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이제 부동산 문제입니다. 지금의 책들과 앞으로 늘어날 책을 이고 지고 갈 수 있는 집을 구할 수 있을지 막막한데요, 과감하게 장서를 정리한 🔈모베가 부럽습니다. 9월 출간을 노리고 있는 『도서관은 살아 있다』(가제)의 저자도 비슷한 괴로움을 말해주고 있어요. 책에 수록될 원고 중 한 꼭지인 "장서 폐기의 괴로움"을 일부 편집해 선공개합니다. 『도서관은 살아 있다』 재밌을 것 같지 않나요? 🌱죽순 드림.
장서 폐기의 괴로움
🔮 도서관여행자
“장서 처분에는 처분하는 사람 수만큼 갖가지 사연과 드라마와 괴로움이 있다.”
― 오카자키 다케시, 『장서의 괴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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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 시절, 도서관 장서 점검 일정에 맞춰 하루에도 수십 권, 많으면 수백 권의 도서를 처분해야 했다. 사고 사도 또 살 게 생기고, 버리고 버려도 또 버릴 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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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 폐기 업무에 숙련된 사서라 할지라도 책을 소장할지 폐기할지 결정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이 책이 도서관에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장서 점검을 할 때마다 괴로운 독백을 하는 사서들은 어떤 기준으로 책을 처분할까? 도서관마다 장서 폐기 지침서가 있다. 보통 일정 기간(공공도서관의 경우 대개 3~5년) 대출 기록이 없거나 대출 빈도가 낮은 도서들, 그리고 여러 권 있는 도서가 우선 폐기 대상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장서 폐기에 흔히 MUSTIE 공식을 활용한다. 각 머리글자를 풀이하면 이렇다.
Misleading: 오해의 소지가 있거나 실제로 부정확한 정보를 전하는
Ugly: 심하게 낡거나 수선을 했으나 이용자가 선뜻 손이 가진 않을 만큼 외관이 흉한
Superseded: 개정판 또는 주제를 훨씬 잘 다룬 책으로 대체된
Trivial: 문학적, 과학적 가치가 떨어진
Irrelevant: 과거에 잠깐 유행했던 관심사를 다루는 공동체의 요구나 관심과 무관한
Elsewhere: 같은 자료를 다른 도서관에서 빌려 올 수 있거나 전자 형태로 제공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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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기 위험에 처한 책을 구하기 위해 싸우는 사서들도 있다. ‘게릴라 사서’라 불리는 이들은 1989년 등장했다. 그해에 느닷없이 발생한 강한 지진으로 샌프란시스코 중앙도서관이 크게 손상되고 서가가 파괴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건물이 완전 복구되기 전, 작은 임시 열람실을 개방했지만 책을 비치할 서가가 턱없이 부족했다. 도서관은 대대적인 장서 폐기 작업에 착수하고 모든 책을 ‘그해 대출이 된 도서’, ‘지난 2년간 대출 이력이 있는 도서’, ‘2년 넘게 대출되지 않은 도서’로 분류하고, 각각에 그린카드, 옐로카드, 레드카드를 꽂아두었다. 음악, 예술 분야를 포함한 상당수의 도서가 폐기 위험에 처하자 몇몇 사서가 창고에 몰래 침입해 책에 있는 레드카드를 그린카드로 바꾸어 책 구출 작전을 벌였다. 이들이 게릴라 사서의 시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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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된 작업이라고 해서 도서 수집과 폐기를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분석 결과에만 맡기면 자칫 장서의 다양성을 해칠 위험이 있다. 2021년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켈빈 파크 고등학교 쓰레기장에 폐기된 도서관 책들이 화제가 되었다. 『햄릿』, 『죄와 벌』, 『변신』 등 여러 고전들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 도서관은 아마도 대출 통계 데이터에서 학생들이 읽지 않은 책들을 추려냈을 것이다. 이전에도 이런 비슷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이용자들이 찾지 않아 버려지는 책들과 버려진 책들을 보고 화를 내는 이용자들. 좋은 사서가 좋은 장서를 만들지만 좋은 장서를 지키는 건 이용자의 관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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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장서의 괴로움을 느낀다면 장서 폐기를 해보시길. 꽃을 심기 전에 잡초를 먼저 뽑고 심을 자리를 마련하듯 말이다. 크든 작든 당신의 도서관을 가꾸는 사서는 바로 당신이다. 이 말은 사실 나에게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