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서 마주친 영화로운 장면

앉은 자리에서 머나먼 곳으로 향하는 방법

‘떠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 때,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연히 어디론가 향할 용기를 지닌 사람들은 아마 얼마 없을 거예요. 오늘도 어김없이 정해진 몫의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님도 그렇겠지요. 마음껏 헤매고 싶어도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나를 이름 모를 어딘가로 이끌어 줄 영화나 드라나 한 편을 골라 재생해 봅니다. 겁도 없이 모르는 곳으로 걸음을 내딛는 주인공을 응원하다 보면 앉은 자리에서도 머나먼 곳으로 향하게 되곤 해요. 오늘 뉴스레터에서는 우리를 거침없이 낯선 풍경 앞으로 이끄는 작품들을 소개한 기사를 살펴보려 해요. 《AROUND》는 이번 89호 부산(Busan)을 비롯하여 주기적으로 대한민국의 지역 곳곳을 조명해 왔는데요. 그중에서도 많은 독자분께서 아껴주셨던 44호 경주(Gyeongju)에 수록된 이야기를 다시금 꺼내어 보았습니다. 지역의 풍광을 새로운 시선으로 담아낸 세 작품과 함께 정처 없이 떠날 준비가 되셨나요? 장면이 흐르는 순간 시작되는 또 다른 여행의 기미를 감지해 보는 건 어떨까요?

06.22. A Piece Of AROUND그때, 우리 주변 이야기

도시에서 마주친 영화로운 장면

Ver.1 AROUND Vol.44 경주 Gyeongju

영화를 읽는 문장―한 편의 경주 네 권의 책


Ver.2 AROUND Vol.89 부산 Busan

〈오르고 거닐다 돌아오면 되지〉


07.06 What We Like취향을 나누는 마음

어라운드 사람들의 취향을 소개해요.


07.20 For The Wonderful holiday완벽한 휴가를 위하여

휴가철을 맞이하여, 우리들의 다채로운 휴일 이야기를 전해요.

영화 〈경주〉(2014)는 이상하다. 깊은 통찰이 필요한 영화는 아닌데 가볍게 넘기기에는 해석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막 웃다가도 막상 곱씹으면 금세 휘발되는 유머도 있다. 〈경주〉를 이토록 이상하게 만든 건 무엇일까. 그 실마리를 찾아서 네 권의 책을 들고 경주로 향했다.


에디터·포토그래퍼 김건태

최현에게 경주는 죽음의 도시다. 곳곳에 죽음이 널려있다. 친한 형의 장례식을 시작으로 과거 여정의 낙태 이야기, 상복 입은 형수와의 만남, 몇 번이나 지나치던 모녀의 자살 소식, 윤희 남편의 죽음과 점집 할아버지의 죽음 이야기, 그리고 눈앞에서 마주친 폭주족의 사고까지. 하루 안에 일어난 경험이라기에는 너무 많은 불안 속에 방치되어 있다.

이성복 시인의 〈그 날〉은 특별하지 않은 어느 날의 초상이다. 아버지와 여동생, 어머니와 나로 이어지는 일상. 그러나 지난한 풍경에 가려진 ‘그 날’은 누군가의 아픈 하루다. 신음 소리가 들리는 시간이며 모두가 병자인, 하지만 아무도 아프지 않은 하루다. 영화 초반, 최현은 관광안내소 직원과 이런 대화를 나눈다. “이 근처에 작은 돌다리가 있지 않았나요? 다리 밑에, 물살이 아주 셌던 거 같은데 물소리만 기억이 나네요.”, “술 먹고 들었던 건 그냥 환청일 수 있지 않아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물소리. 최현은 신음 소리를 혼자만 듣는 사람이다. 끝내 환청을 따라 호수 돌다리를 찾지만 말라버린 강바닥은 소리가 없다. 죽음에 둔감해진 사람들과 늘 죽음과 함께 걷는 최현, 그곳의 진짜 병자는 누구였을까.

저마다의 이유와 속도로 닿는 곳. 뚜렷한 종착지가 아닌 마음이 머무르고픈 도착지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여행을 떠난다.


이명주

거니는 걸음마다 놓인

뜻대로 되지 않는 하루들이 있다. 그건 우리만이 아니라 박하경도 마찬가지다. 국어 교사인 하경은 수업 시간마다 교실에 성실하게 등장해 주어진 일을 한다. 책을 펴고 아이들을 다독이고 수업을 진행하고. 하지만 우뚝 서 있는 하경보다 손에 든 핸드폰이 더 큰 관심을 받는다. 그것뿐일까. 부장 선생님은 걸핏하면 전화를 걸고 비 오는 날에는 장화에 지렁이가 올라탄다. 이것저것 자꾸 무얼 알려달라며 전화하는 부모님은 도무지 하경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하경은 학교 복도에 서서 문득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떠나기로 한다. 토요일 단 하루 동안의 여행을.

하경은 땅끝마을 해남에서 템플스테이에 참여해 소란한 마음을 가라앉힌다. 고등학교 수학여행의 기억을 간직한 경주에 찾아가 너른 길을 걷기도 한다. 부산에 가서는 부산국제영화제에 찾아가 영화를 보고, 헌책방도 둘러보다가 밀면 한 그릇을 맛있게 먹는다. 떠나는 사람은 하경, 한 명일지 모르지만 이야기를 꾸려가는 사람은 여럿이다. 때로는 하경과 친근하고 반가운 사이인 인물이, 때로는 뜻밖의 인물이 등장해 그녀의 하루에 발도장을 찍는다. 우연한 만남은 닳디 닳은 일상의 감정을 뒤집어엎는다. 가벼워지고 싶어 떠난 여행은 더 많은 것을 얻어버려 돌아오는 길이 버겁기도 하다. 그럼에도 어떤 여행이든 떠나고 싶다. 매끈한 조약돌을 주워 살펴보고 다시 내려놓는 마음처럼, 거니는 걸음마다 놓인 인연을 주워 쓰다듬다 살며시 내려두고 싶다. 하경의 토요일에 몰래 뒤따라 나서는 상상을 해본다. “걷고 먹고 멍 때릴 수 있다면 어디든.”

낯선 장소에서 그토록 고대했던 풍경을 마주하고서야 내가 이러려고 여기까지 왔구나!’하며 안도하곤 해요. 그곳에 당도하기까지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쳤다고 하더라도, 단 한 번의 탄성을 내뱉는 순간 여행의 의미는 완성되지요. 세 작품 속 주인공들은 무언가를 찾고, 보고, 느끼겠다는 일념하에 무작정 홀로 한 도시로 향하게 됩니다. 그 끝에서 만난 아름다운 장면과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박하경 여행기〉(2023)

“이제 좀 살겠네.” 이 한마디를 툭 내뱉기 위해서, 우리는 여행을 시작하는 것일지도 몰라요. 꽉 찬 일상에 작은 틈을 내기 위해 떠난 하경은 도시 속 생동하는 삶의 잔상들을 차분하게 들여다봅니다. 보자마자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예술적인 풍경도 좋지만, 그보다 더 오래 걸음을 매어둔 것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입니다. 3화에 등장하는 창진과의 영화로운 하루 또한 마찬가지죠. 부산국제영화제를 즐기러 온 하경은 가는 곳마다 창진을 마주치게 됩니다. 관광지에서 흔하게 겪을 법한 에피소드이지만 하경은 이를 대수로이 넘기지 않습니다. 낯선 공간에서 피어나는 마법 같은 우연에 온 하루를 맡겨보기로 하지요. 이를 계기로 창진과 함께 야외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지하철에서 말도 안 되는 대화를 나눕니다. 오래된 슈퍼 앞을 지나다 생각도 못한 선물을 받기도 하지요. 그들의 하루는 아쉽게도 열린 결말로 끝을 맺지만, 도시는 그들에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를 건넵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을지언정, 낭만만큼은 반드시 그곳에 존재할 거라고요.

유호 쿠오스마넨 6번 칸(2021)


모스크바에 두고 온 애인이 궁금해했던 암각화.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열차 여행은 무산되었지만, 암각화를 보고 오겠단 일념하에 홀로 도시의 끝으로 향하는 라우라. 호텔에 도착해 투어를 예약하려는데, 아니나 다를까 날씨 때문에 그곳으로 가는 경로가 모두 막혔다는 비보를 듣습니다. 먼 곳의 연인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자, “아쉽게 되었네.”라는 미적지근한 반응만 돌아올 뿐이죠. 그런 그를 돕는 것은 열차 6번 칸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시간을 보냈던 료하입니다.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끈질기게 배를 타고 암각화가 있는 곳으로 향한 이들은 눈보라가 치는 설원 속에서 둘만의 세상에 갇힌 듯 행복해 보입니다. 그렇게 여행의 끝에서 마주한 암각화는 생각보다 대단치 않습니다. “저게 다예요?”, “저게 다예요.” 비록 관객들은 그들이 끈질기게 찾았던 그 그림이 무엇이었는지 보지는 못합니다. 오직 라우라와 료하, 둘 사이의 비밀로 남지요. 끝끝내 목표를 이룬 라우라와 그 험난한 여행에 별말 없이 동행한 료하. 세상 끝에 존재하는 그 둘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사랑’의 은유처럼 보입니다.

장률 경주(2014)

경주의 수많은 골목 끝엔 무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걷다 보면 어디든 그곳으로 향하게 되지요. 술에 거나하게 취한 인물들은 달밤의 산책을 하던 도중 거대한 능을 마주칩니다. 그곳이 무덤이라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언덕을 오르듯 터벅터벅 오르지요. 여기 돗자리 깔고 술 한 잔 더 하고 싶다.라던 윤희는 죽으면 자신이 앉아있는 무덤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 담담한 대사 두 마디를 통해, 경주라는 도시에 공존하는 삶과 죽음에 대해 떠올려 보게 됩니다.

서가 속 도시 여행

《AROUND》 89호가 부산의 대표 명소인 ‘아난티타운’에 위치한 서점, 이터널저니에 상륙했습니다. 지적인 즐거움으로 가득한 공간을 거닐다, 한편에 마련해 둔 《AROUND》만의 서가를 찾아보세요. 이전 과월호와 더불어 한 도시의 아름다움을 조명한 지역호, 그간 많은 사랑을 받아온 단행본까지 만나볼 수 있어요. 아름다운 풍경을 곁한 공간에서 여유를 즐기며, 89호와 함께 부산이라는 도시를 누려보세요.


이터널저니 부산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기장해안로 268-31

Vol.89 부산(Busan) 별책 부록

이번 부산호에서는 음식, 예술, 건축 세 갈래를 통해 도시의 면면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너른 자연이 선사한 식재료를 정성스레 다듬고, 인심과 손맛을 더해 내어주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부산의 예술가들이 각기 다른 언어로 기록한 도시의 시간들을 담아냈지요. 부서지는 콘크리트의 소음 사이에서 땅의 이야기를 듣고, 과거의 기억이 보존된 옛터에 정착해 미래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부산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 대해 묻기도 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고 싶으신 분들께선 아래 버튼을 클릭해 ‘AROUND Vol.89 부산(Busan) 별책 부록’을 확인해 보세요. 이번 호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부록 페이지에선 89호 기사와 ‘부산다운’ 공간을 표시해 둔 지도를 만나볼 수 있답니다.

어느덧 휴가철이 다가오고 있어요. 독자님들께서는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나요? 모두가 누군가와 함께 떠날 때, 혼자만의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 분들도 있겠지요. 함께 떠날 때보다 재미는 덜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거든요. 엉킨 감정들을 그대로 둔 채 실마리를 마주하기 위해, 수많은 ‘혼자들은 많은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지난한 여행을 떠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마주한 도시는 우리에게 어떤 순간들을 내어줄까요? 다음 뉴스레터는 어라운드 사람들의 여름 이야기와 함께 찾아올게요. 다다음주 목요일 아침 8시에 도착할 이야기를 기다려 주세요. 안녕!

‘부산(Busan)’을 주제로 한 《AROUND》 89호가 궁금한가요? 책 뒤에 숨겨진 콘텐츠가 궁금하다면 뉴스레터를 구독해 주세요. 이미 지난 뉴스레터 내용도 놓치지 않고 살펴보실 수 있답니다. 어라운드 뉴스레터는 격주로 목요일 오전 8시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출근길, 평범한 아침 시간을 어라운드가 건네는 시선으로 채워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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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콘텐츠로 교감하며 이야기를 넓혀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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