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tter from London
A Letter from London
Letter#3
2020.4.14

장 보러 가는 길
무작정 일단 쓰고 보자는 마음으로 쓴 편지이니 분명 두서없는 글이 될 것이란 비겁한 변명으로 식상하게 시작합니다. 정말 어이없지만 이 글에서 두 번째 문단부터 갑자기 반말합니다. 편지는 항상 손글씨로 쓰고 옮기는데 손이 아프니 한자라도 덜 쓰려는 뻔뻔한 잔머리입니다. 

살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소비의 기준이 된 요즘이다. 필요한 것 중 “필수”한 것을 골라낸다. 달달한 초콜릿과 짭짤한 과자도 쌀과 파스타에 밀려 장바구니에 담기지 못했다. 이 명백한 기준 앞에서 토마토를 밀어내고 나의 선택을 받은 것이 커피다.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주전자에 물을 끓인다. 나경이가 피난 가듯 런던을 떠나면서 넘겨준 프렌치 프레스에 원두 두 스푼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 촉촉한 커피 가루가 뿜어내는 향이 부엌을 채우는 동안 남은 뜨거운 물로 잔을 데운다. 저녁에 쌓아두었던 접시를 정리하고 창문을 열어 아침 공기로 세수를 하고 나면 딱 마시기 좋은 상태이다. 하루에 허락된 한 잔을 컵에 담는다. 집에서나 일터에서나 온종일 커피를 마시던 나는 커피 향이 가득한 그 순간, 이 부엌이 아무 일도 없었던 평소 같다. 코의 감각이 무뎌지기 전, 아주 잠깐. 

어제랑 엊그제처럼 알람도 없이 눈이 떠진 그 날 아침, 또 커피를 만든다. 다를 게 없던 아침이었는데. 주전자의 뜨거운 물을 프렌치 프레스에 부으려고 주전자를 들어 45도로 기울었을 때 미세한 물리적 삐걱거림을 느낀다. 설명할 수 없는 과학적인 이유로 주전자의 물은 프렌치 프레스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다음에 일어날 일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김이 펄펄 나는 물은 파도처럼 내 손등을 덮쳤다. 흐르는 찬물에 손을 식혔지만 이미 늦은 것 같다. 피부에서 열을 빼내야 한다는 데 역시 주는 건 쉬워도 뺏는 건 어렵다. 살을 울리는 쓰라림에 놀라 숨이 턱 막힌다. 호흡이 짧아지니 정신이 혼미해진다. 숨을 쉬어야 한다! 

코로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통증이 찾아올 때 맞춰 입으로 깊게 내쉰다. 어려서부터 여기저기 아픈 데가 많아 참아야 할 때 해왔던 방법이다. 아파서 놀란 몸은 겁에 질려 숨 쉬는 것을 까먹을 때가 있다. 그때 의식적인 호흡으로 몸과 마음을 안심시켜야 한다. 살아있으니 정신 차리라고 찬바람을 펌프질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매일 살아있으면서도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때는 따로 있듯이 숨 쉬는 것도 멈춰지고 나서야 멈추지 말아야 하는지 안다. 

 그동안 기력도 무기력도 없이 시간만 소비하는,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던 여러 날이 손을 데고 나서야 당연하지 않아졌다.  
오늘은 침대에서 나오고 싶지 않아 시간을 끌었던 때마다 보고 듣던 것을 몇개 적어봅니다.

Klara Lidén, Grounding (2018)
Timothée Calame2016년 전시에서 시작된 Kino Süd는 아티스트 필름을 상영하는 온라인 플랫폼입니다. Kiara Lidén 계속 넘어지고 일어나는 영상을 보고 있으니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합니다. 저렇게 넘어지는 잘하다니 감탄하다가도 괜히 무릎이 쓰라리기도 합니. 현실에서 의지도 저렇게 넘어졌다 일어나는 아무렇지 않게 잘하면 좋겠다고 상상합니다.

지구를 돌리면 커서가 도착한 다른 나라의 라디오를 훔쳐 들을 있는 웹사이트입니다. 한국 라디오가 듣고 싶어 서울을 찾아갔지만, 채널이 개밖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Aphex Twin – Printworks, London 14/09/19
이사를 한 9월 2주 동안 집에 와이파이가 없어서 10년 만에 런던 클럽 공연을 한 Aphex Twin의 라이브 스트림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잊고 있었는데 이때다 싶어서 찾아 본 공연입니다. 믹스보다 앨범 듣는 것을 더 좋아하지만, 공연 영상을 보면 Weirdcore가 만든 정신 산만한 프로젝션을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유치찬란한 아이디어도 복잡한 기술도 같은 태도로 실현하는 Weirdcore의 배짱과 집념이 좋습니다. 

Joanna Hedva – Get Well Soon
평생을 만성질환 시달리는 작가 Joanna Hedva 병과 혁명에 관해  글입니다. 병과 혁명은 형태는 다르지만 같은 결의 언어를 가지고 현재라는 시간과 싸우는 행위라고 말합니다. 병의 치유와 혁명이 사실 머리와 꼬리가 서로 붙은 우로보로스일 것이라고요.
In care, we know our limits because they are the places where we meet each other. My limit is where you meet me, yours is where I find you, and, at this meeting place, we are linked, made of the same stuff, transforming into one because of the other.”

정말 기운이 없을 땐 미국의 코미디언 Amy Sadris의 보물같은 인스타그램 피드를 하나씩 넘겨봅니다. 쓸모없겠지만 잊고 싶지도 않은 사진들로 가득합니다. 

+++++++++추억의 명곡 세 번째+++++++++
저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왔습니다. 길을 걸으며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무엇인지 아시나요?
힘들다진짜 힘들다너무 힘들다…”
입니다. 하루에 4만보 정도를 배낭을 메고 걷는다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산을 넘고, 때로는 위험한 도로 옆도 지나고, 목줄 없는 개들을 만나 무서움을 느끼기도 했던
온전히 다리로만 산티아고 대성당을 향해 가는 여정이 그리운 왜일까요?
행복은 지금 순간 내딛는 걸음 걸음에 있다는 알게 되어서 일까요?
, 행복은 정말 멀리 있지 않을 거예요. 길에서, 신체적 한계에 부딪혔을 들었던 노래입니다.


(ps. 테크노에 맞춰 걸을 걸어져요…)
From DJ나경..
A Letter from London Archive 에서 지난 편지를 볼 수 있습니다. 

박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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