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친배우미, 안녕하신가요?
벌써 3월이 코앞이에요. 봄이 오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더 놀라운 사실은 ‘마친배우미’ 소식이 이번으로 스무 번째가 되었답니다. 그래서 특별한 마친배우미를 모셨어요. 더배곳 1기로 들어와 지금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발히 일하는 민영(양민영)입니다. 민영은 졸업 작업을 발전시킨 잡지 프로젝트인 《COOL》을 발행하는 불도저 프레스의 대표이자, 여러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이면서, 다양한 클라이언트 잡을 소화하는 불도저의 디자이너랍니다. 바쁜 스케줄 와중에 아침 10시에 만나 대화를 청해보았어요. 민영의 이야기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민영, 정말 반가워요! 저희 진짜 오랜만에 보는 거 같아요.

그러게요! 제가 참여했던 더배곳 졸전에서 본 후로 처음인 듯해요.

와. 그러면 그때가 언제죠?

제가 더배곳 1기니까…아마 2014년이겠네요. 정말 오래전이에요. 저도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 걸 몰랐어요. 한 2년 전에 졸업한 느낌이거든요. 그냥 나이를 먹으니까 1년이 금세 지나더라고요. 어른들이 들으시면 화내시겠지만요. (웃음)

저도 동감해요. 근데 제게는 민영이 낯설지 않아요. PaTI 졸업 이후에 워낙 왕성하게 활동해서 그런지, 여기저기서 민영의 작업과 크레딧을 봐서 그런가 봐요. 

방금 그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까, 지난 시간을 굉장히 열심히 산 것 같긴 해요. 제 생각일 수도 있지만요. 하하. 제가 원래 하나만 하면 질리는 스타일이라, 되게 이것저것 많이 했거든요. 그런 걸 돌아보면 재미있죠.

그럼 이것저것 무엇을 했을까요? 제가 아는 것도 있지만 민영에게 직접 듣고 싶어서요.

PaTI를 졸업하고 김영나 디자이너가 운영하는 디자인 스튜디오인 ‘테이블 유니온’에서 1년 정도 일했어요. 그 후 독립해 지금은 프리랜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며 먹고 살고 있죠. 졸업 이후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자체적으로 시작했는데요. 먼저 옷을 주제로 삼는 잡지 《COOL》을 계속 만들고 있어요. PaTI 졸업 작업의 일환으로 준비를 했고, 졸업 후에 1호를 냈는데요. 이제 작년 겨울에는 6호를 발간했답니다. ‘옷정리’도 같은 시기에 시작했던 것 같아요. 옷정리 첫 번째를 커먼센터에서 진행했는데, 그때 《COOL》 1호를 처음 팔았던 게 생각나서요. 옷정리는 제가 입지 않던 옷을 판매하는 행사로 시작해 1, 2회를 보냈고, 3회부터는 여성 창작자들과 합심해서 입지 않은 옷을 판매하는 행사로 커졌어요. 매년 진행한 터라 작년에 벌써 7회가 됐어요. 주로 옷에 대한 프로젝트에요.

PaTI 더배곳 졸업전시 전경, 2014
《COOL》 1호 ‘UNIFORM’, 2015
옷장 속 안 입는 옷을 정리하는 행사 ‘옷정리’는 2015년 커먼센터를 시작으로 매년 이어오고 있는 연례행사로 자리잡았다.
사진은 2019년 문화역서울284 TMO에서 열렸던 ‘옷정리5’ 행사 모습.

자체 프로젝트를 생각보다 많이 하고 있네요.

졸업하고 바로 테이블 유니온으로 들어가 일을 한 게 아니라서 자체 프로젝트를 생각할 시간이 있었어요. 시간이 있을 때 시작을 했죠. 어떤 하나를 진득하게 하는 게 질리는 성격이란 걸 스스로 잘 알기 때문에 일부로 개인 프로젝트는 시리즈 형식으로 기획했어요.

민영은 스스로 프리랜서 그래픽 디자이너라고 소개했지만, 제가 알기론 불도저 프레스라는 엄청난 이름의 스튜디오 대표라고 알고 있어요.

불도저 프레스는 《COOL》을 출판하기 위해 ISBN이 필요해서 1인 출판사 등록을 하면서 만든 이름이에요. 그 이름을 짓는데 고민이 무척 많았어요. 약간 치기 어리게 들릴 수 있는 이름이라서요. 2-3년 하다가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질 것 같은 이름들 느낌이 났거든요. 그래서 다른 이름으로 할까도 생각을 해봤는데, 두 가지 중에서 우유부단하게 고민하는 게 더 답답해서 그냥 불도저 프레스로 정했어요. ‘삶은 이름을 따라간다’는 미신 아닌 미신을 믿으면서 불도저 프레스를 시작하게 됐죠. 사실 엄밀히 말해 불도저 프레스는 출판사 이름이라서, 제가 디자인한 작업을 밖에 내보낼 때는 ‘불도저’라고 크레딧을 써요. 사소한 구분이지만 저는 구분해서 쓰고 있어요. 주로 불도저 프레스로 알고 계시는 경우가 많지만요.

삶은 이름을 따라간다는 말에 동감합니다. 실제 불도저처럼 디자인계를 누비고 다니니까요. 2017년인가 《월간 디자인》에서 매년 선정하는 ‘지금 주목할 만한 디자이너’ 리스트에 민영과 예주가 동시에 나와서 깜짝 놀란 적이 있어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매체를 타게 됐을까요?

제가 냉철하게 분석해보면, 이건 다 김영나 디자이너와 일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그와 함께 일하면서 업계에 있는 분들이 제 존재를 다른 사람에 비해 더 일찍 인지할 수 있었다고 봐요. 제가 엄청나게 잘 해서라기 보다는 객관적으로 보기에 그렇습니다. 근데 또 나중에 보니까 모든 사회가 그렇게 돌아가더라는…

너무 냉철한데요. (웃음) 민영에게서 굉장한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래요! 민영에게 혹시 불도저 프레스 혹은 불도저로 활동하면서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를 꼽아보면 어떤 게 있을까요? 예컨대 인생 프로젝트?

이런 질문이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어떤 한 프로젝트가 굉장한 의미를 갖기 보다, 자체 프로젝트와 클라이언트 잡을 번갈아 가며 진행하는 과정이 리프레시도 되고 서로 굉장히 좋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요. 처음부터 의식적으로 밸런스를 맞추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어요. 인생 프로젝트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말이 과하고, 제게 의미가 깊었던 프로젝트를 생각나는 대로 얘기해본다면 좀 더 편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재미있었다고 얘기하는 프로젝트를 보면 보통 자체 프로젝트이거나, 클라이언트 잡일 경우 자유도가 높은 작업이 대부분이더라고요. 얼음 모양의 포스트잇 작업도 생각나고, 시원한 느낌의 냉면 티셔츠도 잊을 수 없죠. 《커피 사회》 전시에 출품했던 〈OASIS〉 작업, 《호텔 사회》 전시에 출품했던 〈휴休스파〉처럼 작은 아이템부터 공간까지 기획 및 디자인한 작업도 재미있었어요. 성수동에 위치한 인덱스가 오픈했을 때 포스터 숍이 열리는 걸 기념해서 포스터 전시를 한 적이 있는데요. 그때 출품했던 포스터도 기억에 남아요. 일명 ‘사라 포스터’라고 붉은색 배경에 ‘Sarah Poster’라는 흰색 글자를 대문짝만하게 배치한 포스터인데요. 액자에 넣어 공간 입구에 가훈처럼 설치되었어요. 서점 공간에 들어가는 사람에게는 마치 ‘포스터를 사라’고 명령하듯 읽히는 식으로 작동했고요. 포스터를 서점에 전달할 때만 해도 이 정도의 효과를 기대하지 못했는데, 어떤 디자인이 특정 맥락과 공간에 배치되었을 때 이렇게 작동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는지를 체감한 작업이었죠.

《커피 사회》 전시에 출품한 〈OASIS, 문화역서울284, 2018
Sarah Poster, 인덱스, 2017 (사진: 신병곤)

이런 프로젝트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요?

일단 자유도가 높다는 게 특징이고요. 무엇보다 콘텐츠를 보는 시각과 태도를 바꿀 수 있고, 개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제가 즐거웠다고 기억하는 듯해요. 이런 프로젝트는 어렵지 않고 위트 있게 볼 수 있고, 더불어 A를 A라고 단선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볼 수 있도록 질문을 던지는 것에 가깝죠. 그런 면에서 보자면, 클라이언트 잡 중에서도 무척 재미있는 것들이 있었어요.

너무 궁금한데요.

지금 떠오른 건, 《서울인기》라는 음악 페스티벌 포스터 작업이에요. 서울 난지한강공원에서 열리는 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일종의 종합문화축제로, 공원에 다 같이 소풍 나온 느낌의 페스티벌이에요. 서울인기의 영문명은 ‘Seoul Soldout’인데요. 이름부터가 되게 재미있죠. 저도 몇 번 《서울인기》를 갔던 경험이 있고 각종 한국 인터넷 짤과 밈을 이용해 행사를 홍보하는 점이 재밌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2019년에 행사 포스터 의뢰가 들어온 거죠.

《서울인기》 포스터 작업, 2019

《서울인기》 포스터는 어떤 면에서 흥미로웠나요?

사실 《서울인기》 행사에는 두 가지 주적이 있어요. 바로 매미와 모기예요. 여름에 열리기 때문에 모기가 득실거리고, 매미 우는 소리가 정말 커요. 저는 이런 게 《서울인기》의 재미있는 특징이라고 생각했어요. 매미 소리가 제일 크니까, 이 페스티벌의 메인 라인업은 어쩌면 매미 아닌가 생각이 든 거죠. 모기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시원한 물줄기를 그래픽으로 풀어낸 ‘서울인기’라는 타이포그래피를 중심으로 배경에 커다란 매미와 모기를 집어넣었어요. 시안을 처음으로 주최 측에 전달했을 때 행사의 단점으로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을 드러내고 강조하는 방향이다 보니 아무래도 살짝 우려를 표명하셨어요. 하지만 막상 매미와 모기를 빼니까 재미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결국은 매미와 모기가 주인공인 포스터가 그해를 장식했죠.

포스터를 직접 보니까 웃음이 빵 터지네요. 민영의 작업 스타일이 잘 드러나는 것 같아요. 오늘 인터뷰는 월요일 아침 10시에 시작했어요. 굉장히 부지런한 스케줄인데요. 민영의 1주일은 어떻게 돌아가나요? 

지금은 연초라서 작년 말보다 엄청 바쁘진 않아요. 대신 이번 주에 인쇄를 넘길 게 하나 있어서 마음이 먼저 바쁜 그런 상태랄까요. 저도 아침잠이 많아서 자발적으로 아침 일찍부터 일과를 시작하는 게 거의 불가능해요. 근데 또 타인과 약속을 잡으면 어떻게든 일어나서 맞추더라고요. 그래서 월요일 시작을 일찍 해보자는 마음으로 아침 10시에 인터뷰 약속을 잡는 용기를 보였어요.

지금까지 많은 일을 쉼 없이 이어왔는데 혹 워라밸이 깨지진 않았나요?

일이 몰릴 때는 확실히 워라밸이 안 좋죠. 일이 적을 때는 몸이 건강해지고요. 하지만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더 높아지는 것 같아요. 왜냐면 일이 없으면 생계를 걱정해야 하니까요. 대신 일이 많을 때는 작업에 몰두하느라 몸 구석구석이 쑤시죠. 결국 프리랜스 디자이너의 숙명 같아요.

디자인 매거진 《CA》 리뉴얼 작업, 2018-2019

프리랜스 디자이너로 일한 지 5년이 훌쩍 넘었는데 자기 자신을 어떻게 관리하나요?

관리라니…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네요. (웃음) 제가 언젠가 계간 《그래픽》에서 ‘1인 디자인 스튜디오 특집’을 할 때 저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회사 조직도를 보낸 적이 있어요. 불도저 프레스와 불도저를 분리하고, 자체 프로젝트와 클라이언트 잡을 하는 부서를 따로 잡았죠. 거기에는 프로젝트 매니저, 디자이너, 회계 관리자, 홍보 마케팅, 포트폴리오 관리하는 인력들이 필요했는데요. 결과적으로 전부 저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이게 전부 잘 돌아가는 건 정말 힘든 일 같아요. 회계도 누가 해줬으면 좋겠고, 디자인도 누가 해줬…하하. 예전엔 미처 몰랐죠. 프리랜서가 이렇게 힘든 일인지.

그런데도 회사에 들어가지 않고 지금의 삶을 지속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일단 제 나이와 경력으로 어딘가에 취직을 시도한다는 게 굉장히 비현실적으로 다가와요. 보통 구직공고를 보면 디자이너는 경력 2-3년 차를 선호하더라고요. 완전 초짜도 아니면서, 회사에서 일을 배워가며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이 디자이너 고용 시장에서 생각하는 최적의 대상인 것 같아요. 게다가 한국에서는 장유유서 문화가 남아있어서, 후임이 선임보다 나이가 많으면 아무래도 부담스러워하는 경우가 많죠. 근데 사실 다 핑계고요. 큰 회사가 저를 고용하지도 않겠지만, 저부터 그런 회사에서 일하라고 하면 못 할 것 같아요. 하지만 경험 측면에서 따져본다면 졸업 직후에 큰 회사를 한번 다녀보는 것도 좋았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왜요?

아무래도 회사에서 일하다가 프리랜서로 독립하면, 기존에 속해있던 커뮤니티에서 일을 받을 수 있고요. 회사 생활을 하면서 배울 수 있는 점도 있으니까요. 그런 걸 제가 경험하지 못했으니, 괜스레 해봤으면 좋았겠다, 상상해보는 거죠. 근데 딱 그 정도인 것 같아요.

민영이 가장 최근에 했던 프로젝트는 어떤 작업이었어요?

‘안전가옥’이라는 출판사에서 내는 새로운 시리즈물에 대한 디자인 가이드를 잡았어요. 지난 1월에 첫 번째 결과물이 나왔죠. 여러 저자가 참여했는데, 『무드 오브 퓨처』라는 책이에요. 앞으로 이 디자인 가이드를 활용해서 나올 책들이 기대가 됩니다.

안전가옥 앤솔로지 ‘FIC-PICK’ 시리즈 가이드 작업.
첫 번째 책으로  『무드 오브 퓨처』가 나왔다. 2022

클라이언트 잡을 잘 하네요!

제가 개인 프로젝트만 하는 것도 아니고, 밸런스를 잘 맞춘다니까요. (웃음) 다만 제가 자유롭게 작업한 프로젝트를 사람들이 유심히 보는 경우가 큰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작년에 권정현 기획자가 기획한 《믿음의 자본 Hold On for Dear Life》란 전시의 포스터와 도록 작업을 했는데요. 젊은 작가들이 자본에 관한 이야기를 각자의 관점을 담아 풀어낸 전시로, 여의도에 있는 SeMA 벙커에서 열렸어요. 포스터에는 전시가 담고 있는 각종 상징을 콜라주 기법으로 풀어 디자인했어요. 도록은 보통 책을 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90도 회전한 채 보도록 만들었는데요. 분량과 제본 방식 그리고 예산 등에 적합하다는 실질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조금 다르게 보는 방식을 제안하고 사용자에게 약간의 불편함을 선사하면서 전시가 던지는 질문이 도록 디자인을 통해 느껴졌으면 했답니다.

《믿음의 자본》 포스터와 도록, 2021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EXiS) 포스터, 2019
《Gold, Retriever》 전시에 출품한 〈Cool Calendar for July〉, 롯데갤러리, 2018
『제노 페미니즘: 소외를 위한 정치학』, 2019

그리고 보니, 민영은 전시에도 자주 참여하지 않았나요?

그런 편이죠.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린 《커피사회》와 《호텔사회》에 참여했고, 《Open Recent Graphic Design 2019》에도 참여했어요. 작년에는 안초롱 작가와 함께 협업한 작업인 〈뷰티 낫 뷰티Beauty Not Beauty〉를 아트선재센터에서 전시하고 결과물을 사진으로 기록해 《COOL》 6호에 실었어요. 대부분 커미션 작업이었던지라, 자유도가 높은 클라이언트 잡처럼 언제나 디자이너의 자세로 임했던 것 같아요.

듣다 보니, 민영은 정말 열심히 살았네요.

그러니까요. 근데 한 우물만 팠으면 굉장히 효율적이었을 텐데, 이것저것 같이 하느라 조금 비효율적인 면이 있지 않았나 싶죠. 일단, 돈을 많이 못 벌었다는 게 뼈아픈 지점이에요. 하하.

안초롱 작가와 협업한 〈뷰티 낫 뷰티 Beauty Not Beauty〉
2021년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트랜스포지션 Transposition》 전시와 《COOL》 6호를 위한 작업이다. (사진: 양이언)
《COOL》 6호 ‘BEAUTY’, 2021

자, 오랜만에 PaTI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민영은 PaTI를 어떻게 들어오게 됐어요?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최대한 더듬어볼게요. (웃음) 대학교를 졸업하고 작은 출판사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을 때, PaTI라는 디자인학교가 생기면서 학생을 모집한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당시 저는 디자인 전공을 하지 않고 그래픽 디자인 일을 하던 터라 앞으로 이 일을 계속하려면 뭘 좀 더 배워야겠다고 생각을 했죠. 그래서 지원하게 되었어요. 아, 무엇보다 당시 김영나 디자이너의 팬이었는데요. 그가 더배곳 스승이라고 해서 지원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게 기억나네요.

PaTI 더배곳 1기에요. 처음 시작하는 과정을 다니면서 놀라거나 신기했던 점은 없었나요?

거의 모든 게 신기하고 놀라웠죠. 저는 머리가 클 대로 큰 사회인의 상태에서 들어갔기 때문에 학교 건물부터 전반적인 시스템도 생경했고, 한배곳 친구들을 보는 것도 신기했어요. 매 학기마다 학교도 계속 변화할 수밖에 없는 시기였기 때문에, 학교에 다닐 때 전반적으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느라 매우 정신이 없었답니다.

PaTI 더배곳 작업실에서, 2014 (사진: 이재용)

가장 재미있게 들었던 수업이 궁금해요.

김영나 스승과 함께했던 ‘말하는 공간’이라는 수업이 떠올라요. 파주라는 공간을 소재로 각자 진행하는 작업이었는데, 저는 괴담 모음집을 만들었어요. 파주라는 낯선 공간이 가진 사실 같지 않은 사실들을 괴기스럽지만 재미있고 장난스러운 느낌으로 다루는 모음집이었죠. 제가 그림 그리는 걸 잘 안 해보기도 했고 못 한다고 생각해서 그림 그리기를 본격적으로 시도한 수업이었는데요. ‘잘 못 하는 방식으로는 오히려 안 해도 좋은 거구나(?)’라는 뜻깊은 교훈도 얻었습니다. 하하.

더배곳에서의 2년은 민영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다양한 스승과 학생들을 만난 경험이 기억에 깊게 남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다른 커뮤니티에서는 보기 어려운 다양한 삶의 방식들을 보았죠. 그러면서 그래픽 디자인 업계라는 걸 인지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지금도 이렇게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네요!

지금 PaTI에 다니고 있는 재학생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PaTI에 있을 때 다양한 시도를 많이 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꼭 그게 디자인적 시도가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그걸 통해서 자기가 누구인지, 혹은 자기가 하고 싶은 디자인은 무엇인지에 대한 작은 힌트 정도라도 찾을 수 있다면 그것 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Å-land의 ‘GRAFIKER Project’에 참여한 〈냉면티Naengmyeon T-shirts〉, 2018

프리랜스 디자이너이자 1인 디자인 스튜디오 대표예요. 혹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없나요?

있습니다! 항상. 프리랜서를 위한 퇴직금 노란우산공제에도 들었어요. 일은 언제든 끊길 수 있으니까 불안감은 항상 있죠. 이렇게 불안할 때는 사무실을 함께 쓰는 동료들과 맛있는 걸 먹거나 수다를 떨면 일시적으로 불안도가 낮아져요. 그리고 무엇보다 FDSC라는 커뮤니티가 있어서 외롭지 않답니다. 기술적으로나, 행정적으로나 궁금한 점이 있으면 FDSC 슬랙을 통해 물어보는데요. 실질적인 팁을 많이 얻어요. 제가 운영팀에서 활동하는데요. 다른 운영팀 멤버가 커뮤니티를 대하는 태도로부터 많은 걸 배우기도 해요. 다양한 그래픽 디자이너가 있기 때문에 디자인 업계에 대한 인식도 넓어졌어요.

FDSC 〈운동해〉 티셔츠 디자인, 2019 (사진: 강희주)

민영은 미래 계획을 어떻게 세우고 있나요? 1년은 너무 짧으니까 2-3년 뒤의 모습, 5년 뒤의 모습, 그리고 10년 뒤의 모습으로 나눠 생각해까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미래 계획은 딱히 없어요. 계획을 세워도 어차피 마음대로 되지 않고, 외부적 요인에 따라 바뀌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계획이라기보다는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렸을 때는 지금 제 나이 정도 되면 집도 있고, 차도 있고, 번듯한 어른이 되어있을 줄 알았어요. 물론 지금도 건장한 어른인데요.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적인 어른’은 아닌 것 같아요. 옷도 어른처럼 안 입고요. (웃음) 그렇지만 저는 이런 저도 괜찮아요. 좋아요. 이런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거죠.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본다면, 2-3년 뒤에도, 5년 뒤에도, 그리고 10년 뒤에도, 하고 싶은 게 있고 여전히 어떤 것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민영이 마음에 품고 있는 비전이나 꿈이 궁금해요.

비전이나 꿈이라…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다양한 목소리를 존중하는 세상이 되면 좋겠어요! 그런 목소리를 담은 다양한 디자인을 보고 싶고요. 제가 하는 작업도 그중에 하나였으면 해요.

장기적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나요?

저는 기본적으로 회피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이라, 인생을 살면서 고난이나 귀찮은 일이 생기면 외면하고 방치해두거나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기도 하는데요. 장기적으로는 불확정성에 익숙해지고, 현실을 인정하고 마주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해요.

인터뷰에 응해주어서 무척 고마워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편히 말해주세요!

PaTI를 졸업한 지 이렇게 오래됐다니 놀라울 따름이에요. 어른들이 말하길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던데 그게 이런 건지 차마 몰랐네요. 그리고 마음은 아직도 20대 그대로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고요. 더불어 기회가 왔으며, 홍보를 좀 해야겠어요. 작년 겨울에 제가 만드는 잡지 《COOL》 6호가 나왔어요. 주제는 ‘BEAUTY’랍니다. 좁은 의미의 뷰티업계부터 넓게는 아름다움까지, 뷰티라는 단어가 가진 동시대적 맥락을 다양하게 짚어보는 이슈에요. 온라인에서도 판매 중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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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타이포그라피배곳(Paju Typography Institute, PaTI)은 2013년 봄, 파주에서 움튼 독립 디자인 학교입니다. 새로운 디자인 교육의 필요성에 동감한 시각 디자이너 안상수와 여러 스승이 꾸린 교육협동조합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지혜와 정체성에 바탕을 두고 무권위와 무경쟁을 지향합니다. 배우미는 스승과 함께 학교를 디자인하며 스스로 뜻한 바를 자발적으로 성취합니다. PaTI는 일반 대학에 준하는 4년제 바탕 과정 ‘한배곳’과 대학원에 준하는 2년제 심화연구 과정 ‘더배곳’, 1년제 ‘PaTI.is(일러스트레이션)’, ‘PaPA(프로덕션디자인)’ 특별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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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2.24.나무날
인터뷰·글: 전종현  |  편집·발행: 박하얀
영상 촬영·편집: PaTI 영상연구소 이형곤, 차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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