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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미국 조지아주 애틀란타에서 비극적인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21세의 백인 남성이 총기를 난사해 여덟 명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인데요. 피해자 중 여섯 명은 아시아계 여성이었습니다. 가해자는 마사지업소 중에서도 업주와 종사자 여성이 아시아인으로 알려진 세 곳을 의도적으로 노린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지난해부터 아시아인을 표적으로 한(anti-Asian) 혐오 폭력으로 많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공포에 떨고 있는데요, 이번 애틀란타 총기 난사 사건은 혐오 감정이 폭력으로 이어져 사람의 목숨까지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극단적 사례였습니다.

성별과 인종, 성 정체성, 장애 여부를 이유로 차별·혐오 폭력에 노출되는 것은 비단 어제 오늘만의 문제는 아닙니다세계적인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은 저서 『정치적 감정, Political Emotions (Why love matters for justice)』에서 시민들의 감정을 고려하면 품위 있는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우리 사회가 반자유주의적이거나 독재적이지 않으면서도 안정성과 동력을 가지려면, 지금보다 감정의 영역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감정이 유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누스바움은혐오감정만은 반드시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요. 혐오가 인간의 근원적 나약함을 숨기려는 욕구를 수반해, 타자를 배척하는 데 사용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 마사 누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Hiding from Humanity

“… 사회는 구성원들 중 몇몇을 이른바 ‘오염원’으로 규정하도록 가르친다. 다시 말해, 투사적 혐오는 사회적 기준에 의해 형성된다. 최소한 몇몇 사람들을 혐오스러운 존재로 간주하는 건 모든 사회의 공통점인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이러한 전략은 지배집단과 그들이 두려워하는 그들 자신의 동물성 사이에 안전한 저지선을 설치할 목적으로 채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 진짜 위험과 신뢰할 만한 연관관계가 거의 없는 이 투사적 혐오는 망상을 먹고 자라며 예속을 만들어낸다. 혐오가 자신을 순수한 것으로, 타자를 더러운 것으로 표상하려는 뿌리 깊은 인간적 필요에 봉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필요가 사회를 공정하게 만드는지는 대단히 의심스럽다. 오히려 이러한 전략은 사회의 공정성을 해친다

『혐오와 수치심, Hiding from Humanity


지난 몇 년 간 '혐오' 이슈를 진지하게 언론인의 입장에서 고민해온 기자가 있습니다. SBS 보도본부의 이경원 기자입니다. 이 기자는 사회부와 정치부, 탐사보도 부서 등을 거친 경력 15년의 베테랑 기자로 자신의 취재 경험과 고민을 토대로 최근 <감정 민주화>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이 기자는 타자를 배척하고 증오하는 혐오는 인류 역사의 보편적 현상이었다고 말합니다. 혐오 감정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이들을 멀리하고 싶은 심정에서 시작됐다는 것인데요. 하지만 혐오가 공동체 안에서 극렬히 작용할 때, 홀로코스트 같은 잔혹한 역사를 초래했다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지난 23, 이경원 기자와 함께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 감정과 그로 인해 발생되는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 지난 23, <감정 민주화>저자 SBS 보도본부 이경원 기자  (인터뷰 진행=SBS 류란 기자)

Q. 현직 기자가 혐오 감정민주주의에 주목한 책을 발간했다. 계기가 궁금하다.
흔히들 2017년 촛불시위를 우리 민주주의 역사의 매우 위대한 장면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촛불 이후 우리 민주주의가 진보하고 있는가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상대방에 대한 증오심, 적개심. 이런 게 거세지다 보니 우리 민주주의가 제 갈 길을 가고 있는게 맞는지 고민하게 됐어요.

상징적인 장면으로 전 세계를 강타했던 포퓰리즘(Populism) 열풍이 있었어요. 저는 포퓰리즘이야말로 타자에 대한 혐오에 기생해 혐오를 제도화한 시스템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포퓰리스트라고 한다면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있었죠. 트럼프가 히스패닉의 유입을 막기 위해 멕시코 장벽을 쌓겠다고 선언하고 실제로 공사를 시작했는데, 그 공사비가 몇 십조 원이었어요. 그 돈을 사회 복지나 공익을 위해 썼다면 좋았을 겁니다. 그런데 일부 대중은 그런 트럼프를 지지했죠.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타인을 배제하고 혐오하는 데에 더 많은 투자를 하겠다고 선택한 거예요. 대중이 이를 몰랐을 리 없을 겁니다. 이건 분명 이성적 합리적 관점에서 잘 한 선택이 아니지만, 감정적으로 잘 한 선택이라고 믿는 거예요. 더군다나 이는 민주주의가 고도로 발달된, 민주주의를 선도한다고 알려진 국가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혐오라는 감정이 얼마나 공동체의 운영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지 알 수 있어요. 저는 이런 현실이 우리 공동체의 감정 위기라고 생각해요


저술 과정에서 제가 학술 연구자가 아니다 보니 수많은 책을 읽고 나름의 해석을 하려 부단히 노력했어요. 마사 누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을 보면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이 감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도 그 전제에 크게 공감했어요. 공동체를 운영하는 가장 중추적인 것, 그 근본에 감정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제가 혐오 감정에 대해 강조하고 싶은 건 이 혐오가 매우 악하다, 혹은 극우적인 것이다, 이렇게 치부하지 말자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대안이 나올 수 없거든요. 저는 혐오가 우리 공동체 위기의 하나의 증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몸이 안 좋으면 열부터 나잖아요. 우리 공동체의 감정 위기의 징후로서 혐오 감정을 면밀하게 봐야 한다는 걸 쓰고 싶었어요.


Q. 책 전반에서 감정을 통해 우리 사회의 많은 일들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사회계약은 개인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으로 가정한다. 그래서인지 통상 '공적' 개념으로 간주되는 정치체로서 민주주의와 사적 감정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대한민국 사회의 핵심적인 문제로 진영 갈등이 있죠. 그런데 현재의 진영 갈등이 엄정한 진영 철학에 근거해서 벌어진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저는 아니라고 봐요. 대표적으로 양쪽 진영이내로남불을 표제어로 서로의 실수, 약점을 공격 하잖아요. 그 역시 서로에 대한 적대적 감정, 혐오의 메커니즘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어요. 어떤 철학적, 정치적 기준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저 사람, 저쪽 진영이 싫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믿고 일단 쏟아내는 거예요.

저는 혐오의 가장 중요한 두 요소가 위계기피라고 생각해요. ‘위계는 자신의 우월함과 타자의 열등성을 전제합니다. 진영 갈등도 결국 상대의 도덕적 열위를 기반으로 하는 거잖아요? 당신들은 우리 공동체에 해악을 끼친다는 논리와 더불어, 상대적으로 나는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것.

두 번째는 기피’. 너무 싫다 보니 대화 자체를 하기 싫어해요. “나는 너와 소통할 수 없어.” “너랑 얘기하는 것은 매우 소모적인 일이야”, 라는 식의 기피가 혐오를 누증 시키고, 우리의 민주주의에 악영향을 미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진영 갈등이라는 것도 엄정한 진영 철학에 근거 했다기 보다, 어찌 보면 혐오와 매우 유착되어 있는 거예요. 때문에 혐오에 대해 먼저 사유하고, 그 저변에 있는 감정의 문제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Q. 진영 논리에서도 혐오가 발생하지만 자기 목소리를 직접 내기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 특히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발생했을 때는 상황이 급격히 위태롭게 전개된다.
맞아요. 실제 혐오를 연구하는 사람들은혐오라는 말이 남용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더라고요. 세대 갈등이나 진영 갈등을세대 혐오’, ‘진영 혐오이렇게 쓰면 안된다는 거예요. 정말 중요하게 다뤄야 하는 혐오는 소수자에 대한 혐오 아니냐. 모든 일반적인 갈등을 같은 카테고리로 묶어 버리면 정말 변호권이 없는, 그래서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제대로 돌볼 수가 없는 것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저도 그 말에 깊이 공감해요.

다만,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메커니즘부터 봐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보통 혐오의 대상에 대해 질문 하잖아요. ‘혐오 받는 대상의 특성은 무엇일까?’, ‘그것이 그렇게 되기까지 개입된 요인은 무엇일까?’ 같은. 하지만 혐오 받는 대상이 되는 데엔 공식 같은 건 없어요. 공동체의 정상성에서 이탈된 사람들에 대한 공통된 감정선이 바로 혐오거든요.

그러니까 어느 때엔 세월호 유족들이, 또 어느 때엔 여성들이 혐오의 대상이 되었고요. 태극기 시위 때엔 틀딱이라는 노인 세대에 대한 혐오 표현이 등장했죠. 대상은 자유자재로 변합니다. 그렇다면 혐오나 적개심, 그 중심부에 위치한 것을 먼저 봐야 한다는 거죠.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되는 불편함, 불편함에서 시작된 혐오 프로세스를 볼 수 있어야 우리 사회 많은 갈등의 속성을 이해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지금 우리 민주주의는 감정의 위기라고 생각해요. 먼저 물리적인 환경의 변화가 있었어요. 당장 이주민들이 많아졌죠. 대한민국 뿐만이 아니라 미국과 유럽도 난민 문제로 시름을 앓았어요, 자신들이 구축한 어떤 시스템에 타자로 일컬어졌던 사람들이 계속 유입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사람들은 불편해하고 있어요. 마치 우리가 지금까지 만들었던 어떤 정상적인 정체성이 훼손되는 것 아닐까, 하는 공포를 갖는 거예요.

번째로는 SNS의 발달이 있었어요. 저는 웹사이트 시대와 SNS 시대가 명확히 구분된다고 생각해요. 웹페이지엔 누구나 들어갈 수는 있는 게 아니잖아요. 기존에 자원을 잠식한 특정 사람, 혹은 단체가 영향력을 누릴 수 있었죠. 그런데 SNS는 아니에요. 누구나 연결될 수 있고, 얽히고 설키는 관계가 가능하기 때문에 훨씬 더 사람들이 생각을 거침없이 얘기할 수 있는 환경이 됐어요. 겉보기에는 훨씬 민주적으로 보이죠. 하지만 그 운영방식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는 겁니다. SNS는 토론 공간이라기보다는 연설 공간에 가까워요. 웹사이트 시대 때는 가장 많이 회자됐던 게 아고라잖아요. 거기선 주장을 하고, 반박하고, 또 주장하고, 반박하고. 일종의 토론이 형성됐는데 SNS나 이렇게 생각해하면 거기에 야유를 하든 박수를 치든 좋아요, 싫어요 반응 밖에 없는 거예요. 피드백이 존재하기 어려운 환경이 아닌가. 이렇게 되면 반향실(echo chamber)이 커지죠. 서로 토론이 되지 않은 채 일방적인 주장만 모이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정치권을 포함한 엘리트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어요. 독일의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가 이런 말을 해요. 대중들은 자신의 분노 감정을 정당이라는 은행에 맡겼다. 그런데 정당들은 그 예금을 탕진해버렸다. 감정 정치 관점에서 이 말을 해석한다면, 정치권이 우리 공동체의 감정을 제대로 해석해, 제대로 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죠. 이번 보궐 선거 결과를 보더라도 청년층이 느꼈던 좌절감, 박탈감에 대해서는 적확한 진단을 내리는 사람을 저는 아직 못 봤어요.


엘리트들이 끝내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것 중엔 일간 베스트, 일베가 있어요. 저는 일베에 극우 사이트라는 레테르를 붙이는 것이 불편해요. 물론 그들은 문제가 많고, 저는 그들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요즘 일베가 많이 약화됐다고들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일베 사이트는 힘이 약화된 게 맞지만, 지금 뉴스 댓글을 보세요. 5, 6년 전엔 일베 사이트에서나 볼 수 있던 그런 혐오 댓글이 이젠 일반 포털 사이트 뉴스에서도 볼 수 있어요. 좀 과장을 보태면 당시 일베의 정서가 보편적 정서가 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깜짝깜짝 놀랍니다. 이건 진영 철학이 아닌, 그들의 박탈감이나 좌절감에 대한 면밀한 해석이 필요했던 거예요. 손쉽게 도덕적 우월감을 가진 채 그들을 악마화 하는 데 그쳤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해석하지 못한 셈이 됐어요. 우리 시대의 혐오 현상은 정치권과 전문가와 같은 엘리트들이 일베를 만만히 본 대가를 치르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Q. 하지만 특정 대상에 대한 혐오 감정을 갖는 사람들과는 정상적인 소통이 어렵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대화를 시작해야 할지 조차 난감하다.
라이언 에노스Ryan D. Enos라는 미국의 학자가 보스턴 외곽의 통근 열차에서 실험을 했습니다. [관련 기사: Researchers put two Spanish-speakers on a train and changed commuters’ views of immigration] 고소득층의 백인들이 주로 많이 타는 곳이었는데, 열차에 매일 히스패닉 두 명을 타게 합니다. 그때 백인들이 어떤 생각의 변화를 갖게 되는지 조사했더니 처음엔 반감이 커지더래요. 히스패닉이 우리 공동체에 들어오면 범죄가 많아질 것 같다, 복지 혜택이 줄어들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얘기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들을 계속 마주치게 했더니 그 반감의 정도가 조금씩 낮아졌어요. 대화도 하고, 서로 교류를 시작하고. 히스패닉도 백인과 똑같은 사람이구나, 이런 식으로 생각이 변했다는 거예요. 저는 이게 큰 정책적 함의가 있다고 생각해요.

과거에 기사를 쓰면서 우리나라 다문화 예산에 대해서 분석해본 적 있어요. 대부분 이주민들을 지원해주는 복지 예산이더라고요. 한글을 가르치고, 각 가정에 지원금을 주는 식의 예산 같은 거였어요. 이것도 필요하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건 이 사람들을 대한민국 문화에 흡수하고 녹아 들게 하는 예산인 거예요. 다문화 예산이 아니라 사실상 한 문화예산인 거예요. 외국에서 온 며느리들을 온전한 한국의 며느리로 만들 생각보다는 그냥 그 사람 자체로 인정할 수 있게끔 유도하는 그런 정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려면 서로의 접촉 면적을 계속 넓혀가야 하는 거예요. 따라서 저는 다문화 예산 주관 부서가 여성가족부가 아니라, 교육부가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인식은 쉽게 안 변해요. 제도의 변화를 통해서 인식의 변화를 추동할 수 있는 그런 상승효과를 만들어내야 하죠. 물론 쉽지 않은 일입니다.


Q. 책엔 혐오 설계자라는 개념도 나온다. 우리 미디어 종사자들이야말로 혐오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주의해야 하는 직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예멘 난민들이 왔을 때, 진보 진영의 한 논객이 이렇게 주장을 했어요. ‘기독교 단체가 예멘 난민이 오는 것에 대한 혐오 틀을 짜고 있다. 음모를 만들고 있다.’ 기독교 단체가 조직적으로 가짜 뉴스를 생성하고 퍼뜨리고 있다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우리가 그렇게 누군가의 혐오 기획, 혐오 설계에 쉽게 놀아나는 사람들일까? 아니라는 거예요. 사람은 누구나 혐오의 감정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어요. 특정 타자에 불편함을 느끼고, 더 나아가 거부하는 본능을 극우 세력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아요. 예멘 난민을 반대했던 것은 보수 진영만이 아니었어요. 진보 진영, 특히 청년층과 여성들이 갖는 공포가 있었죠. 일자리를 뺏을 것이라든지, 범죄율이 높아질 것이라는 등의. 그렇다면 우리의 감정 문제를 확대해 어떤 감정이 청년층과 여성들에게 그런 우려를 갖게 했는지 들여다 봐야 한다는 거예요.

저는 기자라는 직업이 사회 감정 유통의 최전선에 있다고 생각을 해요. 우리는 말을 만들고, 그 말을 퍼뜨리는 사람이잖아요. 사건사고 기사를 쓸 때중국 동포 김모 씨이렇게 쓰면 댓글엔 중국 동포 욕밖에 없어요. 교통사고 뉴스에서 ‘30대 여성 이모 씨라고 하면 여성 운전자에 대한 욕들로 가득 차죠. 이런 게 무슨 혐오 표현이냐고 할 수도 있겠죠. 그 사람의 정체성 가운데 하나를 가리키는 객관적 정보이기도 하잖아요. 하지만 한발 더 나아가서 우리가 혐오를 유통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한다면, 이런 레테르를 과감히 누락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선언이 필요한 것 같아요, 언론사 종사자로서. 이것도 용기라면 용기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저도 15년 가까이 기자를 한 사람이라서 익숙해진 틀이 있어 쉽진 않아요. 그 틀에서 벗어나면 뭔가 어색하거든요. 그래도 노력해야 하는 부분 임에는 틀림 없는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는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야스차 뭉크Yascha Mounk가 쓴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책을 보면 오히려 로마나 오스만 투르크 같은 제국들이 타자에 대해 관용적이었다고 하더라고요. 반면 근대 민주주의는 늘 회원의 자격을 엄격히 물었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거대 권력과 싸워야 했을 텐데, 민족이라는 단위는 대중의 결속력을 강화하며 매우 요긴하게 쓰였던 겁니다. 그렇게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는 맞물려 돌아갔고, 근대 민주주의는 어떤 이데올로기보다 우리의 순수성, 타자의 비순수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근대 민주주의의 틀을 만들었던 장 자크 루소는 민족이 민족을, 국가가 국가를 숭배하는 종교가 필요하다고 역설했어요. 관용론의 저자 볼테르가 말했던 관용은 민족과 국가 내부 구성원들끼리의 관용이었을 뿐, 그 외연이 타자로까지 확장되지 않았습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열등한 인도인들을 서구인처럼 만들기 위해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밀은 실제로 동인도 회사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근대 민주주의 사상가들 역시 회원의 자격을 엄격히 물었던 겁니다. 민주주의는 늘 타자를 소외시키는 데 익숙했어요. 그 극댓값이 홀로코스트였죠. 홀로코스트가 사악한 의도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민주주의가 회원의 자격을 엄격히 물었던 전통을 기형적으로 극대화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더라고요. 민주주의는 관용과 혐오의 씨앗을 동시에 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이 가운데 혐오가 거세지고 있고요. 민주주의는 그렇게 살얼음 같이 운영돼 왔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해 늘 고민해야 합니다. 특히 지금과 같은 정체성의 위기, 공론장의 위기, 이런 위기들 속에서 민주주의를 어떻게 재구성해야 할지 곰곰이 고민해야만 하는 시기에 직면했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저는 관용이 경제적 이익에도 기여한다고 생각해요. 미국의 학자 리차드 플로리다Richard Florida가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어요. 지역별로 동성애자의 숫자와 창조적인 산업, 대표적으로 IT 산업의 발달 정도의 상관 관계를 분석해봤더니, 정비례한다는 거예요. 실리콘밸리에 동성애자가 많다는 건 유명하죠. 동성애자들이 IT 산업에 뛰어나다는 뜻이 아니라, 관용적인 지역에 인재가 모여들었고, 그렇게 경제적으로 상승효과를 추동 할 수 있었다는 의미일 겁니다. 관용은 우리 공동체에도 경제적 이익이 될 수 있다는 의미겠죠. 역사학에서도 로마와 오스만 투르크, 몽골이 거대한 제국으로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로 이민족, 그러니까 타자를 과감하게 수용했던 관용적인 정책을 꼽기도 하잖아요. 반대로 관용의 대척점에 있는 혐오가 결국 우리 공동체의 삶의 질을 옥죌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생각하는 D
이경원 기자는 감정민주화를 성취하는 혐오의 대항 감정으로서 공감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합니다. 공감이 공동체의 인위적 노력을 통해 고양될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인데요. 공감은 신뢰를 통해, 신뢰는 결국 소통을 통해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기자가 언급한 미국의 정치심리학자 에노스의 실험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평소 이주민 문제에 관심 없던 백인들은 히스패닉과 함께 열차에 타는 것만으로도 처음에는 관용적인 이민 정책에 반대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실험이 반복될수록 그 결과는 달라졌습니다. 히스패닉과 3일 접촉한 사람은 이민에 대한 반감이 컸지만, 10일 동안 접촉한 사람은 그 정도가 약해졌습니다. 그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타자와의 접촉이 불편함을 낳는다가 아니라 타자와 접촉을 계속하면 불편함은 되레 줄어들 수 있다였습니다.

다음주 SDF 다이어리는 공휴일인 어린이날 하루 뒤인 5월 6일에 보내드릴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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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란 기자 : 입사 12년차 SBS 보도본부 기자. 주로 법조팀과 사건팀, 영화 담당 기자로 근무했습니다. 기술의 발전과 그로 인한 사람들의 생활상의 변화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정애 기자 : 26년차 취재기자로 사회부, 경제부, 국제부, 미래부 등을 거쳤습니다. ‘뉴스추적’이라는 시사고발프로그램을 맡으면서 사안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최근 10여년 서울디지털포럼과 미래한국리포트 등을 만들어 왔으며 2018년부터는 ‘SBS D포럼’을 총괄 기획하고 있습니다

이종훈 기자 : 내년이면 입사 20년을 맞는 중견 기자.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들, 그리고 저널리즘에 관심이 많습니다. 통찰력 있는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 구석구석을 들여다보고 많은 분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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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예진 작가 : 13년째 방송작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시사, 뉴스, 선거 방송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경험했고 2018년부터 D포럼을 기획구성하고 있습니다. 지식 포럼을 조금 더 대중 친화적으로, '가까이 와닿는' 포럼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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