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초는 아마 2월 둘째 주부터 손대지 않은 다이어리를 다시 만지작거릴 마지막 기회입니다. 4월에 재개하려면 좀 기분이 안 나잖아요. 띄엄띄엄 사는 인생이라도 응원받고 싶은 마티 식구들과 달리 계속하기를 쉬이 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작심삼일을 3일에 한 번씩 반복해서 365일을 살면 그것도 끈기라고 말하는 친구가 있고, 어떻게 작심을 했는데 3일밖에 안 가느냐고 진심으로 의아해하는 작가도 있습니다. “일은 다해야 끝나”라는 말을 그닥 비장하지 않게 내뱉던 전 직장 동료도 기억 나네요. 계속하기를 질려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 사람들.

계속 쓰기: 나의 단어로』를 대니 샤피로도 그렇습니다. 파도가 쉬지 않듯 대니 샤피로도 쉬지 않고 씁니다. 마티의 각주도 쉬지 않습니다. 늦었지만요. 그래도 목요일이 가기 전에 띄웁니다.

다 울었니? 그럼 계속 쓰자

🧼 퐁퐁


글을 쓰려고 앉았다면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몇 가지 있다. 전화 받지 않기. 이메일 확인하지 않기. 철자가 헷갈리는 단어 확인을 포함해서 어떤 이유에서건, 그리고 글쓰기를 미룰 뿐인 자료조사라는 미명 아래 인터넷 접속하기 않기. 인물이 운전하는 차가 정확히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연식은 어떤지 하필 지금 꼭 알 필요가 있을까? 주간 고속도로에서 어느 출구로 나가야 휴게소가 있는지 꼭 알아야 할까? 좀 기다릴까? 보통은 기다려도 된다. 덜 그럴듯하지만 지금 당장 책상 앞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충동이 수반된 강력한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구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빨래, 빵 굽기, 장보기, 보험금 청구서 작성, 감사장 쓰기, 옷장 정리, 파일 정리, 제초, 문지르고 광내고 정리하고 얼룩 지우고 개 목욕시 키기.


앉자. 앉아 있자. 어렵겠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도 안다.

대니 샤피로가 되뇌는 주문 같은 말을 웅얼거리며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인생의 벼룩들과 대선으로 어지러운 마음을 뒤로한 채요. 거친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 울었니? 이제 할 일을 하자" 어디선가 이런 말이 들려오는 것 같아요.)

마음을 뒤흔드는 크고 작은 파도가 쉬지 않고 들이치는 와중에 매일의 할 일을 한다는 것은, 계속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때로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아 어제처럼 오늘도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퍽 위안이 되기도 합니다. 대니 샤피로는 아침 일찍 일어나 글을 씁니다. 온갖 일들로 산만해지기 전에 중심을 잡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거죠. 그렇지만 베스트셀러를 여러 권 쓴 소설가에게도 매일 책상 앞에 앉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계속 쓰기: 나의 단어로』에서 대니 샤피로는 글 쓰는 일, 글 쓰는 사람에게 씌워진 어떤 거품과 환상을 살포시 걷어냅니다. 글쓰기는 어느 날 갑자기 영감이 찾아와서 일필휘지로 쓸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멋진 작업실에서 우아하게 타자기를 두드리면 빈 페이지가 절로 채워지는 일도 아니에요. 학위가 있어야만, 누군가에게 허가를 받아야만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대니 샤피로는 "글을 쓰는 사람이란 자기 자신에게 허가를 주는 방법을 찾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기꺼이 혼자가 되어서 자신에게 새겨진 고통을, 강력한 감정을 들여다보는 사람, 멈추지 않고, 멈췄더라도 다시 시작하고, 다시 시작했다면 포기하지 않고, 포기했더라도 결국은 끝장을 보는 사람이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요.

사뭇 비장해진 것 같지만, 그는 먼저 자신의 글 쓰는 생활을 담백하게 털어놔요. 매일 반복되는 강력하게 지루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 허가를 내주었는지 이야기하죠. 파도에 휩쓸려 가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쓰면서,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끝이 있을까 싶은 이 작업에서 지치지 않도록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 버지니아 울프, 애니 딜러드, 사뮈엘 베케트, 랠프 월도 에머슨, 존 업다이크, 디킨슨, 포크너, 도로시 파커 등 — 들을 불러오기도 하면서요. 기꺼이 혼자가 되어서 아직도, 여전히, 계속 쓰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요. 그 자신도 계속 쓰면서, 계속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다정한 안부와 다짐하는 마음을 전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 파도로부터 도망치려고 하지 말 것. 우리는 파도를 인지하고, 그 힘을 받아들이고, 심지어는 파도 타는 법을 배우고 싶다. 우리는 거친 파도를 견디는 법을 배우고 싶다. 우리가 알아야 할 전부는, 가치가 있는 전부는 그 안에 들어 있으니까.

인사해요, 이쪽은 대니 샤피로 작가님. 『계속 쓰기』 저자예요.

아, 저는 작가님을 『존재의 속도』에서 만났어요.

🌱 죽순


어느 날, 뉴욕공립도서관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제목과 부제가 모두 끌리는 책을 한 권 발견했습니다. 존재의 속도: 어린 독자들에게 보내는 편지』(A Velocity of Being: Letters to a Young Readers). 책이, 독서가, 어떻게 자신의 인생을 만들고 망가뜨렸는지(!)를 쓴 편지들을 엮은 책입니다.

이름만으로 ‘환경’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영장류학자이자 환경운동가 제인 구달, 환상의 그물망으로 현실을 끌어올리는 작가 어슐러 K. 르귄, 세계적인 첼리스트 요요마부터 98세의 홀로코스트 생존자, 우주비행사, 해양학자 등 50여 명이 편지를 썼어요. 책의 수익금은 전액 뉴욕공립도서관 운영비에 쓰인다고 해요. 올 여름에 마티에서 출간될 도서관은 살아 있다』(가제) 원고를 읽다 보니, 미국에서는 도서관을 위한 시민 후원이 활발하더라고요. 이 책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프로젝트일 것 같아요. 참, 이 책을 기획하고 엮은 이는 진리의 발견』을 쓴 마리아 포포바입니다. 

취미가 독서인 사람, 책을 읽으며 쾌감을 느끼는 사람이 줄어드는 것을 체감하며 침체돼 있을 때 존재의 속도』를 만났고, 띄엄띄엄 영어로 쓰인 편지들을 읽었습니다. 세상 유명해서 익히 아는 이들의 편지였으면 외려 감흥이 떨어졌을 텐데, 미국에서는 이름깨나 날리는 인물일지라도 제 눈엔 그저 책을 좋아하거나 책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들의 편지인지라 눈길이 오래 머물렀던 것 같아요.

여기에 대니 샤피로가 있었습니다. 여느 사람보다 편지 길이는 짧았는데, “읽는 동안의 그 정적 속에서 나는 태어났어”라는 고백이 저를 잡아챘어요. 다들 있지 않나요? 어떤 문장이 머릿속에 새겨지면, 그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이요. 오묘하고 뭐라 형언하기 힘든 그 순간은 이렇게 형체를 갖는구나, 싶었어요. 

계속 쓰기: 나의 단어로』를 쓴 대니 샤피로와 만난 첫 순간을 떠올리며, 그가 쓴 편지를 옮깁니다. 



💌 아직 당도하지 않은 나의 친구에게,


난 아마 널 알 수 없겠지. 우리가 같은 순간을 살고 있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내 얘기를 들어줘. 


책은 내 삶을 구했어. 손가락이 페이지를 넘길 때 까칠까칠한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없는, 읽는 동안의 그 정적 속에서 나는 태어났어. 해먹 안에서 보낸 여름 오후의 고요 속에서, 손전등을 켜고 이불 밑에 기어 들어가 보낸 겨울밤의 적막 속에서, 서서히 하지만 틀림없이, 난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 내가 이상한 아이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지. 내 마음이 다른 모든 이와 유별나게 다르지 않다는 것도. 책을 읽을수록 나는 덜 부끄러워졌고, 덜 이상해졌고, 덜 다르다고 느꼈어. 내 인간성에 나를 깊이 연결시켜줬어. 이게 책이 내게 준 거야.


책은 빛나지 않아. 소리도 안 나고 링크도 안 걸려. 넌 책을 서핑하거나 클릭할 수 없어. 언뜻 보기엔 지루할 정도로 단순하지. 넌 궁금할 거야. 책이 대체 뭘 하는데? 그 안에 날 위한 게 있어? 공간을 차지하고 앉은 원시적인 종이 더미. 단어들, 그냥 단어들! 줄줄이, 이것 다음에 다른 것, 흰색 위에 검정색 자국들. 책은 조개껍데기나 갈색 유리병이나 휴가 때 찍은 가족 사진이랑 같이 선반 위에서 먼지나 끌어안고 있을 뿐일지도 몰라.


그래도 책을 가까이에 두렴, 나의 어린 친구야. 언제나 손 닿는 곳에. 책엔 세계 전체가 있으니까. 흘러 넘치지, 경이롭고, 다채로워. 네 상상을 거뜬히 뛰어넘을걸. 네가 그 세계를 열길 기다리고 있어.

― 대니 샤피로.

❝ 소설가의 에세이 ❞

👂 팔랑
장정일의 독서일기』(절판)

일기는 일기장에, 라는 일종의 면박은 이제 "아니 왜?"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일기를 레터로 발행하고 책으로 엮고 낭독하는 시대잖아요. 일기는 이제 에세이의 주요 장르가 되었습니다. 애초에 소설가 장정일이 시작한 일이죠. 93년 첫 "독서일기"를 출간한 이후, 출판사가 바뀔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고 일기가 서평의 형식을 입긴 했으나, 최초의 독서일기는 그야말로 일기였습니다. 장정일은 자다가 읽고 밥해 먹다 읽고 술 마시다 읽고 책방을 기웃거리고 사람을 만나다 읽습니다. 한두 줄 넘기고는 신소리 집어치우라며 덮기도 하고 아아아 장탄식하며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책도 부지기수죠. 그는 책과 살고 책으로 삽니다. 책을 사고 책을 쌓고 책을 닦고 책을 씁니다. 어쩌면 그것만 합니다.

저는 지치다가 꺾이다가 주저앉다가 간혹 그에게 연락을 합니다. 그러면 그는 허허 허허 희망도 개의치 않고 책을 읽거나 쓰거나 합니다. 내내 계속 매일 끈질기게.


🔊 모베
토마스 만의 『예술과 정치: 반지성주의를 경계하며

1875년생이니 토마스 만은 꽤 옛날 사람입니다. 니체가 죽었을 때 이미 25살이었고, 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지도 곧 100년이 됩니다(1929년 수상자). 이 책에 실린 글의 집필 시기는 1차 세계대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히틀러가 집권한 1933년 58세였던 그는 망명길에 올라 스위스를 거쳐 미국에서 자리를 잡습니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독일에서는 대문호가 돌아와 국가에 기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그런데 만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부하며 「내가 독일에 돌아가지 않는 이유」를 써 발표합니다.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에서 인쇄될 수 있었던 책들은 무가치하고 손에 쥐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것에는 피와 치욕의 냄새가 배어 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폐기되어야 할 것들입니다”라고 말하면서요.

🧼 퐁퐁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이 쓴 소설, 에세이, 르포르타주 중에서 맨앞에 놓고 싶은 것은 에세이입니다. 쓰고 말하고 지지하고 맞서는 것이 얼마나 정치적 행위인지 날카롭게 써내려간 글들. 그의 소설이 어디서 출발했는지, 왜 르포르타주를 쓰며 계급 문제는 감상적인 접근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외쳤는지 이해할 수 있어요.


🦈 조스바
프란츠 카프카의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어쩌면 나와 아버지의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이 편지를 상당히 몰입해서 읽었습니다. 카프카와 아버지의 내밀한 관계 속에 그의 작품세계도 들여다볼 수 있어요. 교육, 유대주의, 직업, 결혼 등. 엄청난 애증관계가 느껴지기도 하지만, 아버지와 자신을 인간 대 인간으로서 면밀히 탐색한 이 편지는, 카프카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 죽순
토니 모리슨의 보이지 않는 잉크
묵직한 책입니다. 두꺼워서가 아니라 글 하나하나의 무게가 그렇습니다. 흑인 여성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토니 모리슨은 백인 사회의 인종주의를 비난하기보다 흑인의 정체성을 세심하고 정교하게 회복하는 데에 중점을 둔 소설들을 썼습니다. 『보이지 않는 잉크』는 흑인 여성 소설가가 표준 영어에 속박된 글쓰기를 할 때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지, 단어 하나가 어떻게 책 전체를 와해시킬 수 있는지, 독자의 섬세함이 작품을 완성하는 데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 등 토니 모리슨의 쓰기와 읽기, 인종과 젠더에 대한 폭넓은 사유를 보여줍니다. 바다출판사의 책 소개처럼 "이 책은 토니 모리슨이라는 작가가 소설가라는 틀로만 소개하기에 생각의 몸집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알 수 있는 기회"입니다.
❝ 바흐 칸타타 함께 들어요 ❞

지난 달 마티 사무실에 둘러앉아 바흐 칸타타를 함께 듣는 시간이 참 좋았어요. 그래서 세 번째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떤 곡을 들을지 고심하며 곡을 선정하고 있어요. 이번에도 각주* 구독자들만 모십니다. 3월의 칸타타를 함께 들어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교회 칸타타』를 살펴보면서 함께 듣고 싶은 곡이 있으면 신청폼에 적어주셔도 좋아요.


✳ 일시: 2022년 3월 22일 저녁 7시 30분
✳ 장소: 서교동 마티 사무실 (마포구 잔다리로 127-1 8층)
✳ 신청: 구글폼 👈 클릭 (무료 & 10명 추첨)
이번 주 마티의 각주* 어떠셨나요?

책 좋아하는 친구가 떠올랐다면?
도서출판 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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