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가 ‘논리’의 옷을 입을 때

혐오가 ‘논리’의 옷을 입을 때

La parole manupulée

저자 김스피

(Authors) Kim, Supi

출처 인스피아 저널, (35), 2022.4.6, 1-8 (8pages)

(Source) Journal of the Inspia

지난회차 https://page.stibee.com/archives/107426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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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혐오, 차별, 시스템, 국민전선, 재일조선인

1.머리말

2.정치인이 말하자 혐오폭력이 늘었다

3.미끄러지는 말들 : “사건 아닌 사고”

4.맺음말

【1.머리말】

안녕하세요. 연구자님.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김스피입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장애인 이동권 권리 보장 등을 요구하며 출근길 지하철 ‘탑승 시위’를 진행해왔습니다. 지난달 29일 인수위와의 만남 이후 잠정적으로 시위 방식을 바꾸었지만, 여전히 불씨는 남은 상황입니다.(링크)

조금 갑작스러울 수 있지만 근래 제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질문 하나로 레터를 시작해볼까합니다.

‘혐오 발언’이란 무엇일까요?

지난달 30일 이준석 대표가 페이스북에 올린 “사과 안한다. 뭐에 대해 사과하라는 건지 명시적으로 요구하라”는 말을 본 뒤부터 줄곧 머릿속을 맴돌았던 물음입니다. 그가 장애인 혐오 발언을 했다는 지적에 대한 반박이었습니다.

이 대표는 자신이 하는 말이 ‘장애인 혐오’가 아니라 ‘불합리한 운동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일 뿐이며 ‘장애인은 출입문 취급 이슈에 있어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취급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정당하고 논리적인 주장일 뿐 혐오 발언이 아니라는 것이죠.

되레 그는 5일 라디오에 출연해 “장애인을 혐오하지 않는다”며 “(나에게) 혐오 프레임을 씌우려 했던 전장연이 사과한다면 받아줄 의향은 있다”고 말했습니다.(링크)

그런데 그가 스스로 “혐오 발언을 안했다”고 하는 것은 판단의 기준이 될 수는 없어보입니다. 역사적으로 정치인들 가운데 “나는 혐오를 하고 있다!”라고 스스로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홀로코스트를 부정하고 알제리를 테러 국가라고 하는 등 망언을 일삼은 프랑스의 극우주의자 장 마리 르펜이나, 재임 기간 중 수많은 소수자 혐오 발언으로 인해 여론의 뭇매를 맞은 트럼프 등 역시 마찬가지였죠. 그들 각자에 따르면 그들은 혐오 발언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항상 각자의 논리가 있었습니다.(“이주민, 흑인은 위험하다” “유태인들은 믿을 수 없다” “아시아인들은 코로나에 책임이 있다”)

<fig.1> 트럼프가 2021년 연설 이전 원고에 적힌 '코로나' 바이러스에서 '코로나'를 지우고 '차이니즈'라고 적어둔 사진(왼쪽), 트럼프의 발언 이후 미국 내 아시안 대상 혐오 범죄가 급증하자 시민들이 아시안혐오를 멈추라는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WP / Getty image

정치인의 어떤 ‘논리’는 차별과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지난해 3월 트럼프 전 대통령은 “코로나는 중국 바이러스”라고 말했습니다. 텍사스 출신 존 코년 상원의원은 “(코로나 상황에 대해) 중국을 비난해야 한다”고 외치기도 했죠.

이후 실제로 미국 내 아시아계에 대한 폭행 사건이 급증했습니다.(링크) 트럼프의 발언은 사회적으로 아시아인은 동등한 ‘우리’에 속하지 않으며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결과적으로 미국에 사는 아시아인들은 단지 아시아계라는 이유로 구타, 모욕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트럼프가 자신의 말을 스스로 혐오 발언이라고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간에, 그의 말이 품은 메시지는 혐오가 용인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낳았고, 혐오자들이 자신의 혐오를 행동으로 표출할 ‘용기’를 주었습니다.

혐오는 혐오의 옷을 입고 나타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정치인이 스스로의 말을 혐오 발언으로 인정하느냐보다도 그의 발언이 사회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이냐입니다. 우리가 정치인의 ‘말’ 그 자체가 아닌, 그 말이 던지는 파장을 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오늘 레터에선 정치인의 ‘점잖은’ 혐오 발언이 어떻게 차별 시스템의 핵심 연료가 되는지를 살펴본 <혐오표현은 왜 재일 조선인을 겨냥하는가>(량영성)와 혐오 발언이 어떻게 ‘논리’의 옷을 입는지를 파헤친 <조작된 말>(피에르 브르통)을 지팡이 삼아, 혐오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생각해볼까 합니다.

【2.정치인이 말하자 혐오폭력이 늘었다】

최근 애플TV플러스의 드라마 <파칭코>로 재일조선인에 관심 갖게 되신 분들이 많으실텐데요. <파칭코>는 소설 원작으로 재일조선인 일가의 파란만장한 역사와 삶에 대해 그리고 있습니다. 재일조선인들이 ‘파칭코’ 사업에 많이 종사한 이유는 일본 내에서의 뿌리 깊은 차별로 인해 재일조선인들이 정상적인 직업을 얻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차별이 극심했다는 것이죠.

재일조선인 3세이자 차별 반대 활동가인 량영성의 <혐오표현은 왜 재일조선인을 겨냥하는가>는 “일본의 정치인들이 어떻게 ‘점잖게’ 재일조선인에 대한 혐오를 승인, 조장해왔는지”를 구체적인 사건들을 통해 풀어낸 책입니다.

<fig.3> 애플TV플러스에서 방영 중인 재일조선인에 대한 드라마 <파칭코>(왼쪽), '일한국교단절하라'라고 시위하고 있는 재특회(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의 모습. 애플TV+/연합뉴스

저자에 따르면 ‘혐오는 시스템’입니다.

우리는 통상 혐오자가 있다면 그 개인이 ‘범죄자’ ‘유별난 사람’인 것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보면 ‘점잖은 정치인’들의 발언이 사실상 대중의 혐오의 연료가 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게 됩니다. 아무리 개인이 마음 속으로 “나는 재일조선인들이 아주 싫어”라고 생각해도 만약 사회적으로 그런 발언, 폭력이 용인되는 분위기가 아니라면 그는 마음 속이나 익명으로 밖에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나서서 제도적, 발언 등을 통해 이를 용인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면 그는 그것을 현실에서 ‘실행’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사실상 일본의 정치인들이 나서서 재일조선인 혐오의 ‘스위치를 켜온’ 역사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이 제노사이드 선동을 공공연하게 외치는 가두시위에 대규모로 축제를 즐기는 기분으로 참가한다. 반차별 규범이 전혀 없기 때문에 무엇이 차별인지가 ‘보이지 않는’ 것도 하나의 원인이다.

-량영성, <혐오표현은 왜 재일조선인을 겨냥하는가>

정치인들이 직접 나서서 “재일조선인들을 혐오합시다!”라고 말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대신 정치인들은 자신의 모든 행동과 발언을 통해 ‘재일조선인들이 결코 일본인과 동등한 권리를 지닌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미디어를 통해 보여줍니다. 이는 사회적으로 폭력과 차별을 용인하는 분위기를 낳고 그 과정에서 재일조선인들은 안심하고 거리를 걸을 권리, 공부할 권리를 침해당해도 마땅한 존재로 여겨집니다.

<fig.3>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까지 주로 발생한 '치마저고리 사건'을 표현한 전시물 <찢긴 치마저고리>(94.6.24).(왼쪽) 재일동포 3세 최강이자씨가 2016년 6월 일본 가와사키에서 일어난 일본 우익들의 혐한시위에 맞서 항의발언을 하다가 울음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조선신보사/연합뉴스

한 예로 1960~70년대 일본 고등학생들에 의한 노골적인 조선고교생 습격 사건으로 많은 조고생들이 피해를 입었지만, 사토 에이사쿠 당시 일본 총리는 이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기는 커녕 되레 문제의 원인을 재일조선인 학교, 교육에 돌리는듯한 발언을 합니다.

그는 재일조선인 학생이 받은 피해에 대해 말하는 대신, 점잖고 논리적으로 재일조선인이 일본인과 동등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없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식민지를 해방하고 독립한 것이다, 독립된 교육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것이라면 그 나라에서 하면 된다. 여기는 일본이고, 일본까지 그것을 요구당할 필요는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1965.12)

이런 정치인의 태도는 고스란히 일선 경찰에게도 전달이 되었습니다.

경찰은 나서서 ‘조선학교 학생들이 떼지어 일본 학생들을 위협한다’는 출처도 알 수 없는 유언비어를 그대로 퍼트렸습니다. 1970년 경시청은 “6월 6일에 조선 고등학생들이 일본 학생들을 습격한다고 하니 각 학교는 주의하라”는 통보를 내렸고 이에 일선 학교들이 패닉상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고등학생들은 ‘신변의 위험을 느꼈다며’ 아무런 관련이 없는 조고생들을 상대로 ‘선제-자기방어’를 실시했죠.

정작 일본인 학생들에게 피해를 당한 조고생들은 폭력을 당하거나 위협을 느껴도 경찰에 신고하지 못했습니다. 혐오를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주변 인물들 역시 ‘실제로 조고생은 위험하니까...’라는 생각으로 폭력을 방관하고,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을 보다 보면 ‘대체 이 혐오의 연쇄 시스템 속에서 위험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밖에도 다른 혐오 범죄들이 이어질 때마다 이런 연결고리만큼은 무서울 정도로 유사하게 반복되는데요.

이후 조선학교 여학생들의 옷을 찢거나 폭행한 ‘치마저고리 사건’이 유행할 당시, 자민당 의원이 “조총련은 위험한 단체인가?”라고 물어 재차 확인한 국회 질의가 미디어에 크게 보도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뇌리엔 북한-조총련-재일조선인-위험이라는 연결고리가 강화되었죠.

당시 한 기자는 고토 마사오 당시 법무장관에게 “국회에서 공안조사청이 조총련을 '위험한 단체'라고 인정한 것이 이지메(치마저고리 사건)의 원인 아닙니까?”라고 묻자 그는 말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죠. 만약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았던 일(혐오 범죄)이 일어났다고 하면, 국회에서의 질의응답이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겠죠.”

저자는 정치인의 발언이 직접적인 폭력과 이를 방조하는 시민들을 낳고, 결과적으로 이들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시스템을 갖지 못하게 된 것이 재일조선인 혐오의 역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정치인들 가운데 “재일조선인은 인간이 아닌 괴물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혐오 발언은 그런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항상 문제의 본질이 아닌 부분을 짚는다거나, 거짓 정보 등으로 맥락을 어지럽힘으로써 ‘논리적으로’ 차별의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3.미끄러지는 말들 : “사건 아닌 사고”】

“그는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선택하지 않았다. 모자나 옷을 선택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입는 것을 자동적으로 입고 다녔던 바로 그런 것처럼, 그 의견들이 자동으로 그에게 왔다. 이처럼 자유주의는 그에게 하나의 습관이 되었고, 식사 후에 시가를 아주 좋아한 것처럼, 그는 신문을 그저 좋아했다. 이것은 그가 자기 뇌 속에서 만들어 대던 가벼운 안개 때문이다.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리나>”

프랑스 사회학자 필리프 브르통이 쓴 <조작된 말>은 어떻게 정치인이 ‘그럴듯하게 조작된 말’로 민주주의의 근간을 무너뜨리며, 혐오와 차별을 정당화하는지를 분석한 책입니다. 브르통은 이 책에서 광고와 정치적 선동 속 수사학(‘말의 기술’) 기법을 낱낱이 분석합니다. 이런 기법을 통해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처럼 정치인들의 선전을 자신의 의견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죠.

이 책에서 다뤄진 대부분의 정치적 기술은 광고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요. 20세기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한 광고는 고대 로마로부터 이어지는 정치인들의 수사학에 깊게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특히 이 책에서 제 눈길을 끈 부분은 브르통이 프랑스 극우정당인 국민전선의 전 대표 장 마리 르펜의 ‘논리적인 혐오’를 조목조목 뜯어 분석하는 대목이었습니다.(서문을 읽어보면 이 인터뷰를 분석해서 르펜의 논리를 격파해내는 것이 어쩌면 이 책의 집필 목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르펜은 1995년 TV쇼에 출연해 국민전선 소속 청년의 명백한 이주민 대상 혐오 범죄(살인)를 두고서 “사건이 아닌 사고”라고 주장했습니다. 살인이 문제가 아니라 위험을 자초한 이주 정책이 문제라는 것이 그의 논리의 핵심이었습니다.

<fig.4> 프랑스의 극우 정당 국민전선의 설립자이자 전 총재 장 마리 르펜. 그는 현재 프랑스 국민전선 대통령 후보인 마린 르펜의 아버지이자 프랑스의 대표적인 극우주의자이기도 합니다(왼쪽) 프랑스 세인트 에티엔느 지역 소재 모스크에 적힌 무슬림 혐오 낙서 앞으로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는 모습. AP

브르통이 분석한 바에 따르면 그의 짧은 인터뷰에서 최소 무려 19개의 인지, 정서적 조작 기술들이 발견되었는데요.

이 책에 등장한 르펜의 논리적인 정당화 기술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해보겠습니다. 우선 그는 ‘가해자’를 피해자화하면서 시작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특히 (그 사건을) 살인으로 규정짓지 말기를 바랍니다. 살인이라는 것은 프랑스 형법상의 매우 특별한 용어이지요[...]저는 ‘사고’라고 말했어요.”

“쌍방이 희생자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방어를 하다 일어난 비극입니다.”

-필리프 브르통, <조작된 말>(이하 동일)

르펜이 ‘쌍방이 희생자’라고 한 이유는 이주민을 살해한 살인범을 피해자화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살인범 역시 희생자라는 건데요. 왜냐면 해당 지역에 이민자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슬럼가를 위험하게 만들었고 이런 위험 때문에 살인범들은 평소에도 흉기를 지니고 다니면서 ‘두려움에 떨며’ “자기방어”를 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즉 이 논리에 따르면 순식간에 살해당한 이민자(피해자)가 되레 가해자가 되어버리죠.

이 대목을 읽으며 저는 장애인 시위에 ‘볼모 잡혔다는’ 수백만 서울시민이 떠올랐습니다. 이민자들이 단지 그 장소에 살고 있는 것이 치안 문제의 근본 원인이 아니듯(심지어 이 경우 진짜로 '치안 문제를 일으킨' 살인범은 프랑스인-국민전선당원입니다), 장애인이 ‘일반인과 마찬가지의 이동권을 갖고‘ 단지 지하철을 타는 것이 지하철 지연 문제의 근본 원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발언은 명백한 기만입니다. 브르통은 이 대목을 ‘강압적 재배치’ 기법 등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주목할 기법은 ‘아리송하고 그럴듯한 동어 반복’입니다.

르펜은 교묘하게 방향을 틀어 ‘이민자’가 문제가 아니라 ‘이민’이 문제(?)라고 말합니다. 즉, 이민자는 설령 죄가 없을지 몰라도 마구잡이로 이민자들을 받아들인 이민 정책 입안자, 이민에 우호적인 정치인들이 문제라는 거죠.

“거기(사건이 발생한 지역)는 이민 현상과 관련된 매우 심각한 긴장이 존재하는 지역이란 걸 사람들은 잘 알아요. 저는 여기서 정의의 수호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 항의 시위의 선두에 서는 사람들, 20년 동안 우리나라에 천명의 이민자들을 끌어들인 정치 책임자들을 규탄하고 싶습니다.”

이에 대해 제가 아리송하고 그럴듯한 ‘동어반복’이라고 말한 이유는, 결국 결론은 똑같기 때문입니다.

위의 말은 얼핏 봤을 때 이민자를 배려하고 문제의 ‘본질’에 집중하는, 제법 사려깊은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을 찬찬히 뜯어봤을 때 결과적으로 이민자들이 그곳에 살고 있는 것 자체를 문제시한다는 점에는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곳에 살고 있는 한 극우주의자에게 살해당하더라도 그것이 ‘사건’이 아닌 정당방위이자 ‘사고’에 불과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브르통은 분석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르펜의 말에 따르면) 그 폭력은 이민이 불러온 것이다. 결국, 살인자들은 외국인들에 희생된 자이고 살해당한 외국인은 스스로의 희생자이다. 이렇게 조작된 상황은 방향이 완전히 바뀐다. 즉, 살인자들은 그들의 동네에 있었기 때문에 희생자들이고, 희생자들은 외국인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겪은 일은 전적으로 그들의 책임이다. 다음의 사실을 기억하자. 그 상황과 관련 없는 어느 청년이 국민전선의 벽보를 붙이던 두 사람에 의해서 어느 날 밤 등뒤에서 공격을 당해 사망했다.

어떤 말이든 일견 그럴듯해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부분은 ‘조작된 말’이 아닌 ‘말이 가져올 결과’입니다.

우리는 이 책에 나온 ‘조작된 말’의 기술들을 활용해 거꾸로 정치인들의 혐오 정당화 발언에 대응하는 무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위에 제가 말씀드렸듯, 말의 몸통을 지우고 결과만을 남기는 것입니다. 혐오 발언이 등장한다면 무작정 귀를 기울이는 대신 먼저 이런 태도를 가지고 브르통처럼 분석하며 들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일단 됐고, 그래서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의 결론이 뭡니까?”

【4.맺음말】

프랑스 기자 베르트랑 푸아로 델페슈는 과거 <르몽드>에 몇몇 단어들의 의미와 관련된 긴 '정오표(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표)'를 실었습니다. 그 정오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었습니다.

“노숙자들을 죽이는 것은 추위가 아니라 비참함이다. 공기를 오염시키는 것은 고기압권이 아니라 자동차다...”

단어를 바꾸어 2022년 한국 버전의 정오표를 떠올려봅니다.

“지하철을 늦게 하는 것은 장애인이 아닌 장애인의 존재를 지워낸 교통이다.”

레터 서두의 물음표로 되돌아가봅니다. 이준석 대표는 “혐오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의 말들의 껍질을 벗기면 결국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장애인은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살아갈 권리가 없다’는 결론 뿐입니다.

그는 장애인 이동권 시위가 시민의 이동권을 ‘볼모잡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있어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지금까지 살던대로 슬픔과 어려움을 겪으며 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한 사회의 시민으로 산다는 것은 누군가가 ‘더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라고 떨쳐일어날 때 서로 조금씩 서로의 볼모가 되어주는 일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전혀 서로의 적이 아닙니다.

사이에 끼어든 것은, 막상 뜯어보면 취약한 말 한겹일 뿐입니다.

※레터를 쓰며 읽은 책, 이 주제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들이 추가로 읽을만한 서적 등을 추천합니다.

필리프 브르통, 박선희 옮김, 『조작된 말』,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2020.

-프랑스 사회학자가 고대 로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수사학의 역사를 짚으며 현재의 상업적 광고, 정치적 선동까지 '조작된 말'에 대해 분석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어판은 1990년대 후반에 나왔지만 오히려 현재 상황에 소구할만한 이야기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의 결론은 조작된 말을 분석하기 위한 '독해법(리터러시)'이 필요하다는 점, 그리고 '선한 의도의 조작된 말'도 거부해야 한다는 점이었는데요. 후자의 경우 '조작' 자체가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본문에서는 직접적으로 다루지 못했지만, 프랑스 대선도 일주일 남짓으로 다가왔는데요. 이번에는 장 마리 르펜의 딸인 국민전선 대선 후보 마린 르펜(링크)이 꽤나 선전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링크)

량영성, 김선미 옮김, 『혐오표현은 왜 재일조선인을 겨냥하는가』, 산처럼, 2018.

-저자는 현재 일본 내 재일조선인에 대한 범죄가 '인종범죄'라고 정의하며, 일단 차별의 문제를 가시화하는 것부터 시작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책의 특징은 혐오 범죄를 단지 '일부 극우주의자들의 일탈'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제도, 정치인의 발언, 미디어 등의 시스템 안에서 바라보았다는 점입니다. 설령 정치인의 발언 자체가 노골적인 혐오를 나타내지 않을지라도, 그것을 조장하는 단순한 행동, 발언 하나가 미디어에 의해 증폭되면서 폭력을 조장할 수 있다는 분석이 타당하며 다른 사례들에도 적용할만하다고 생각해서 이번 회차에서 함께 읽게 되었습니다. 2019년 저자를 인터뷰한 기사가 있습니다.(링크)

서경식-다카하시 데쓰야, 한승동 옮김, 『책임에 대하여』, 돌베개, 2019.

-저명한 재일조선인 학자, 사상가인 서경식과 다카하시 다쓰야의 대담을 옮긴 책입니다. 대담의 시점은 2016~2017년입니다. '식민주의를 지적당해서, 과도한 정의 때문에 피곤한 나의 고통'을 호소하는 일부 일본 리버럴 지식인의 언어 오용, 착취에 대항해 정당하게 피해자와 가해자를 가려내고 분명한 '책임'을 묻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로 일본의 전쟁 책임, 탈내셔널리즘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 레터의 전반적인 내용과는 다소 동떨어져보일 수 있겠습니다만, 탈내셔널리즘의 '그럴듯한 논리 껍데기'가 책임 회피를 위해 어떻게 이용되는지의 경계를 치밀하게 살피는 사고 흐름을 살펴보며 우리 사회에 여전히 판단이 필요한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시비를 가릴 것인지 고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 속 한 문장🖍】

👤주제에 대해 더 읽을 만한 글들을 골랐습니다. 각 사진을 누르면 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혐오로 해결되는 문제는 없다

독서시간: 약 8분 / 글자수: 약 1800자

🖍글 속 한 문장

“혐오는 우리 사회가 처한 진짜 문제에 눈을 가리고 엉뚱한 곳에서 불필요한 싸움을 벌이게 만든다. 미국과 유럽의 극우들은 ‘먹고살기’ 힘들어졌다며 동유럽, 아시아, 중남미, 아프리카 등에서 온 이주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가 혐오에 대해 쓴 칼럼입니다. 혐오가 '현실적으로' 왜 쓸데없는 사회적 비용을 부과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본 글입니다. 홍 교수에 따르면 혐오는 진짜 문제를 외면하게 하고 허상을 만들어 공격하도록 선동합니다.

탈 수 없는 버스를 한시간동안 보내며

독서시간: 약 18분 / 글자수: 약 5200자

🖍글 속 한 문장

“중학교 3학년이던 조씨는 학교가 끝난 후 종종 엄마를 찾아 농성장으로 향했다. 장애인들은 그해 12월 1일 의정부시장실을 점거키로 했다. 시장실은 1.5층에 있었다. 이곳으로 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장애인들은 휠체어에서 내린 뒤 계단을 기어 올라갔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조은별씨(28)가 엄마 이형숙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55)에 대해, 딸의 시점에서 말하는 인터뷰입니다. 이 대표는 소아마비로 휠체어를 타게 되었고 이후 '당연한 권리'를 외치는 것조차 어려운 현실에 자연스럽게 농성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정치권이 말하는 '폭력적이고 부당한' 시위의 이면을 살펴봅니다.

두 바퀴엔 절벽같은 '28cm'

(인터랙티브 콘텐츠)

🖍글 속 한 문장

"현재 4호선에서의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시위로 인해 4호선 열차 운행이 지연되고 있습니다.-서울교통공사(2021.2.10)"

👤김스피의 블라블라

2019년 휠체어를 탄 장향숙씨는 병원에 가기 위해 승강장과 열차 사이 간격이 17cm인 신촌역에서 열차에 탑승하려다가 바퀴가 끼는 사고를 당했지만 원고 패소 판정을 받았습니다. 경향신문 인터랙티브팀이 직접 수도권 지하철 모든 역의 지하철-승강장 거리 등을 조사한 기획입니다.

장애인은 길에서도 위험하다

독서시간: 약 12분 / 글자수: 약 3000자

🖍글 속 한 문장

“정씨는 지팡이로 바닥을 짚으며 천천히 길을 가고 있었다. 갑자기 ‘부웅’ 소리가 들리더니 한 자동차가 정씨의 팔꿈치를 치고 지나갔다. 정씨는 너무 아파 주저앉았다[...]차주는 정씨에게 사과도 하지 않고 가버렸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장애인은 대중교통을 편하게 이용하지 못할 뿐더러, 길에서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좁은 골목을 다닐 때는 저조차도 조마조마할 때가 많은데, 장애인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거리를 조성하는 것은 노인, 어린이 등 모든 구성원들의 안전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회차의 감상

레터 길이가 길어져서 본문이 잘린다는 의견을 주셔서(ㅠ_ㅠ) 앞으로는 보내주신 의견 일부를 간단하게 요약해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간단한 감상, 의견도 항상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

👤“현대사회는 정말 어마어마한 정보가 매일 같이 나오고있는데[...]이때 드러날 수 있는 일종의 무서운 감정들이 한편으로는 일종의 상품으로 보여서 이런 상황과 감정을 이용한 서비스로서 3분정리와 같은 축약을 추구하는 사회현상들이 많아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읽을 거면 읽지 마라> 책이 재밌을 것 같아요!”

1. 오늘 레터는 어떠셨나요? 아래 ‘💌편지보내기’ 버튼을 눌러서 오늘 레터에 대한 감상이나 질문 등을 보내주세요. 간단한 한줄 감상도 좋고, 연구자님이 떠올리신 독특한 해찰거리도 좋습니다 :) 레터를 통해서 보내주시는 작은 격려와 의견들이 레터를 쓰는 데 큰 힘이 됩니다. 흥미로운 해찰은 레터를 통해 함께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인스피아에서 차후 다뤄볼만한 주제나 좋은 콘텐츠 등의 추천도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1.혹시 지난 회차 가운데서 '아, 이 회차에서 이 책(혹은 영화 등)을 다뤘었으면 좋았을텐데, 아깝다!'라는 생각이 드신다면 지난 회차의 주제에 대한 책이라도 추천해주시면 검토 후 레터에서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신간도 구간도 상관 없습니다. 회차명과 책 이름, 그리고 짤막한 추천 이유를 적어서 아래 '💌편지 보내기' 버튼을 통해 보내주세요. 지난 회차의 레터 내용은 아카이브 페이지(💬링크)를 참조해주세요.

SNS나 커뮤니티 등을 통해 주변에 레터를 추천해주시면 창작에 큰 힘이 됩니다. 친구에게 레터를 소개해주시려면 '구독하기' 버튼을 눌러 나오는 주소를 복사 붙여넣기 하시면 됩니다.

오늘도 레터를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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