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1'은 참을 수 없지
March 12, 2024
아피스토의 풀-레터 S1.5-6 vol.37
안녕하세요. 아피스토입니다. 
요즘 인터넷으로 물건을 살 때 가격보다 먼저 보는 것이 있어요. 배송예정일입니다. 예전에는 오늘 주문하면 다음 날 도착하는 것도 신박했는데, 이젠 밤 12시 전에 주문해서 다음 날 새벽에 물건을 받는 것도 익숙합니다. '총알'이나 '로켓'이 붙지 않으면 배송이 빠른 것 같지 않을 지경입니다. 이러다가 조만간 새벽배송도 못 기다릴 것 같아요. 주문하자마자 1시간 이내 도착하는 드론배송이나 라이더배송이 생기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한편으론 제가 쿠팡에게 기다림을 견디지 못하도록 길들여진 것도 같은데, 문제는 '배송의 기다림'만 없어진 게 아니라는 거예요. 사람을 기다리는 일도 없어졌습니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늦는 친구에게서 '나 10분 늦어' 하고 문자를 받으면 저는 그때부터 그를 기다리지 않는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약속시간이 10분 미뤄졌군' 하며 인스타그램의 새로고침을 연신 잡아당기며 새 피드를 들여다봅니다. 10분쯤이야 순삭입니다. 그러고보면 '바람 맞는' 것도 고릿적 얘기가 된 거예요. '너'를 기다리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결국 기다리던 '네'가 오지 않아 터덜터덜 집으로 발길을 돌리는 일은 차라리 낭만에 가깝습니다. 가까운 사이라면 위치추적이라도 해서 어디쯤 오고 있는지 알 수 있으니까요.

문자를 보내놓고 답문자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일도 이제는 답답하기만 합니다. 상대가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알 수가 없잖아요. 문자 대신 카톡을 보내면 '1'이 없어지는지 확인할 수 있으니 기다림은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sns에 실시간으로 인증샷을 올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이 아니면 타이밍 놓친 피드로 전락할 게 뻔합니다. 기다릴 여유가 없어요. 기다려도 안 되죠. 지금 바로 올려야 '생생한 정보'가 됩니다. 음, 이쯤되니 저는 '참을성 없는 가벼운 존재'임에 틀림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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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집으로 의문의 택배가 하나 배송되었습니다. 기다린 적 없는 택배는 더욱 반갑지요. 상자를 열어보니 동백나무 절화가 한 아름 담겨 있습니다. 아직 봉오리가 채 펴지 않은 꽃이 야무지게 달려 있습니다. 잊을 만하면 꽃을 보내오는 아내의 오랜 친구가 이번엔 동백을 보내온 것입니다. 작은 화병에는 꽂기도 힘들 만큼 풍성합니다. 

동백이 온 이후로 저에게는 새로운 루틴이 생겼습니다. 아침마다 동백꽃이 피었는지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피었나?' '안 피었네.' '피었나?' '안 피었네.'
굳게 다문 봉오리가 좀처럼 펴질 것 같지 않습니다. 심지어 피기도 전에 떨어진 봉오리를 보니 심란해집니다. 봉우리들이 과연 꽃을 피울 수 있을까 걱정도 되지만 별 도리가 없습니다. 기다리는 수밖에요.

그러고보니 저는 요즘 매일매일 '기다리고' 있습니다. 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예측할 수 없는 기다림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늦게라도 핀다면 기다린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같아선 꽃을 기다리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결국 봉오리가 전부 떨어져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낭만적일 것입니다. 차라리 로켓배송으로 받은 택배처럼 내일 새벽에 갑자기 만개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다림을 잊은 제가 모처럼 기다림을 만끽하고 있으니까요.

아피스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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