 '니모'는 선택의 순간에 놓입니다. 이혼하는 부모님 중 누구를 따라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죠. 영화는 엄마와 살기를 선택한 니모의 삶과 아빠를 선택했을 때 이어질 니모의 인생을 모두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각기 다른 세 여자(진, 안나, 앨리스)와 사랑에 빠졌을 때 펼쳐지는 전혀 다른 삶도 보여주죠. 그러니까 이제 사람은 하나인데 인생은 아홉 개인...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흔한 소재를 감독 특유의 독특한 상상력으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우연과 상상〉, 2021

세 편의 단편이 묶여 있습니다. 친구와 썸을 타는 남자가 2년 전 헤어진 전 남자친구였다는 걸 알게된 여자의 이야기. 청렴하게 살던 교수가 단 한 번의 실수로 인생이 뒤바뀌는 순간. 레즈비언 여성이 한때 짝사랑헀던 옛 동창을 우연히 만나지만 대화를 나눌수록 그리워하던 상대가 아님을 깨닫는 장면까지. 우연과 상상이 만들어내는 순간들을 포착하는 이 영화는 선택하고 선택하지 못했던 일들을 세심하게 살펴봅니다. 왓챠와 티빙에서 감상하실 수 있고, 포스터에 예고편 링크도 걸어두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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