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이예요.


078. 2023/12/28 목요일


안녕하세요, 봉현입니다.


잘 지내셨나요?


‘지금의 내가 별로라고 느껴지는’

자신을 한탄하던 레터를 마지막으로,

그간 두 달 넘게 안부 한마디 전하지 못했었네요.


그리고 어느새, 12월의 마지막 주가 되어서야

이렇게 안부를 건넵니다. 🙂


00님은 어떤 날들을 보내고 있나요?

그동안- 저에게 많은 일과 여러 변화가 있었답니다.


마지막 레터의 내용이 무색하게도, 또 다행히도

요즘의 저는 꽤 행복하다는 감각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그런 말이 가끔 튀어나올 만큼요.


무엇이 저를 달라지게 했을까요?

10월의 봉현과, 12월의 봉현에게는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요.


그 이야기를 감히

‘행복의 조건’이라는 제목으로 정리해 보고자,

오랜만에 긴 글을 씁니다.


봉현


행복의 조건


행복.

거창하지만 또 단순하기도 한. 너무나 뻔하지만 또 그만큼 희귀한 단어.


불과 두 달 전의 나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딱히 불행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답답함과 공허함, 불안함과 무료함, 질투와 자책이라는 부정적 감정에 둘러싸여 나 스스로도 내가 너무 별로라는 자각을 할 만큼 정신적으로 엉망이었다.


그러던 내가, 요즘은 꽤 좋다. 매일매일 웃고, 매일매일이 소중하다. 오늘이 충만하고 내일이 기대된다. 이렇게 완전히 바뀌어버리다니. 고작 두 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돌아보니, 조심스럽지만 감히- 행복의 조건이란 사실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스쳤다.



1. 환경의 확장

 평소 생활 반경이 집, 카페, 동네뿐인 나인데 급기야 겨울이 되면 춥다는 이유로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날들이 길어진다. 겨울마다 그랬다.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겨울마다 몸이 아프다. 추위에 떨면 고통스럽다고 느낄 만큼 괴롭기에,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두렵다. 몸은 점점 게을러져서 좁은 방과 이불 속에서 동굴에 숨어 살듯 버티곤 했다. 안 그래도 혼자 오래 살아온 집, 모든 게 나뿐인 집에서 나만을 보고 나만을 케어하며 살다 보면, 의식하지도 못하게 천천히 고립되어 간다. 흠흠, 기침 소리조차 목이 메일만큼 하루 종일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뇌 속에서만 생각이 굴러가다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점점 심연으로 빠져든다. 어디서부터 실타래를 풀어야 할지 알 수 없게끔 저 어딘가로, 더 깊고 어둡게.


 대부분의 겨울이 그랬다. 봄여름 가을을 열심히 살다가 날이 서늘해지는 순간부터 나는 지레 겨울이 무서웠다. 1년의 반 정도가 추운 터라 더더욱 그 긴 시간이 힘들었다. 더군다나 이상하게도 항상 11월부터 2월까지는 일도 없었다. 외주가 뚝 끊겨서 다음 달 생활비 걱정을 해야 할 만큼 경제적으로도 매번 보릿고개였다. 프리랜서로 사는 11년 내내 매번, 매년.



올해 겨울도 사실 마찬가지다. 11월을 기점으로 모든 외주가 끝나자, 또 어김없이 일이 없다. 백수나 마찬가지라 모아둔 돈을 조금씩 까먹으며 버텨야 하는 건 똑같지만, 11년 만에 처음으로- 이번 겨울은 무료하지도 답답하지도 않다. 또 다른 공간, 작업실을 구했기 때문이다.


요즘 집은 잠만 자고 씻고 쉬는 곳이 되었다. 느지막한 오전에 눈을 뜨면 물 한 컵 마시고 고양이들을 잠시 돌보다, 씻고 준비한 뒤 바로 작업실로 간다. 마감도 없고 의뢰받은 일도 없지만, 작업실에 가서 뭐든 한다. 걸어서 20분, 택시로 5분 거리.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감. 번화가 한복판인 우리 동네에서 이만큼만 나와도 이렇게 한적하고 차분한 동네가 있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2. 사람들과의 시간
 

 시작은 우연한 만남이었다. 기운 하나 없던 10월의 어느 날, 동네 책방 사장님을 통해서 어떤 작가님을 알게 되었다. 두 번째 만남에서 우리는 서로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같이 작업실을 구해보자고 단합했다. 금액이 부담되어 포기해야만 했던 공간 욕심을 다시 한번 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결심은 결심일 뿐.. 과정 또한 순탄치 않았다. 정말 연남-연희-성산-서교- 일대의 모든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온갖 부동산을 방문하고 수시로 직거래 매물들을 확인했지만, 그 어느 하나도 우리에게 맞는 곳은 없었다. 보증금과 월세가 지나치게 비싸거나, 평수가 너무 작거나, 권리금이나 시설 문제 등… 마음에 들고 안 드는 걸 떠나 우리의 자그마한 통장 상태에 허락되는 공간은 없었다.


보름이 넘어가면서 슬슬 지치고 현실을 인정하고 포기해야 하나… 하던 중에, 우연히 보게 된 게시물. 사진만으로는 확인이 애매했고 위치가 생각했던 범위 밖이었지만, 그냥 구경이나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찾아간 2층 건물. 입구에서까지도 아무런 기대가 없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앗. 하는 마음으로 깨달았다. 여기구나, 우리가 찾던 곳이.



 바로 공간을 계약하고, 기존 세입자와 양도 거래를 조율하고, 이사 날을 확정했다. 그리고 2명의 동료를 더 구해, 4명이서 작업실을 사용하게 되었다. 인수받는 날, 집기가 다 빠져나간 텅 빈 공간에서 큰 숨 한번 내쉬어보곤 바로 으쌰 으쌰 힘을 내어 공간을 꾸미기 시작했다. 핸디 코트를 바르고, 페인트를 칠하고, 조명을 달고 못질을 하고 청소를 하고.. 페인트가 여기저기 묻은 옷차림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신문지 위에서 피자를 나눠 먹기도 하면서, 힘든 것도 잊고 깔깔깔 웃으며 같이 공사를 했다. 전문적이지는 않지만 우리 나름의 방법으로 우리만의 공간을 만들어갔다.


그렇게 하나하나 정리하고 채우고 만들어낸 공간에서 거의 매일같이 모였다. 각자의 작업 고민도 이야기하고 또 사람들도 여럿 초대했다. 찾아온 사람들마다 너무 멋진 작업실이라고 할 때마다 우리는 한껏 뿌듯해하며, 언제든지 누군가를 불러 편안하고 자유롭게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음에 기뻐했다. 때마침 연말 12월을 맞아 크리스마스 파티도 열었다. 맛있는 것을 나누어 먹고 서로를 알아가다 눈이 펑펑 내리는 것을 보고 놀이터로 달려나가 어린아이들처럼 놀았던 이브의 밤은, 오래오래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작업실을 구하려고 작가님과 동네 곳곳을 하릴없이 돌아다니는 시간도 참 재밌었고 동료들과 즐거운 노동과 당근 거래에 진심으로 임했던 여러 사건들도 참 웃겼다. 작업실에 찾아와 준 서로의 지인들과 또 서로 친구가 되어 밤새 수다를 떨고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또 웃던- 지난 한 달 내내, 정말 많이도 웃은 것 같다. 사소한 웃음부터 커다란 폭소까지 가득 넘쳐흘러서 우울한 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을 만큼, 매일매일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으로 가득했다.



3.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을 하기

 '내 그림을 그리고 싶다. 온전히 나의 의지로, 나의 자유로, 나의 마음으로.'


 늘 마음 한구석에서 끙끙 앓기만 했던 나의 결핍. 작업실이 생기자, 나는 곧장 40호짜리 커다란 종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냥 내키는 데로 색을 칠하고 제멋대로 나무와 구름을 그렸다. 집 캐비닛에 오랫동안 처박아두기만 했던 그림 도구들과 먼지만 쌓여가던 아트 북과 그림 들을 가지고 와서 하나하나 보고 읽고 썼다. 돈을 벌기 위해 직업적으로 해왔던 그림이 아니라 그냥 그림을 그렸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무슨 용도로 쓸 건지, 누굴 위한 것인지 따위 필요 없는 그림을 그렸다. 그냥 내가 그리고 싶어서, 내가 원해서 하는 것을 했다.


내 키를 훌쩍 넘는 커다란 이젤과 50호짜리 커다란 캔버스도 샀다. 아직 아무것도 제대로 완성하지 않았고 이런저런 것을 시도해 보는 중이다. 하지만 아무런 부담도 목적도 없이, 나의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것에 진실되게 임하는 그림 그리기는… 그야말로 자기만족이었다. 나 스스로 만족하며 내 본질에 몰두하는 시간은 정말, 이 얼마나 충만하고 평화로운지.


 눈이 펑펑 온 날, 눈을 그리고 싶어져서 까만 캔버스 위에 흰색 물감으로 눈을 그렸다. 그렸다기보다는 담아냈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그대로 눈을 담았다. 이 또한 아직 그리는 과정 중이고, 미완성이지만- 미완성의 과정 속에 머물고 있는 요즘의 내가, 꽤 행복하다는 걸 다시 한번 그림 앞에서 확신했다.

  

구독자 분들께 처음 보여드리는, 2023년의 눈.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돈을 엄청 많이 벌면, 엄청난 유명인이 되면,

그러면 행복할까?


물론 돈을 많이 벌고 싶고 성공하고 싶음은 당연해요. 아니라는 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과연 그것만이 분명한 행복의 조건인 걸까. 그렇다면 행복의 기준이란 게 뭔데? 행복에도 권리라는 게 있는 걸까? 행복은 선택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일까? ….


 지난 주, 패딩에 스웨터를 입고도 짜증 나게 춥다고 징징대면서 서울역 거리를 걷고 있었어요. 스쳐가는 홈리스 분들의 복장을 보고 덜컥 반성 반 걱정 반으로 마음이 복잡했던 어떤 날이 떠올라요. 좋아하던 영화의 주인공이던 한 배우가 하루아침에 그간의 성공과 삶이 모두 무너져버린 안타까운 죽음에 속이 쓰리고 허무했던 마음을 떠올립니다. 무엇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으면서 불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다고 미련 떨던 바보 같은 얼마 전의 저 자신을 떠올립니다.



‘누구나 누릴 수 없는 건 행복이라고 부르지 않는단다.’



 얼마 전에 본 영화 [괴물]의 저 대사가 행복의 정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요. 물론 지금의 제가 느끼는 이 행복은 찰나의 것이거나, 심지어 착각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불행이 더 쉽고 익숙한 요즘 세상 속에서- 저는 괜스레 반항하는 마음으로 행복에 대한 조건 3가지를 과감하게 내뱉어 봅니다.



지지 말고 세상으로 나아가기,

잊지 말고 사람들을 사랑하기,

무엇보다 나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기.



 저는 요즘 일부러 의식적으로, 버스를 탈 때나 물건을 살 때, 택배나 택시 기사님, 동네 이웃이나 누군가랑 마주칠 때마다 최대한 정성을 다해 다정한 인사를 건네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추운데 감기 조심하세요, 좋은 연말 보내세요, 늘 건강하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 별것 아니지만, 특별하고 따뜻한 말들로요. 요즘의 제 소소한 행복이, 누군가에게 전해졌으면 해서요.


 불행이든 행복이든 살아온 매 순간 수고 많았을,  00님도 조금이라도 더- 꼭 행복하세요. 올 한 해도 저와 이야기 나눠주셔서 고맙습니다. 내년에도 계속 편지 쓸게요.



2023년 12월에, 봉현


Q. 00님에게 행복의 조건은 뭔가요?

<봉현에게 보내는 답장/ 비밀 일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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