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시.사 레터 74회 (2022.10.05)

안녕하세요. 출판사 문학과지성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는 방원경입니다. 한국문학팀에서 시집과 소설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독자들이 하필이면 그 시집을 집어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할 때가 많습니다. 제 경우엔 ‘시인의 말’을 읽고 시집을 선택하는 편입니다. 문학동네시인선은 ‘시인의 말’이 일반 시편처럼 배치되어 있습니다. 레이아웃 때문인지 ‘시인의 말’이 오롯이 시 한 편으로 느껴지곤 합니다.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의 ‘시인의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지막 페이지에 수록된 시는 시인의 말을 쓰다가 완성해버린 것이다. 하고 싶은 말에 거의 다 도달했을 때, 단어가 바닥나버렸다. 종종 이런 일이 벌어지곤 했다.” 스스로 한 편의 시임을 밝히는 ‘시인의 말’입니다. 끝에서 처음으로 거슬러올라가며 만난 두 편의 시를 소개합니다.

💗방원경 편집자가 사랑하는 첫번째 시💗

 

웃는 돌 (유계영,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

 

만약 언젠가

돌 하나가 너에게 미소 짓는 것을 본다면,

 

그것을 알리러 가겠니?*

 

먹는 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실로 대단한, 돌도 씹어먹을 나이지 하고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또다른 사람들은 실로 범상한, 돌도 씹어먹을 나이지 하고 심드렁해합니다 나는 으적으적 씹으며

생각합니다 사람을 녹이면 무슨 색깔일까요 염소를 고아먹고 더 많은 염소를 위해 쓰겠다는 사람도 있었어요 찰랑거리는 나의 뿔 속에 부유물이 많은데요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이었습니다

 

너 모자 크니까 빌려줘

너 손이 크니까 잡아줘

그런 이야기들이 다정합니다 더 많은 것을 먹고 더욱 많은 것을 위하려는 것 같았어요

둘밖에 없었지만 저요? 제 손요? 자꾸 한번 더 묻게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두 번씩 우는 나를 대단한 염소야 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습니다 한번 더 묻는 나를 말귀도 어두운 멍청이 같으니라구 하고 걷어찹니다 나는 마른 잔디를 으적으적 씹으며

별 뜻 없어요 습관이에요 부끄러워합니다

 

같이 바다에 갈까? 약속하면 바다로 향하는 도중에 깨어납니다

내일도 바다로 향하는 도중에 깨어나 첨벙거리며 혼자서 두 번씩 첨벙첨벙하면서

해변의 커다란 바위를 향해 뿔을 흘리고 있습니다

어쩌다 부끄러운 습관밖에 남질 않았고

 

먹는 내가 있습니다 커다란 바위 하나는 다 먹을 겁니다

찬사와 야유를 퍼붓던 사람들 모두 나의 건강을 염려하기 시작합니다 돌이라니 어쩌자고 그런 것을 먹으려는 거야? 죽으려는 거야? 하고 울고 있습니다 사람을 녹이면 무슨 색깔일까요

생각을 멈추지 않습니다 오래된 돌의 기억이 머리 위로 쏟아집니다

부유물이 많고 투명합니다

 

돌을 씹어먹는 다른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해변에 남기로 합니다

누군가 나를 향해 미소 짓는다면

저요? 저 말이에요? 혼자 열심히 쪼개지면서요

 

 

*외젠 기유빅, 「만약 언젠가」(『가죽이 벗겨진 소』, 이건수 옮김, 솔, 1995)에서.

같은 말을 두 번씩 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소심한 성격 탓에 목소리가 작아 사람들이 제 말을 되묻는 일이 잦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제가 하는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할 거란 불안이 있습니다. 듣는 사람이 지루할 걸 알면서도 같은 말을 반복하게 되고, 혹시 오해가 있을까 싶어 한번 나눈 대화를 오래 곱씹습니다.

이 시의 화자는 돌 씹어먹는 염소입니다. 염소는 둘밖에 없는 상황에서 두 번씩 웁니다. “저요? 제 손요? 자꾸 한번 더 묻”습니다. 물론 별 뜻 없는 습관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염소를 격려하다가도 말귀 어두운 멍청이라며 걷어찹니다. 말의 바다에서 “혼자서 두 번씩 첨벙첨벙하”는 염소의 모습이 마치 저를 보는 듯해 웃음이 났습니다.

시인은 프랑스 시인 외젠 기유빅의 문장을 빌려 이렇게 묻습니다. “만약 언젠가/ 돌 하나가 너에게 미소 짓는 것을 본다면,// 그것을 알리러 가겠니?” 저라면 끝내 알리러 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말한다 한들 이해시키기 어려울 테니까요. 염소는 대답 대신 돌을 먹습니다. 그것을 씹고 삼켜 녹아버릴 때까지, 사람들이 “죽으려는 거야? 하고” 물을 때까지, 그렇게 커다란 바위 하나를 다 먹을 때까지요. 그러곤 “돌을 씹어먹는 다른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해변에 남기로 합니다”.

시인은 ‘시인의 말’을 쓰다가 이 시를 완성하곤 “단어가 바닥나버렸다”고 합니다. 무언가를 말한다는 것은 그것을 온전히 씹고 삼켜 소화하는 것, 그 부유물을 머리 위에 뿔처럼 달고 평생을 기다리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번 더 말할 용기가 사라질 때마다 뿔 달린 염소를 떠올리면 도움이 될까요.

  🤍막간 우.시.사. 소식🤍

① 시믈리에 김연수 소설가, 9년 만의 소설집 출간!
구독자 님, 우시사 2회 시믈리에 김연수 소설가를 기억하시나요? 당시에 김연수 작가님이 '경영학과 교수들이 오랜 연구 끝에 알아낸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레터에서 소개했는데요. 이번에 출간된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바로 그 방법에서 시작된 이야기라고 하네요. 우시사와 작가님의 기막힌 인연, 그럼 바로 확인하러 가볼까요?👀

※ 10월 8일(토)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김연수 작가님의 사인회가 열립니다. 자세한 내용은 문학동네 인스타그램을 참고해주세요😉
② 진이정, 허수경 시인 추모재
10월 3일, 광명 금강정사에서 지낸 진이정 시인과 허수경 시인의 추모재에 다녀왔습니다. 진이정 시인의 29주기, 허수경 시인의 4주기를 기리며 두 시인이 한국문학에 남긴 정신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았습니다.

진이정 시인의 복간작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가 어제 문학동네포에지로 출간되어 독자분들을 다시 찾아뵙습니다. <우시사>에서 많은 시믈리에가 추천한 허수경 시인의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도 함께 읽어보면 어떨까요?
💗방원경 편집자가 사랑하는 두번째 시💗

 

치와와 (유계영,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

 

 

이리 온

누군가 나를 쓰다듬고서

커다란 눈알 두 개를 박아두었다

상상의 목이

오른쪽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를 주목하지 않는 사람들을 망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안녕히 계세요

끝인사를 마치기도 전에

내 삶부터 앞다투어 망가지고 있음을 느꼈다

착하디착한 신 때문에

 

눈동자를 뒤적이면 각진 구름이 짝다리를 탈탈 털며

눈물을 꾸며내고 있다

 

이리 온

누군가 나의 이마에 두 개의 점을 찍고 가버렸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자꾸만 되돌아갔다

 

여기가 숨구멍이니?

이마에 난 두 개의 점을 꾹꾹 눌러보는 손가락

나는 외로운 안테나를 쫑긋거리며

방금까지 말하기의 어려움에 대해 한참 떠들었는데요. 실은 두어 달 전부터 뿔 달린 염소 대신 개 한 마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틈날 때마다 개의 특성을 기록하고 있는데 어느덧 메모장이 꽤 빼곡해졌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사소한 내용입니다.

 

8월 17일: 다른 개를 발견하면 멀리서 멈추거나 엎드림. 약간 긴장하면서도 같이 놀고 싶어하는 것 같음.

9월 12일: 보이는 곳에서 ‘이리 와’ 하면 잘 안 오는데 시야 밖에서 부르면 찹찹 소리내며 달려옴.

9월 25일: 뭐든지 잘 먹음. 여태 안 먹은 건 당근과 강아지용 시리얼.

10월 2일: 산책 후 왼쪽 앞발 닦는 데 거부감 있었는데 어제부터 얌전히 잘 닦음.

 

인간의 말이 통하지 않을뿐더러 짖음이 없다시피 한 개라 온 감각을 곤두세워 개의 표정과 행동을 살피게 됩니다. 이런 사소한 관찰이 쌓이다보면 제 개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조금이나마 더 알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말수 없는 개와 말수 없는 인간. 「치와와」를 다시 읽으며 우리가 잘 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입이 아닌 “커다란 눈알 두 개”란 생각을 했습니다. 오른쪽이 아닌 왼쪽을 바라보는 능력, 서로를 향해 “외로운 안테나를 쫑긋거리”는 노력이 필요하다고요. 그건 개와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얘기는 아닐 겁니다.

📢 다음주 <우리는 시를 사랑해> 시믈리에
다음주 시믈리에는 KBS 이상협 아나운서입니다. 시집 『사람은 모두 울고 난 얼굴』을 펴낸 시인이기도 하죠. 매일 밤 진행하는 클래식 FM <당신의 밤과 음악사이> 시인의 의자 코너에서 매일 한 편씩 시를 소개하고 있는 이상협 아나운서가 고른 두 편의 시는 무엇일까요? 다음 주 수요일을 기대해주세요.
💛우.시.사의 시믈리에가 되어주실 분 🙋‍♀️💛

우시사 독자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시가 있다면 아래 링크의 양식을 작성해 제출해주세요.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하나씩 꺼내어 우시사 독자분들께 대신 소개해드릴게요.
  
💌지난호 우.시.사.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

💬다양한 시인의 시를 맛보기하듯 폭넓게 체험할 수 있다.

💚의견 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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