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오막아. 딱히 정해진 방법이 없는 것들이란, 처음 시작할 때 짱구를 굴리고 시간을 끌면 끌수록 골치만
 
001_고운 모래가 발바닥을 간질이는 옥청색 바다로 가자.
한아임 to 오막
2022년 7월
 
안녕 오막아.

딱히 정해진 방법이 없는 것들이란, 처음 시작할 때 짱구를 굴리고 시간을 끌면 끌수록 골치만 아파지고, 더 좋아지거나 쉬워지지는 않는다는 것이 내가 평소에 하는 생각이다. 심지어 좋거나 쉽다고 말할 만한 무언가가 존재도 못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따라야 하는 규칙이 없는데도 정답을 찾은 다음에야 시작하려고 하면, 성공적으로 정해진 길을 따르기는커녕 길이 없어서 시작도 못 하는 수가 생기는 것이다.
‘딱히 정해진 방법이 없는 것들’이란 음악일 수도 있고 이런 편지일 수도 있다. 그것들이 이래야 한다고 혹은 저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기는 해도, 어차피 그자들이 이 세상 모든 음악이나 편지를 확인할 길이란 없다. 그러니 일단 시작하고 볼 일이다. 특히나, 시작이란 끝에 가서는 생각도 나지 않는 경우가 잦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처음, 중간, 끝 중에 가장 중요한 게 있다면 나는 끝이라 생각한다. 예전에는 처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니다. 아이디어는 도처에 널렸고, 시작은 반이 아니었다. 시작은 그냥 시작이었다. 그리고 끝이 거의 전부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시작이 무의미한 건 아니다. 시작이란 하기만 하면, 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는 최강 장점이 있다.

아무튼, 지난번 통화 때 서로 호칭은 ‘오막이’와 ‘아임이’라고 부르고, 말투는 평상시에 쓰던 대로 하기로 해놓고서는, 막상 평소처럼 ‘-어’라고 문장을 끝맺음하려니까 왠지 이상했다.
‘시작은 반이 아니야. 시작은 그냥 시작이야. 그리고 끝이 거의 전부야.’ 이것은 아무래도 위에서 쓴 ‘-다’ 형태와는 느낌이 너무 다르지 않냐.
‘-어’는 늘상 쓰는 평범한 어미인데, 그게 ‘-다’보다 대체 뭐가 어떻게 더 이상하냐고 묻는다면, 그냥 막연하게 간지럽다고 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마치, 깨달음을 주려는 애니메이션에서 클라이맥스 결투 직전에 ‘주인공의 조력자’ 역할을 맡은 캐릭터가 던질 법한 대사 같단 말이다. 누군가를 의식하고서.

이 편지는 누군가가 읽으라고 쓰는 것이 맞지만, 따라서 누군가를 의식하는 게 엄밀히는 맞지만, 동시에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쓰이고 있다.
이것은 독백이다. 그게 이것과 대사, 카톡 메시지, 전화 통화와의 차이다. 너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보게 될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구독 부탁해요.) 미래와는 상관없이, 현재의 나는 언제나처럼 혼자 방구석에 앉아 있다. 내게 충성스럽고 내가 충성하는 키보드를 뚱땅뚱땅 두들긴다. 이런 상태에서 남이 (언젠가) 나를 보느냐 안 보느냐가 나한테 영향을 미치지 않기 시작한 지는 조금 된 것 같다. 남이 볼 거라는 걸 알아도 모른다는 뜻이다.
알지? 알아도 모르는 거.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것도 만들 수 없고, 만든다고 하더라도 세상에 내놓을 수 없다.

아무튼, 언젠가 편지라는 이 형태의 대화에 좀 더 익숙해지면 마치 너와 말로 대화하듯이 ‘-어’를 자연스럽게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시작을 어떻게 하나’라는 고민의 고비를 넘기는 게 더 중요한 것 같다. 
처음에 ‘고막사람’을 너에게 제안했을 때는 네가 바로 승낙할 줄 몰랐다. 내가 좀 더 세일즈를 해야 할 줄 알았는데, 바로 오케이 해주어서 고맙다.
내가 ‘뭔가 음악에 대한 일을 벌이고 싶다’고 생각한 이유는, 우연히 듣게 된 어떤 앨범 때문이다. Thievery Corporation이라는 뮤지션의 Saudade라는 앨범.
솔직히, 뮤지션 이름 때문에 클릭했다. Thievery Corporation이라니. 그냥 ‘도적떼’ 아니면 ‘도둑 일당’이 아니라, ‘주식회사 도둑질’스러운, 불법적으로 오피셜해서 아이러니하고, 잔망스럽게 야망 찬 듯한 이 이름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에 비해 앨범 커버는 말랑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련아련하고 하늘하늘하고, 그렇단 말이지.

앞으로도 나는 이런 종류의 설명을 하게 될 것 같다. 나는 음악에 대해 얘기할 때 기술적인 측면에서 접근할 만한 지식이 없다. 음악에서 좋아하는 느낌적 느낌이 있긴 하지만, 그것만 찾아 들을 정도로 취향이 확고하지도 않다. 
나는 음악 앱에 들어가서 뭐가 눈에 띄면 그냥 클릭한다. 요즘은 그러기에 쉬운 세상이다. 전 세계의 수만 (수십만?) 아티스트들이 내 손가락 끝에 연결되어 있다. 그들이 내 앞에 나타나서 Thievery Corporation 같은 매혹적인 이름으로 나를 유혹하면, 나는 일단 누른다. 잃을 건 아무것도 없고 혹시나 뭘 얻을 수도 있어서다.

이 앨범도 그런 식으로 클릭한 건데, 순간 바다가 펼쳐지는 줄 알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게 내가 얻은 것이다.

어느 바다인지는 모른다. 그런데 앨범 커버 때문에 그런지, 아마 옥청색일 것이고, 따라서 모래사장과 맞닿은 바다가 얕고 드넓을 것이다. 모래는 고울 테고 대기는 따뜻하되, 너무 습하지도 건조하지도 않을 테다. 태양이 머리 위에서 작열하는 게 아니라, 사방에서 오는 느낌이 들 것 같다. 산도 섬도 없는, 모든 것이 평평한, 수평선이 끝도 없는 옥청색 바다 때문에.
모름지기 그런 바다에 가자면, 꼭 끼는 옷을 입고서는 기분이 안 날 것이다. 그러니 펄럭거리기에 딱 좋은 길고 가벼운 치마를 입어야 할 것 같다.
당장 짐 쌀 필요도 없다. 얼른 비행기표를 끊을 필요도 없다. 제발 좀 어디를 갔으면 좋겠다 좀 제발제바렞바라젭잦발좀! 할 필요도 없다.

도대체 어떤 바다인지는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이, 나는 코로나 세월 어언 3년, 기약 없던 여행을 떠난 기분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애초에 이 앨범이 내 추천 피드에 뜬 것일지도 몰랐다. 온 세상 사람들이 여행에 목말라서, 갑자기 미스터리한 알고리듬님의 작용으로 인해 나 같은 청취자들이 이 앨범을 마주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실제 세계에서 존재하는 태평양 해안으로부터 2마일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는 나는, 이 앨범을 듣고 나서야 3년 만에 바다에 갈 수 있었다.

참고로, 치마란, 특히나 긴 치마란, 남이 시켜서 입는 게 아니라 자기 선택으로 입으면 무척이나 편한 옷이다. 이 앨범을 타고 가는 해변에 바람이 아무리 많이 불어도 상관없다. 기니까. 그리고 날이 따뜻하니까.
그러니 너도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입어보길 바란다. 정말이지, 옷이란 기능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지, 다른 모든 외부 요소들은 2차적 문제다. ‘긴 치마의 엄청난 편함’쯤은 죽기 전에 누구나 쉽게 느껴볼 만한 즐거움 중 하나라 본다.
아무튼, 앨범을 들으면 들을수록, 내가 지금 있는 이 바다가 어디에 있는 언제적 바다인지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앨범을 장르적으로 보자면 보사노바인데......
음. 음악은 듣기만 하고 좀처럼 검색까지는 하지 않는 내가! 친히! 이 편지를 위하여! 검색을 해보니,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Thievery Corporation은 미국 워싱턴 DC를 기반으로 한 일렉트로니카 듀오라고 한다.
일렉트로니카라니. 원래가 보사노바는 일렉트로니카와 잘 섞이는 것인가? 잘 모른다.

거기다가 앨범에 여러 언어가 쓰였길래 자세히 보니, 제목인 Saudade는 포르투갈어로 ‘향수’ 혹은 ‘그리움’과 비슷한 단어라고 하고, 가사는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로 되어 있다.
아하. 이 모든 언어들이 쓰이는 브라질 보사노바 앨범을 미국인들이 만들었구나.
그러니 내가 도착한 이 바다가 대체 뭔 바다인지 모르는 것도 당연하지.

이 앨범의 노래가 나는 다 좋다. 아마 이런 음계를 가리키는 용어가 있을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면 내게 말을 해주겠니……)
예를 들어, 두 번째 곡 Meu Nego에서 두드러지는, 단음계이긴 한데 12키는 아닌 것 같은 뭔가가 있다. 일반적인 단음계보다 장엄한 느낌이다.
거기에는 리듬도 한 역할 하는 것 같다. 뭔가, 이것에 맞춰 춤을 추는 게 가능할 거 같긴 한데, 리듬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기에 대단한 레벨의 실력자가 아니고서야 어정쩡할 것 같은. 따라서, 여기에 맞춰 춤을 출 수 있다면 웅장할 것이다……! 하는 그런 느낌이 있다.
그리고 보컬의 멜로디가 스르르 흘러가다가 갑자기 2:01-2:02에서 한 번 눌러주는, 불협화음은 아닌데 튀는 음이 나온다. 이거 뭐냐! 갑툭튀! 아니면 그냥 나의 느낌인 것인가?
그리고 그 바로 다음에 오동통통통 동통통 이런 타악기 소리가 나오는데, 감칠맛 나고 좋다.

앨범 이름과 동명이며, 가사가 없는 Saudade라는 곡에는 또 다른 타악기 소리가 둥퉁퉁 나온다. 그보다 더 가벼운 빗방울 소리 같은 타악기도 있다.
그래서 이 앨범을 듣고 있으면 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거다. 바다에 해가 떠 있었는데, 어느새 진다. 밤도 있는 것 같다. 그럴 때는 비가 올 것도 같다. 그런데 흩뿌리듯 올 것 같다. 혹시나 몰아치더라도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박자를 유지하며 곡은 계속 고고하게 흐른다.
새벽은 없는 것 같다. 그냥 눈을 번쩍 떠 보면 어느새, 다시 공기가 따뜻하고 해가 가득한 해변에 와 있다.
음악에는 순간이동성이 있다. 냄새 다음으로 타임캡슐스러운 도구라고 생각하는데, 일상의 냄새는 효과적으로 담아 다닐 방법이 없는 반면, 음악은 온/오프라인 어디에서나 한 방에 나를 다른 장소, 다른 시간으로 데려다주니, 이 얼마나 돈도 노력도 안 드는 여행 방법이냐.
이 때문에 한동안은 플레이리스트를 기간별로 만들기도 했다. 2012년에 들은 음악. 2013년에 들은 음악. 2014. 2015.
겹치는 노래도 많았다. 또한, 꼭 2012년에 나온 노래만 2012년 플레이리스트에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거기에는 그보다 10년 전에 나온 노래도 있었고 20년 전에 나온 노래도 있었는데, 곡의 순서는 내가 그것을 리스트에 추가한 대로라서, 나에게만 규칙성이 있고 다른 누가 보면 뒤죽박죽으로 보일 만한, 그런 규칙이었다.
대개 어떤 계기로 인해 곡을 왕창 추가하게 됐는데 (누가 추천을 해준다든지), 나는 특정 해의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면 그 추가의 순간으로, 또는 그 해의 플레이리스트를 듣던 다른 모든 해들로 순간이동할 수 있었다.

아무튼.
내 경우에는, 빨리 당장 어디 먼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이 앨범을 듣고 좀 잦아들었다. 너도 한번 들어봐라.
이번 편지는 이쯤에서 마무리해야겠다. 웹소설 한 회차가 공백 포함 5천 자를 좀 넘는다던데, 지금 이 지점이 5천 자 정도 된다. 이렇게 타이밍을 얼추 맞췄을 때 나는 막연하게 뿌듯함을 느낀다.
This is 육감.
This is 짬밥.
나는 끝이 다가오는 걸 알지.

그건 그렇다 치고, 그래서 이것은 ‘좋은’ 첫 번째 편지였는가?
어…… 그것은 모르겠다. 그러나 시작한 편지에 끝이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좋으냐. 어떤 때는 시작은 했는데 끝이 안 나…… 그냥 계속 새로운 걸 시작만 해……
후. 그래. 시작은 반이 아니다. 혹시나 끝낸다면, 거기서 뒤돌아볼 때나 되어서야 시작이 반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아까 말했듯이, 시작은 일단 존재하게 되면 부인할 수 없게 된다. 그게 최대 강점이다. 그리하여 이렇게, ‘고막사람’은 시작했다.
이제 오막이 네 차례다. 분량 형식 주제, 모두 네 마음대로 펼치기를 기대하겠다.
- 시작한 것의 작은 조각을 끝내서 뿌듯한 아임이 -
이번 편지를 보낸 한아임은...
아무 데에도 아무 때에도 있었던 적 없는 세상, 그리고 언제나 어디에나 존재하는 세상 사이의 해석자다. 원래도 괴란하고 괴이하고 괴상하며 해석함 직하다고 여기는 것도 여러모로 괴하다. 이런 성향은 번역으로 나타날 때도 있고, 오리지널 스토리텔링으로 나타날 때도 있다. 이러나저러나 결과적으로는 어떤 형태로든 이야기를 하고 있다. 뭐 하고 사나, 뭘 쓰고 뭘 번역했나 궁금하면 여기로. https://hanaim.imaginariumk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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