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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과 기독교

과학과 신앙에 대한 다양한 시선  과신뷰 vol.68
주제 칼럼
ChatGPT와의 첫만남에 대한 단상  
글 | 박성준
학부에서 공학을 전공하고 이후 신학을 했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 모색에 관한 논문을 썼고, 목회 현장에서 이를 위해 애쓰고 있다.

ChatGPT?

2022년이 한달도 채 남지 않았을 무렵이다. 습관처럼 페이스북 화면을 쓸어 올리던 중 한 그룹에 공유된 기사가 눈에 띄었다. 기술 동향에 대한 소식을 쫓아가려고 평소 팔로우하던 그룹이었다. ChatGPT라는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한 서비스가 오픈을 했다는 게시물이었다. 인공지능이라는 용어는 예전 부터 들어왔지만 그 성능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서비스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링크를 클릭하고 사이트에 접속한 후 간단한 가입을 마치고 로그인을 하니 입력 프롬프트가 놓여 있었다.

첫인상은 구글 검색 사이트를 처음 보았을 때의 그것과 매우 비슷했다. 구글의 첫인상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새로운 기술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구글 서비스의 론칭 기사를 보자마자 접속해 보았다. 구글 로고 아래 검색어를 입력하는 검색창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단순함은 텍스트와 광고로 도배되어 있는 다른 검색 사이트의 메인 페이지와 확연히 다른 느낌을 제공했다.  그리고 평소처럼 관심 있는 주제로 검색어를 입력해 보았다. 결과는 놀라웠다. 마치 내 의도를 알고 있는 듯한 검색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춘추전국 시대와 같던 검색 시장에 새로운 강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날 이후 내 검색 엔진은 언제나 구글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이제는 모두 구글에서 정보를 얻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게 인터넷 검색은 구글 제국 아래로 평정되었다. 그런데 구글 천하에 또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는 것이다.

 

옛 생각을 뒤로하고 ChatGPT의 입력창에 무엇을 입력할까 잠시 고민하다 첫 단어를 입력했다.  

“그래도 인공 지능이니까… Hi? 정도가 어떨까?

ChatGPT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호기심에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고 그때마다 ChatGPT는 제법 훌륭한 답변을 이어갔다. 구글을 처음 접했을 때의 감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야~ 이것 봐라”

 

목사의 최대 관심 중의 하나인 설교에 활용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이런 요청도 해 보았다.

이어 각 단락의 개요와 주제,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설교문까지 요청을 해 보았다. 물론 그때마다 ChatGPT는 실망시키지 않았다. 실망시키지 않았다는 것보다 놀라웠다는 표현이 더 정직할 것이다. 그러다 문득 좀 더 종합적인 사고가 요청되는 작업을 요청해 보았다. 이런 요청도 척척 처리해 주었다.

“정말 대단한데!”

 

그동안 구글과 같은 검색 엔진을 통한 검색 작업의 경우 다양한 정보를 취합하고 종합하는 것은 결국 검색자의 몫이었다. 검색 결과는 단지 방대한 정보들을 보여줄 뿐이었다. 마치 도서관의 사서는 내가 원하는 책을 찾아 줄 뿐 그 책을 읽고 이해하고 정리하는 것은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사서가 요청받은 자료를 찾아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논문을 써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제 설교 준비로 고생할 일은 없겠군’하는 생각에 얄팍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나 그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교인들이 굳이 내 설교를 들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곧이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제 ChatGPT만 있으면 교인들도 얼마든지 자신들이 원하는 설교를 직접 만들어 낼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어디 그뿐인가. 이미 상용화되어 있는 TTS(Text to Speech) 기술과 아바타 기술 그리고 3차원 홀로그래픽, 가상 현실 기술과 결합되면 예수님의 모습을 한 아바타와 함께 갈릴리 호수에서 산상 설교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그리고 예수님께 직접 질문하고 답변을 들을 수 있다. 신상 상담은 물론 교육, 건강, 법률, 주식 투자 … 이러한 상상에 설마 하는 반문이 곧 이어졌지만 기술적으로 모두 이미 가능한 내용들이다. 누가 알겠는가 BTS의 아미들에게는 예수님보다 BTS의 멤버들의 모습을 한 아바타가 설교를 한다면 더 은혜가 된다고 좋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무슨 세상이 펼쳐지고 있는 것인가?"

 

처음 ChatGPT를 만나 들뜬 마음에 이것저것 시험을 해보며 감탄을 하던 나는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사고력을 갖춘(것처럼 보이는) 인간이 아닌 존재’를 대면한 것이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느낌이 데자뷔처럼 떠올랐다.  그것은 어릴 적 「멋진 신세계 Brave New World」를 읽었을 때 느꼈던 느낌이었다.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은 과학기술이 가져다줄 미래 문명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경계심을 DNA처럼 나의 내면에 자리잡게 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읽었던 조지 오엘의 「1984」를 읽으면서도 미래에 대한 암울한 생각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자유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 Der Wille zur Macht’의 패러디랄까 ‘자유를 향한 인간의 의지’를 나는 믿고 있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죄에 대한 극복 의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주체적 사고 능력을 전제로 하고 있는 믿음이다. 

 

주체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은 인간적 삶을 위해 필수적인 능력 중 하나이다. 주체적인 사고 능력을 가진 인간만이 문제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는 지식, 비판적 사고력, 창의성, 자기반성, 개방성 등이 필요하다.

우선, 지식은 어떤 주제에 대해 충분한 지식과 이해가 있어야만 문제를 해결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할 수 있다. 지식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한 기반 지식이나 특정 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 그다음으로, 비판적 사고력은 주어진 정보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능력이다. 이는 객관적으로 문제를 판단하는 능력으로서, 주관적인 견해나 편견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비판적 사고력은 지식과 이해를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능력이다. 또한, 창의성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새로운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다. 창의성은 기존의 지식과 경험을 활용하여 새로운 아이디어를 도출하는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자기반성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돌아보고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는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하고 개선할 수 있는 능력으로, 문제 해결 과정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개방성은 새로운 아이디어나 견해를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이다. 개방성은 다양한 의견과 관점을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는 태도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러한 조건들이 모두 갖춰져야 인간은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 인간은 이러한 조건들을 갖추고 이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이러한 능력은 개인적인 성공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거나 혁신적인 발전을 이루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한다.

 

ChatGPT와의 첫 만남이 나에게 데자뷰를 불러일으킨 이유는 인간의 주체적 사고 능력이 거세될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예감 때문일 것이다. 이제 인간은 주체적으로 생각할 필요 없이 주체적으로 생각해야만 얻을 수 있었던 결과물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굳이 힘들여 지식을 쌓고, 비판적 사고력을 기르고, 창의적 생각을 찾아 밤을 샐 필요도, 빨간 줄이 그어져 있는 답안지를 보며 반성을 할 필요도 없어진 것이다. 물론 지금껏 인터넷 정보에 의존한 수동적 태도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내가 검색을 통해 보고 있는 정보들은 인간에 의해 수집되고 가공되고 종합된 내용들이었다. 그런데 그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메타버스 공간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아바타의 모습들을 보면서도 적어도 그 아바타의 배후에는 실제의 인간이 연결 되어 있다는 믿음이 존재했다. 아가씨 모습을 하고 있는 아바타에게 다가가서 인사를 하면 실제 주인은 중년 아저씨일지도 모르지만 어찌 되었든 대답은 인간이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러한 신념도 사라지게 되었다. 아바타의 배후에 인공지능이 연결되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인공지능에게 명령해서 수많은 나의 아바타들을 만들어내게 하고 그 아바타들이 메타버스 공간에서 활동을 하게 할 수 있지 않은가. 내가 아바타들을 일일이 관리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인공지능에게 시키면 될 일이다. 어떤 아바타는 의료 상담을, 어떤 아바타는 댄스 가수를, 어떤 아바타는 열심히 주식 투자를 시킬 수도 있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의 커뮤니케이션에 반드시 인간이 매개되고 있다는 믿음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페이스북에 게시물을 올리는 것도 실은 아바타일 수도 있고 거기에 댓글을 달고 좋아요를 누르는 것도 답글을 다는 것도 아바타일 수 있게 되었다. 

 

기계가 인간과 유사한 지능을 가졌는지를 판단하려는 목적에서 기획된 튜링 테스트가 불과 100년도 되지 않아 이제는 이 대답을 기계가 한 것인지를 알아낼 수 있는 테스트가 요청되게 되었다.

 

“과연 이 게시글은 인공지능이 한 것일까? 인간이 한 것일까?”

 

남태평양의 휴양지에서 선셋을 즐기고 있는 동안 나의 아바타들이 열심히 유투브의 슈퍼 챗을 모아 내 계좌로 송금하는 시대가 멀지 않았다면 소설 쓰고 있다고 핀잔을 받을까? 


선교사들이 보급한 근대 스포츠를 보면서 아랫것들 시키면 되지 뭣하러 저렇게 뛰어다니는 지 모르겠다고 혀를 찼다던 조선의 양반들이 떠올랐다. 

 

“뭣하러 밤새 고민해? ChatGPT한테 시키면 되지!”

 

땀 흘리는 일들은 모두 아랫것들에게 시키던 조선은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었다. 주체적 사고능력을 거세 당한 인류가 자신도 모르게 어떤 제국의 노예로 전락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막연한 불안감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과연 인류는 인간으로서의 고유성을 지켜낼 수 있을까. 통장에 잔고만 보장된다면 생각하는 능력을 기꺼이 넘겨주고 배부른 돼지로서의 삶에 행복을 찾지는 않을까? 행복의 정의마저도 ChatGPT에게 묻는 것은 아닐까?

 

미우라 아야코는 소설 ⌜빙점氷點⌟에서 인간에게 삶의 의욕을 포기하게 만드는 특이점 즉, 빙점이 있다고 말한다. 소설 속에서 요코라는 인물은 자신의 유서에서 바로 이 빙점에 도달했다고 고백한다. 이 빙점을 넘어서는 순간 그녀는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제 안에 죄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저는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떤 일을 당해도 저는 결코 마음이 비뚤어지지 않았습니다. 요코라는 이름 그대로 이 세상의 빛처럼 밝게 살려고 한 저는 어머니가 보기에는 화가 날 정도로 배짱 좋은 계집아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요코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힘차게 살아온 요코의 마음에도 빙점氷點이 있었다는 것을. 제 마음은 얼어붙었습니다. 요코의 빙점은 ‘죄인의 자식’이라는 데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 남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작은 어린아이 앞에서도."   - ⌜빙점氷點⌟ 중에서

 

물과 얼음은 그 구성 성분은 동일하지만 액체와 고체라는 상태의 변화로 말미암아 새로운 물성을 나타낸다. 빙점인 0℃를 기점으로 이전과 이후는 완전히 다른 물리적 성질을 갖게 된다. 액체에 적용되던 법칙이 더 이상 고체에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인간 사회에도 빙점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멈출 줄 모르는 직진 본능이 결국 우리를 빙점으로 이끌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 빙점에 도달하는 순간 모든 것이 일순간 굳어져 버리게 되는 것은 아닌지.

 

몇 년 전 한 앵커가 스마트폰의 발전과 그 부작용에 대한 주제의 뉴스를 마무리하며 던진 코멘트가  떠올랐다. 

 

“우리는 어쩌면 삐삐에서 멈추었어야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너무 부정적인 방향으로만 생각이 흐른 것 같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은 언제나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부정적인 측면을 가져다주었다. ChatGPT 역시 두 가지 요소가 모두 존재할 것이다. 긍정적인 측면은 잘 활용하고 부정적인 측면은 주의하자’라는 식의 클리셰로 첫인상을 정리하기가 어려웠다. 지우려 해도 자꾸만 성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마태복음 8:32)


모임 후기
반갑습니다 책.나.모!
- <쿼크, 카오스, 그리스도교>를 읽고
글 | 김화식
사랑의교회 갱신공동체 집사

나의 첫 책나모

책 제목부터 과학 냄새가 풀풀 풍기는 「쿼크, 카오스, 그리스도교」 현대 입자물리학의 내용을 담고 있는 데다 저명한 이론물리학자 폴킹혼이 썼으니, 와~ 이거 읽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쩌면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문고판처럼 책의 두께가 얇다는 점이 도전하는 마음을 주었습니다. 페이스북에서 책나모 광고를 보고 신청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만족도 100%였습니다.

 

저는 평소 과학과 신앙과의 관계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만드셨다."

그렇다면 물질의 근원적인 실체는 어떤 모습이고, 어떻게 작동할까? 물질세계의 종말은 어떻게 될까?  이런 것이 너무 궁금했습니다. 과학과 신앙과의 관계에 대한 목마름은 폴킹혼이 쓴 이 책과 책나모 모임이 해갈시켜 주었습니다. 저의 평소 궁금증을 폴킹혼이 풀어주기 위해 이 책을 저술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 책을 읽는 내내 흥미진진했습니다.

"전자와 같은 물체가 있다고 해 봅시다. 이 물체의 위치를 알면 물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낼 수 없습니다. 반면에 그 물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알면 이번에는 그 물체의 위치를 알아낼 수 없습니다. 이렇게 전자 세계 혹은 양자 세계를 묘사할 수 없어도 그 실재가 있습니다. 그 실재(그것이 하나님이든 물리 세계이든)의 본성이 무엇으로 드러날지 우리는 미리 결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실재 경험 앞에 항복함으로써 그 본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쿼크, 카오스, 그리스도교⌟ 중에서



이것은 폴킹혼이 그 유명한 불확정성 원리와 비결정성 원리를 인용해 입자의 존재와 그 속성을 설명한 부분(이와 같은 입자의 무작위성 뿐만 아니라 분리됨 속의 연대성’같은 개념이 더 있지만)인데 이 부 분을 몇 번이나 곱씹어 읽으며 무릎을 탁~ 쳤습니다.


"와~ 대박!!!"

 

입자는 존재하고 있지만, 그 입자를 콕 집어서 ‘바로 이런 모습이다’라고 묘사할 수 없다고 하지 않은가? 물질을 깊숙이 파헤쳐 들여다보니 그 궁극적 실체가 이렇다고? 물질이 이런 모습이라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게 전혀 이상할 것이 없잖은가! 폴킹혼의 입자물리학 설명에서 저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저 항복합니다!"

 

만물을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명제가 참이라면, 현대 입자물리학의 결과물은 하나님의 솜씨가 어떠한가를 드러내준 것이 아닌가? 물질과 하나님과의 관계, 과학과 신앙과의 관계를 보는 저의 시각을 이번 책나모 모임에서 다시 한번 과학적으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물리적 세계는 우연과 필연이 서로 얽혀 있다는 것, 악의 근원 문제, 과학이 예측하는 우주의 종말과 기독교 종말과의 관계 등등의 이야기는, 다음에 동일한 책으로 책나모를 한다면 그때 다시 참석해, 재음미하고 싶은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번 책나모 모임은 지난 1월 29일에 시작해 4주간 줌(zoom)으로 진행됐고, 20명 정도가 참석했습니다. 저를 포함한 2명은 60대이고, 나머지는 모두 젊은 분들(목회자 4~5명 포함)이었습니다.  젊은 분들이 펼치는 열띤 토론을 듣고 배우면서, 지성이 필요한 한국교회에 그루터기 같은 귀한 분들을 만났다는 감격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진행자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네요 생소한 용어를 네이버에서 검색하며 책을 읽지만 저같이 인문사회과학을 공부한 사람들에게는  쿼크, 카오스와 같은 전문 과학지식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내용 파악 질문 시간에 궁금사항을 묻는 질문에 명쾌하게 답변해 주신 우종학 교수님의 진행도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진행자가 과학자가 아니었다면 정확하고 신뢰할 만한 답변을 들을 수 있었을까? 하는.

 

흥미롭고 유익했던 책, 얇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주는 폴킹혼의 책과  책나모 모임. 다음 모임시간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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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핫 클립 🔥
신앙의 시선 1
편하게 말해보는 다른 관점 교회 이야기
글 | 이상현
더불어숲동산교회 평신도 간사로 섬기며 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일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과학과 신앙을 잘 가르치고자
고민하고 있다.
많은 '젊은 층'이 보수적 기독교 신학만을 유일한 기독교로 경험하고, 기독교의 다른 가능성을 상상해 보지 못한 채 10대 후반~20대 초반에 '기독교'를 믿는 일을 포기해버린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기독교를 포기할까? 내가 경험한 바로는 먼저 종교적인 질문에 관한 뻔하고 답답한 보수적 기독교의 비과학적인 답안들이 일단 기독교에 대한 매력을 떨어뜨린다. 그리고 얼마 후 보수적 기독교 신학이 만들어내는 인간관계 속 정죄를 경험하고는 기독교를 최종적으로 떠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보수 신학은 당연히 '진정한 보수' 신학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 중 성서무오주의에 심하게 매료된 사람들은 자신의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성경 이해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마저 있다. 그리고 때로는 그러한 편협한 이해를 주변 사람들에게, 심지어는 주일 학교에서 청소년들에게 가르치기도 한다.

나는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이기 때문에 이 시기의 청소년들이 경험하는 일들이 그들의 자아에 미치는 영향을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청소년들, 청년들이 별다른 깊은 생각 없이 학교나 교회를 다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연히 청소년과 청년들은 매 순간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깊은 의문을 던지며 살아가고 있다. 사람에 따라서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정도는 다 다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크리스천 청년, 청소년이 당면한 세계는 현대 세계인데 한국교회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보수적 기독교의 답안은 너무 중세적이고,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마지막으로 혐오적이다.


예를 들어 어떤 한 청소년이 학교에서 과학 시간에 우주의 생성과정에 관해 배우면 창세기의 내용에 관해 의문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어른들은 이러한 의문에 대해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무언가를 답변해 주더라도 유사과학 차원의 믿을 수 없는 증거를 답이라고 내어놓는 경우가 많다. 어른 한 명의 말이라면 어찌어찌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청소년들의 불편한 마음에 한국교회는 여지없이 쐐기를 박고 만다. 청소년 예배나 청년 예배에서 창세기를 다룰 때 현대 과학인 진화, 지질학, 천문학을 모두 부정하는 창조과학 강사를 부르거나 창조과학의 황당한 동영상을 인용하면서 말이다. 특히 대형교회에서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나는데, 청소년들에게는 대형교회가 기독교를 대표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정말 위험하다. 강사의 강연과 동영상이 워낙 자극적이다 보니 청소년이나 청년들은 웃기도 하고 순간적으로는 즐거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 강연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청년과 청소년은 거의 없다. 이 상황에서 특히 그 청소년이나 청년이 이과 출신인 경우, 그는 기독교에 진절머리를 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를 기억하는지? 그 순간 이후 그들에게 크리스천이란 바로 그 사람과 다름 아니게 되는 것이다. '언젠가는 그러한 것이 궁금해지지 않는 순간이 온단다.'와 같은 말로 은근히 그 청년이나 청소년의 불신앙을 지적하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온전한' 신앙을 자랑하는 경우도 있다. 그 경우 그 청년이나 청소년은 정말로 금방 그러한 것이 궁금해지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다. 왜냐면 그 답을 듣고는 기독교를 아예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의문들이 '세계관'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면, 한편으로 청소년과 청년들은 '인간관'에서도 기독교적 입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주로 청소년과 청년의 관심이 대상이 되는 것은 동성애자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이다. 정체성과 성이 청소년기의 주된 고민거리라는 점에서 이 관심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이미 세계보건기구(WHO)에서 30여 년 전에 과학적 발견으로 동성애 성향이 정신질환 목록에서 빠졌음에도 보수 기독교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왜 동성애자가 죄인이에요?"라고 묻는 질문에 보수 기독교인들은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으니까."라고 제시한다.


그 순간 기독교인들은 청소년과 청년에게 혐오주의자가 되고, 성경은 혐오주의를 조장하는 책이 된다. 한 술 더 뜬 사람들은 어디서 들은 '전환 치료'같은 것을 이야기하면서 기독교적 정신 치료를 받고 동성애에서 이성애로 돌아온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청소년이나 청년은 그 얘기를 해준 어른보다 보통 인터넷 검색을 더 잘 한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들은 '전환 치료'를 인간에 대한 심리적 학대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전환 치료 피해자 모임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며, 오히려 동성애 혐오자에 관한 정신건강 연구야말로 과학적인 연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과학에서 이미 '밝혀진 것'조차 거부하고, 얼마나 '맹목적'인 믿음을 가졌는지 서로 경쟁하고, 혐오주의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실천하기까지 하고,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똘똘 뭉쳐 있는데 심지어 젊은 사람까지 적으며 최근에는 정부의 방역조치까지 지키지 않아서 주변에 실질적인 피해까지 준 집단. 이것이 냉정히 평가한 청소년과 청년이 바라보는 기독교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회 안 나가면 부모님이 슬퍼하니까 교회를 나오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교회 다니는 것 들킬까 불안하면서도, 착해서 몰래 효도하는 마음으로 나오고 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 것이다.


국어를 가르치는 고등학교 교사의 입장에서도 한국교회의 이러한 납작한 성경관은 참으로 답답하다. 예를 들어보자면, 단군신화 이야기를 말할 수 있겠다. 학교에서 단군 신화를 가르칠 때 당연히 그 이야기를 '곰과 호랑이가 인간이 되는 법'에 대한 과학적 사실로 가르치지 않는다. 아마 보수적인 신학을 가지신 분도 학교에서 국어 선생이 단군신화를 가르치면서 '곰과 호랑이가 마늘과 쑥을 먹으면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자기 자식에게 진지하게 가르치면 화를 낼 것이다. 단군 신화의 가치는 우리 민족 이념인 홍익인간, 즉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것에 있는데 그 사람은 국어선생이라는 사람이 그것도 모르냐면서 말이다.

 

한편 우리 고전 문학에서 <박씨전>이나 <홍계월전>같은 유명한 여성 영웅 소설을 가르칠 때도 시대적 배경이 워낙 옛날이다 보니 현대의 성인지 감수성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성차별적인 장면들이 나온다. 심지어 주인공인 여성의 행동마저도 현대인들에게는 여성 혐오적으로 느껴질만한 점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몇몇 장면이 그 소설에 문자적으로 존재한다고 해서 전체적인 줄거리에서 명백하게 보이는 '여성 인권의 성장'은 절대로 감출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만약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지엽적인 부분에 집중하여 여성 영웅 소설의 여성관을 왜곡한다면 나는 그 텍스트를 잘못 가르치는 것이며, 진정 중요한 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과학을 어느 정도 공부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어쩌면 구체적인 내용들이 잘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어 선생으로서 바라건대, 우리는 최소한 성경이라는 책과 과학이라는 책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다. 단군신화와 마찬가지로 창세기는 지구와 생물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해주는 책이다. 또한 여성 영웅 소설과 마찬가지로 성경은 적혀있는 그 '글자'보다도 명백하게, 엄혹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도 동시대의 가장 고통받고, 천대받고, 차별받는 이들을 누구보다 사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책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이 이대로 계속 방치되고 해결되지 않는다면, 아마 기독교는 '소종파'가 되고 말 것이다.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우리나라에 기독교를 크게 일으켰지만, 그 '이후'가 없었다. 크게 일어났다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는 기독교 말고도 종교가 크게 일어난 적이 꽤 있다. 하지만 그들 중 다수가 소종파가 되고, 결국에는 없어져 버렸다. 기독교가 점점 소수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무서운 현실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요새 교회 다니는 ‘젊은 층’ 중 거의 대부분은 가족 전도로 조부모에서부터 자식까지 신앙이 이어진 사람들이다. '저희 집안은 3대째 기독교예요.'라는 말. 얼마 전까지는 분명 부럽고 존경스러운 말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럴 때엔 무서운 말이다. 점점 기독교가 '게토'가 되고 있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해결할 방법을 모두 함께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먼저는 다양한 이야기와 입장이 교회에서 자유롭게 논의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성도들끼리 조금 새로워 보이거나 들어본 적 없는 입장도 충분히 논의될 수 있는 안전한 공론장이 필요해 보인다. 논의의 과정 속에서 청소년들이 떠올리는 생각들 이 구체적으로 발전될 수 있도록 어른들이 먼저 성경과 과학을 보는 관점을 배우고 전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현대의 주류 과학을 수용하면서도 기독교를 잃지 않을 수 있는 관점의 공유는 정말로 시급하다. 이공계열 학생의 기독교 이탈이 정말 심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청소년과 청년의 의문은 그때부터는 '불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스럽게 성경을 바라보는 성숙한 시각을 가르쳐 주는 열쇠가 되어 줄 것이다.


부디 기독교가 현대 세계와 화해하고, 그 화해가 청소년과 청년에게도 전해지길 바란다. 우리가 성숙한 답을 가지게 된다면, 기독교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내일을 청소년과 청년에게도 자랑스레 물려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너무나 크기 때문에 나는 지금도 희망을 갖는다.

신앙의 시선 2
"Sapere aude!"(사페레 아우데, 알기를 감행하라)
- 아묻따에서 대화로

글 | 최승주

생물학을 전공하고 고려대 세종캠퍼스에서 교양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현재 과신대 감사와 이사로 섬기고 있다.

여정의 시작 - 준비되지 않은 갈등

오늘 저의 신앙의 여정을 짧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때 생물학을 전공했던 저는 과학과 신앙 사이 어딘가에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고민을 해왔습니다. 과학과 성경을 해석하는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내가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잘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꽤 젊은(?) 나이에 <진화는 과학적 사실인가?>라는 책을 통해 창조과학을 접했습니다. 지금도 이 책을 가지고 있는데요, 첫 장을 펼치니 "94. 10. 1. 아빠가"라고 메모가 되어 있습니다. 합동 측 목사인 아버지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과학으로 증명이 된다는 근사한 사실을 고등학생 딸에게 소개해 주고 싶었을 겁니다(나라도 그랬겠지요). 바람대로 나는 창조 세계를 들여다보는 과학도가 되고자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했습니다.

문제는 그때부터였습니다. 당시 한국교회에 영향을 준 창조과학은 젊은 지구론을 중심으로 한 것이어서 나의 텍스트북과는 충돌이 불가피했습니다.  종속과목강문계를 외우면서도 이건 시험을 위한 것일 뿐이라고 되뇌이며 동물분류와 식물 분류, 유전학, 면역학, 세포학과 같은 전공과목을 공부하는 내내 오류가 있는 내용을 배울 필요가 있을까? 하는 내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창조과학 강의를 열심히 쫓아다니고 관련 책들을 읽었지만 과학과 신앙의 괴리는 커져만 갔습니다. 학교 안에 창조과학회에서 활동 중인 교수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짐을 함께 나눌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초보 생물 학도는 설익은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채 결국 그 업계(?)를 떠나고야 말았습니다.

 

어쩌다 분리

나의 학문의 여정은 이학사로부터 시작해서 국제 보건학을 거쳐 인문학에서 최종 마무리됩니다. 과학자를 꿈꾸며 거친 실험실 생활도 즐거이 했던 나였지만 자연과학으로부터 점점 멀어졌습니다. 한때 화해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국제협력의사로 방글라데시에서 봉사하는 남편과 함께 외국 생활을 하던 중에 국제 학교에서 과학 교사로 자원봉사를 하면서 창조과학을 기초로 하는 미국의 과학 교과서를 교재로 활용한 것이지요.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프로젝트 수업을 진행하면서 성경이 과학으로 증명된다는 가르침을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학생들에게 얼마나 미안한지 모릅니다. 어색한 화해의 시기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학생들에게 ‘억지 과학’을 강요하는 것이 편치 않았던 것은 당연합니다. 이후 최근까지 자연과학은 나에게 미전도 종족과 같은 존재로 남아 있었습니다.

 

아묻따에서 대화로

과학과 성경의 부조화에 대한 고민은 새로운 국면을 맞습니다. 과신대를 만나면서 갈등의 이유를 찾게 되었으니, 그간 나는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생물학을 전공하고 창조과학회에서 강사 교육까지 받았던 믿음 좋은 쌍둥이 동생도, 단지 의사라는 이유로 교회에서 창조과학을 가르쳤던 나의 남편도 모두 나와 같은 아묻따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과신대에 발을 디디자 깊숙이 묻어두었던 질문들을 꺼내면서 낯 뜨겁지 않을 용기도 생겼습니다. 자연과학과 결별한 지 20년이 훌쩍 지났지만, 우종학 교수, 이상희 교수, 이정모 관장 등 하나님이 창조주 이심을 고백하면서도 과학자로 살아가는 분들의 글과 강의를 만날 수 있게 된 것도 참 좋았습니다. 우리 쌍동이 자매의 다섯 아이들은 과학에 관심이 많은 십대로 자라 과신대 청소년 캠프에 참석한 적도 있습니다.


과신대와 앞으로도 함께 하고 싶은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먼저, 과신대는 아묻따 그리스도인들을 환대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 청장년들을 대상으로 나의 과학 여정을 설명하고 과신대를 소개할 기회가 몇 번 있었습니다. ‘창세기는 과학 책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이들의 표정이 얼마나 당혹스러웠는지 잊을 수 없습니다. 지난겨울 캐나다 여행 중 만난 80대 할아버지 아론처럼 지구의 나이는 6천 년이어야 한다고 굳게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여전히 있습니다. 과신대가 젊은 지구론에 경도된 그리스도인들이 낯 뜨거운 질문조차도 마음껏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 자녀 세대가 미전도 종족처럼 내버려진 현대 과학 분야에 마음껏 뛰어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우리 자녀들은 노아의 홍수가 지구를 덮은 궁창 때문이라는 주장에는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이들은 오히려 인간의 능력을 크게 앞지르며 발전하는 인공지능, 진화생물학에서의 새로운 발견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과신대가 차세대 교육에 보다 많은 에너지를 쓸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고 싶습니다.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던 그리스도인들이 대화할 수 있는 그날까지...

안녕하세요!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서 새롭게 행정팀장을 맡은 박아론입니다. 과신대 활동을 멀찍이 지켜보는 구경꾼에서 직접 뛰는 사람이 되니 기분이 묘합니다. 이제 너에서 우리가 되어 ‘너’의 문제와 목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이자 목표가 된 것 같습니다. 행정팀장으로 일하면서 회원님들과 함께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나가겠습니다.


특별히 과신대가 안으로는 반(反) 지성 주의의 흐름에 맞서고 밖으로는 신 없음의 시대에 여전히 우리가 믿는 신앙이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보이는, 기독교 지성의 등불 사명을 감당하는데 이바지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안으로든 밖으로든 해야 할 대답을 준비하고 항상 겸손과 정직함으로 때를 따라 얻던지 얻지 못하던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를 통해 잘 흘러가기를 소원합니다.

 

아직까지  부족하지만 빠르게 적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많은 격려와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박아론 올림

이 달의 소식 ✉️

 

1. 과신뷰 새 단장

지금까지 정비 시간을 가졌던 과신뷰도 새롭게 장단하고 있습니다. 김양현 편집장님을 필두로 많은 분들의 참여로 참신하고 깊은 생각들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그리고 플랫폼도 새롭게 꾸미게 되었습니다. 많은 피드백과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2. 5년 이상 장기 후원회원 감사

단체가 벌써 시작된 지 7년이란 세월이 지났습니다. 회원님들의 변함없는 지지와 애정 어린 관심 덕분에 지금까지 과신대가 달려올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랑에 미약하나마 보답하고자 5년 이상 장기 후원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표현을 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매년 5년 차 이상이 되신 분들께도 감사 인사를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3. 책나모 / 하이브리드 핵심과정(신학)

봄바람을 타고 과신대도 기지개를 켜고 있습니다.  움츠러들었던 몸과 마음을 깨우고 다양한 강연과 모임으로 회원님들에게 찾아가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책나모와 하이브리드 핵심과정에서 오프라인 모임을 조금씩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책모임 소식을 먼저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총 21분이  장재호 교수님과 함께 존 호트의  <과학시대의 신앙>이란 책으로 3. 6.(월) ~ 4. 24.(월) 동안 책나모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있을 2번의 오프라인 세미나에도 많이 참여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책나모는 이후에도 계속 진행될 예정입니다. 지금 신청하지 못하신 분들도 다음에는 같이 참여해 주세요!

 

하이브리드 핵심과정(신학)도 3. 7.(화) ~ 4.25.(화)까지 진행하고 있습니다.  총 19분이 수강 신청을 하였습니다. O.T는 우종학 대표님이 창조론에 관한 다양한 시각들에 관한 강의를 해주셨고, 각자 돌아가면서 신청 동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수강생분들의 깊은 관심과 귀한 동기를 나눌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끝까지 좋은 배움의 시간이 되길 바라겠습니다.

 


4. 과신대 북클럽/교사모임/목회자모임

  • 북클럽 :  지역 북클럽이 다시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참여를 희망하시는 정회원님들께서는 언제든 사무국으로 연락 바랍니다. 북클럽의 최근 소식은 홈페이지페이스북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교사 모임 : 교사 모임은 지난 2월 이문원 교수님과 함께 한탄강 지질 탐사를, 3월에는 청소년 교재 개발과 수업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현직 과학 교사들과 교회학교 교사들이 함께 다음 세대를 위한 과학-신앙 연계 교육을 연구하는 교사 모임에 참여해 보세요! 과학 교육 커리큘럼과 노하우를 나눌 수 있습니다.

  • 목회자 모임 : 목회자 모임은 3-5월 동안 존 호트의 『과학 신대의 신앙』을 읽을 예정입니다. 과학 정보를 어떻게 이해하고 소통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하는 목회자 모임에 참여해 보세요! 다양한 사역 현장의 경험을 정서적, 실천적 교류를 통해 나누고, 함께 공부하고 있습니다.



5. 2023년 2월 재정 보고
이번 달 재정은 수입 6,798,063원, 지출 6,973,315원입니다. 
여러분의 든든한 후언 덕분에 이번 달도 과신대 사역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세한 재정 보고는 링크를 클릭해 주세요. 


님과 소통하며 <과신뷰>를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이달의 과신뷰를 어떻게 읽으셨나요?

과신대 편집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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