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뜬금포 특집!

기획은 간혹 체계적인 질문과 논리적인 예측, 판단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펼쳐지기도 합니다. 마티에서 책을 선택할 때, 특히 국내 저자의 글이 아닌 다른 언어로 씐 책을 한국어로 옮겨 출판하고자 할 때는 각별히 중차대한 기준이 딱 하나 있습니다. 우리 중 누군가는 반드시 그 책에 '쑤욱' 빠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혼자 좋기는 아쉽고 아까우니 옆 사람 팔도 슬슬 끌어당기고 가능하면 옆옆 사람한테까지 들리도록 우연히 목소리가 커집니다. 잡담을 빙자한 프로파간다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쪽 귀와 어깨가 쏠리면, 거의 넘어갔다고 봅니다. 그러다 간혹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그 책이 왜 마티에서 나와?" (그래서 오늘은 뜬금포 특집입니다.)

축구계에서 독보적으로 '지적인' 분이라는 말씀이죠?
by 에디터 J

축구 선수이자 감독이었던 요한 크루이프의..., 아니아니, 다시 할게요. 토털사커의 창시자이자 20세기 최고의 축구선수 가운데 한 명인 요한 크루이프의... 아니지, 다시 한번.
"철학가로서, 사상가로서 요한 크루이프를 앞설 사람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을 걸요"라는 말을 듣고는, 모두 자판에서 손을 떼고 다음을 기다렸지요. "전설적인 기록, 혁신적인 기술, 탁월한 감독이자 현대 축구로 불리는 축구의 경계를 만들어낸 장본인이죠. 2016년 3월 24일이 그의 기일이니, 곧 1주기가 다가오네요"라고 이어진 편집자 P의 소개는 호감이 갔지만 결정적이진 않았어요, 적어도 저에겐 말이죠. 
"왜 '마이 턴'인가요?"라는 저의 질문에 어이없는 듯 한숨을 감추던 P의 헛기침이 들립니다. "크루이프 턴! 못 들어봤어요?" 유럽 축구를 제철에 맞춰 꼬박꼬박 관람하는 P는 토탈사커 영상을 보여주며 크루이프의 놀라운 전술들을 설명했습니다. 그럼에도 옹기종기 모여든 우린 "으으음"으로 반응하며 실제보다 더 깊이 감동받은 양 고개를 주억거렸어요. 결정타가 필요했던 거예요. 
이윽고 요한 크루이프의 자서전이 어째서 '마티에서 낼 만한지' 설득당할 만한 한마디가 들렸습니다. “그는 <텔레그래프>에 칼럼을 기고할 정도로 언어와 논리, 철학에 치밀했던 선수예요.” 

그렇게 출간하게 된 요한 크루이프 자서전 <마이 턴> 속 그의 말들을 (잔뜩) 소개해볼게요. 
  • 축구는 실수의 게임이다. 내가 사랑한 것은 축구의 수학이다. 분석하고 개선하는 것.
  • 다른 선수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선수는 팀 전체에 방해가 된다. 토털사커는 규율 잡힌 그룹으로 움직인다.
  • 자신감이 자만으로 변하고 나면 그것을 되돌리는 것은 정말 어렵다.
  • 나는 승리를 프로 스포츠의 성배로 모시는 사람들에게 비판적이다.
  • 나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공간 활용과 거리 측정이었다. 너무 강조하자, 누군가 내게 수학에 미친 사람이냐고 묻기도 했다.
  • 나는 피치 위에 가만히 서 있는 선수를 볼 때마다 너무 화가 난다. 있을 수 없는 플레이다. 자기 팀이 공을 소유하고 있을 때는 열한 명 전원이 움직여야 한다. 계속해서 최적의 간격을 찾아야 한다. 얼마나 많이 뛰느냐가 아니라 어디로 뛰느냐의 문제다.
  • 나쁜 일을 해놓고 아무 일 없을 것이라고 기대해선 안 된다.
  • 유소년팀 감독은 선수들의 성장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 임무에 존재하는 가장 큰 위험은 감독이 선수에게서 새로운 재능을 끌어내기보다 선수가 갖고 있는 오래된 습관을 교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드리볼을 너무 많이 하는 선수에게 드리블을 하지 말라고 할 것이 아니라, 그에게 신체적으로 강한 상대를 붙여야 한다. 드리블을 시도하다가 몇 차례 강한 태클을 당하고 나면, 드리블만 할 게 아니라 패스를 해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 우리는 어느 분야에서든 질문으로 사람들을 곧 알아낼 수 있다.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는 사람인지, 자신의 옳음을 상대에게 인정하게 하려는 사람인지 말이다.
  • 간격이 왜 중요할까? 일정한 간격을 유지해야 서로 커버하고 협력하는 플레이가 이루어진다.
  • “세상에 완성되어 더 이상 달라지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렌지 군단 아약스의 정신적 뿌리였고, 바르셀로나 정신을 세운 기둥이었던 그의 자서전 <마이 턴> 말미에는, 토털사커의 기본이자 모든 코트에서 공유하는 “요한 크루이프의 열네 가지 규칙”이 등장해요. 그럼에도 그는 축구의 세계와 비할 수 없이 아내와 아이들이 자신의 삶의 중심이었다고 강조하며 말합니다.
"좀 빨리 끝내주세요. 그래야 다들 집에 가지요."   

(*참고로 현재 재고가 17부 남았다고 합니다. 하하...)

감당 안 될 줄 알고도 덤빈 자의 최후
by 편집자 S

때는 바야흐로 2016년. 케네스 프램튼의 <현대 건축> 작업이 한창이었죠. 건축 전공자가 아닌 저로선 힘겹게(죽을 둥 살 둥) 7장 미래주의 건축가 안토니오 산텔리아에 도달했는데, 이탈리아 미래주의가 솔찬히 재밌어 보였습니다. “1909년에 선언된 미래주의는 하나의 양식이라기보다 일종의 충동이었다”에 밑줄, ‘충동’에 별표, 문장 메모까지 한 5초 걸렸을까요. 사실 <스위스 방명록>을 작업할 때 ‘취리히 다다’에 꽂혀서 후고 발(Hugo Ball)을 탐한 전력이 있었던 터라 제겐 일탈도 아니었습니다. 여튼 덕질 끝에 <미래주의 요리책>이 미래주의의 끝판왕이라는 걸 알게 됐죠. 그래도 한국어판을 낼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혁명적이고 시적이고 파격적인 선언문이자 문학이자 퍼포먼스 시나리오를 기성 단행본으로 낸다는 건, 감당이 안 될 것 같았어요.
그렇게 한동안 잊고 살았을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당시 인하우스 디자이너였던 오새날 디자이너가 “이 책 아세요?”라며 폰을 들이밀었는데, 눈동자 흰자로만 봐도 알겠더라고요. <미래주의 요리책>이었습니다. 이 우연에 감동한 저는 낚시질을 시작합니다. 매일 모니터에 <미래주의 요리책>을 띄워두고 누군가 “어, 이 책 뭐예요?”하고 덤빌 때까지 숨죽여 기다렸죠. 얼마 지나지 않아 편집자 P가 미끼를 물었습니다(P는 이 사실을 오늘 뉴스레터를 통해 처음 알게 됩니다). 하여 세 명이 같은 행동을 하면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거나 따라온다던 ‘3의 법칙’이 발동됐습니다. 다섯 명밖에 안 되는 출판사에서 셋이 같은 책에 관심을 보였으니 게임 끝이었죠. 게다가 하필 <미래주의 요리책>을 쓴 마리네티가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 1944년 사망하고 사후 70년이 지나 저작권이 끝나 있었고, 또 하필 건축 전공자이면서 번역가 겸 음식 평론가로 활동 중인 이용재 평론가와 트위터 인연이 있었습니다. <미래주의 요리책> 번역가로 이보다 적격인 다른 사람을 떠올리긴 힘들었죠. 
1년여가 지나 번역된 원고를 받아 든 저는 2016년 이 책을 처음 발견했을 때 전율을 그대로 느꼈습니다. 이건 감당 못 한다...! 솔직히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미래주의자들은 현대적 기술과 재료, 속도에 완전히 미쳐 있었고, 애국을 표방한 전쟁주의자였고(마리네티가 65세의 나이로 참전한 이유), 거의 개념 미술에 가까운 음식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이 요리를 들고 전국 순회공연까지 했어요. 무엇보다 파스타를 경멸했습니다. 탄수화물을 과다 섭취한 살집 있는 몸으론 알루미늄의 가벼움과 기차의 빠름을 닮을 수 없기 때문이죠!
미래파는 정말 많은 선언문을 썼습니다. 1909년 미래파 창설과 함께 첫 선언문을 발표한 후 문학, 회화, 여성, 전시, 조각, 구두점, 사운드-소음-냄새, 무용 등 서른 개도 넘는 선언문을 발표합니다. <미래주의 요리 선언>은 1930년에 발표된 후기 미래주의를 대표하는 텍스트랍니다. 미래파가 이토록 방대한 영역에 미래주의의 깃발을 꽂으려 했던 건 하나부터 열까지 바뀌지 않고는 이탈리아에 미래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유럽 국가들이 하나둘 경제적, 정치적으로 치고 나갈 때 이탈리아는 여러 모로 뒤쳐져 있었거든요. 미래파의 등장부터 해체까지 앞뒤 사정을 알아야 이 책을 제대로 낼 수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역시 끝판왕은 깨기 어렵더라고요. 
낚시질을 한 죄(?)로 미친 듯이 공부하며 편집한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요. 구두점을 안 찍는 마리네티의 '자유언어' 실험은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으니, 9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낯설고 신기한 텍스트임은 틀림없습니다. 이 책에 홀린 이유를 알 것도 같네요.

* 사진은 <미래주의 요리책> 209쪽에 실린 '입체파 채소밭' 레시피와 그것을 똑같이 따라 한 실제 요리 모습.

<전후 일본 건축>이 흥미롭다면, 함께 읽기 좋은 책

현대 건축 (케네스 프램튼, 2017): 20세기 건축의 흐름을 사회적·정치적 관계 속에서 살피고 싶다면.
② 건축의 고전적 언어 (존 서머슨, 2016): 보다 넓은 시각으로 도시와 건축을 바라보기 위해 고전주의 건축 입문서를 딱 한 권 읽는다면.
아키토피아의 실험 (강홍구 외 10명, 2015): 도쿄계획과 여의도계획의 연결고리에 관한 의구심과 호기심을 쓴 조현정 교수의 글을 읽고 싶다면.
건축은 무엇을 했는가 (박정현, 2020): 같은 시기 일본과 한국의 건축을 비교하며 파악하고 싶다면. 
아메토라 (W. 데이비드 막스, 2020): 건축에 이어 일본의 패션 현대사를 톺아보고 싶다면.
⑥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마쓰이에 마사시, 2016): 일본 건축사무소를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 건축물을 묘사하는 아름다운 문장을 음미하고 싶다면.

마티의 취향
경계 없는 경계, <보더리스 사이트>
by 디자이너 J

단순히 검색창에 '볼만한 전시'라고 검색해서 내 마음에 쏙 드는 전시를 찾는 데엔 많은 시간이 들어요. 그래서 마음에 드는 갤러리와 미술관을 몇 군데 정해두고 공식 사이트에 주기적으로 들어가 봅니다. 마침 문화역서울 284에서 <보더리스 사이트>라는 전시를 하더군요. 신의주와 단둥이라는 경계에 주목한 여러 명의 작가들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시 공간을 채웠어요. 첫 작품부터 굉장히 강렬했습니다. 전시를 다 보고 난 후에도 <회전하는 경계>의 잔상이 사라지지 않았어요. 작가마다 사용한 매체와 방식이 다양해 더 풍성한 전시 공간이었습니다. 따뜻해지는 계절에 근사한 전시 하나 추천하고 갑니다!
이번 주 마티의 각주* 어떠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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