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금산에서 경북 문경으로 보냅니다 (vol. 03)
반잡초파 입장문

  작가님이 보내 주신 편지에서 바람이 불었다면 믿으시겠어요? 창을 꼭 닫고 집 안에서 읽었는데도, 키 작은 벼를 스쳐 불어오는 바람결이 느껴졌어요. 편지와 함께 보내주신 그림 속 논두렁을 나란히 걸은 기분입니다.

 

편지를 받고 2주 만에 답장을 보냅니다. 그 사이 달이 바뀌어 7월이 되었고, 여름만큼 무더위도 깊어졌네요. 이제 그림처럼 논두렁을 걸으려면 밭일 모자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마 작가님도 아실 거예요. 큼지막한 챙에 양 옆으론 널따란 천이 달려, 양쪽 귀와 뒷목까지 빼놓지 않고 둘러주는 모자요. 중간중간은 야무지게 망사로 되어 있어 두피의 열까지 식혀주니, 제게는 여름 필수품입니다. 저는 카키색을 가장 선호하지만, 읍내 오일장에선 화려한 무늬와 색상이 더욱 사랑받고 있더군요. 사실 저는 카키와 그레이, 핫핑크 컬러를 모두 보유하고 있답니다. 텃밭에서 패션을 뽐내고자 함은 아니고요. 언제, 어떤 색상을 선호하는 일꾼이 수풀집에 올지 몰라 여분을 준비해 둔 것입니다.


요맘때 시골집의 가장 큰 고충은, 잡초가 자라나는 속도를 뽑는 속도가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잖아요. 여름은 꽃과 나무, 텃밭의 작물을 잘 키워내지만, 그 무엇보다 잡초를 가장 잘 키워내니까요. 그러니 누군가 수풀집에 온다면 원하는 색상의 모자를 고르게 한 뒤, 마당과 텃밭의 잡초를 뽑는데 투입합니다. 한가롭게 시골 풍경을 즐길 생각으로 온 방문자들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말하곤 해요.

“풀 죽이는 약, 그런 거 있지 않아?”

저는 제초제 대신 밭일 방석을 권합니다. 동그랗고 도톰한 높이의 밭일 방석에 걸터앉으면, 그냥 쭈그리고 앉아 잡초를 뽑는 것보다 한결 편하니까요.

“구찌로 할래? 페라가모로 할래?”

저는 밭일 방석을 내보이며 말합니다. 어째서 밭일 방석에까지 명품st 패턴을 적용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일꾼의 취향을 존중하는 의미로 선택권을 드리고 있습니다. 아, 모자와 달리 밭일 방석은 모든 방문자들에게 권하지 않습니다. V자로 생긴 고무밴드에 가랑이를 끼우고 앉는 과정이 그리 멋지진 않으니까요.

 

  지난 편지에 작가님은 제 알토란 같음을 칭찬하시며, 잡초 뽑기에 관해 이야기하셨지요? 손사래를 치고 싶지만, 사실 그 부분을 읽으며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썩거렸고 괜히 양손에 힘을 주어 보았습니다. 달려 나가 곧 잡초를 잡아챌 것처럼요(뿌리보다 줄기가 큰 잡초를 뽑을 땐 손목의 스냅이 참 중요하죠!).

작가님 예상대로, 저는 잡초를 뽑을 때 뿌리 끝까지 뽑아내는데 열과 성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혹 뿌리의 일부를 남겨, 또다시 잡초가 퍼져나가지 않을까 걱정하면서요. 작가님의 칭찬에 으쓱하여 잠시 자랑하자면, 저는 제초 호미라는 아이템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잡초 뽑기에 특화된 호미로, 일반 호미와는 다르게 호미의 머리가 작고 그 끝에 갈고리 같은 톱날이 달려 있답니다. 그것으로 잡초의 뿌리를 보다 쉽게 캐낼 수 있는 거죠. 무려 특허를 받은 호미입니다. 그 호미로 잡초의 깊은 뿌리까지 제거하면서 생각합니다. 역시 농사도 템빨이야. 이제 이런 농담을 건넬 이가 생겼다니 새삼 기쁘네요, 작가님.

 

그렇긴 해도 수풀집이 잡초 청정지대는 아니에요. 작가님이 예상하신 것처럼 '사진처럼 깔끔하지 않아요.'라고 이야기하게 되네요. 일주일 중 이틀만 머무는 오도이촌* 집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혼자 관리하기엔 마당과 텃밭이 꽤 넓기도 하거든요. 요즘 같은 때에 한 차례 비가 지나가고 나면 작물보다 잡초가 훌쩍 커 있기도 합니다. 때문에 여러 색깔의 밭일 모자를 항시 구비해 놓고 일꾼을 기다리는 것이고요.

(*오도이촌 : 일주일 중 닷새는 도시에서, 이틀은 시골에서 사는 생활방식)

 

잡초 뽑을 생각에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거리를 걷다 잡초를 발견하면 녀석의 뿌리가 궁금해지는 사람이지만, 사실 이전의 저는 잡초에게 다정한 '친잡초파'였습니다. 나훈아의 '잡초'라는 노래를 들으며 자라온 세대잖아요.

 

아무도 찾지 않는 바람 부는 언덕에

이름 모를 잡초야

한 송이 꽃이라면 향기라도 있을 텐데

이것저것 아무것도 없는 잡초라네

 

저보다 세상에 먼저 태어난 이 노래를 듣고 있자면, 잡초가 그렇게 짠해져요. 우리 모두 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쉽지 않은 인생을 잡초에 투영해 본 적이 있잖아요. 한편 이문조 시인의 '들판을 푸르게 하는 것은 잡초다'라는 시를 읽고 있으면 잡초의 성실함과 생명력을 우러르게도 됩니다. 그렇게 저는 오랜 시간 친잡초파를 자처하며 살아왔어요. 수풀집에 자리 잡은 후에도 한동안은 그랬습니다. '시멘트 사이에서 올라온 거 봐. 쟤도 살려고……', '잡초도 생명이야!', '가만 보면 얼마나 어여쁜데' 하면서요. 그러나 한 사건으로 저는 입장을 바꾸게 됩니다. 일명 광대나물 사건입니다.


  작년 봄이었습니다. 담장 아래 자그마한 보랏빛 풀꽃이 피었더라고요. 봄은 유난히 더디 오고 있었고, 마당에 핀 꽃이 몇 없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마당에 새로이 피어난 꽃이 반가웠던 저는 대뜸 핸드폰부터 내밀었습니다. 식물의 이름을 모르니, 네이버 스마트렌즈에게 물어볼 작정이었어요. 사진 한 장이면 웬만한 식물의 이름은 바로바로 알 수 있으니, 비즈니스 세계에서 초면에 명함을 나누는 것과 비슷한 거죠. 사용할 때마다 신통방통한 네이버 스마트렌즈는, '광대나물'이라며 풀꽃의 정체를 알려줬습니다.

특이한 이 이름은 (몇 가지 다른 견해가 있지만) 울긋불긋한 꽃이 피는 모양이 광대를 연상시키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어린잎은 나물과 국으로 식용할 수 있고, 통증 완화나 해독에 효과가 있으며, 지혈제로도 활용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알려주었어요. '이렇게 매력적이고 실용적인 풀꽃이 우리 집 뒷마당에 절로 찾아왔다고?' 저는 낯설지만 매력적이고, 쓸모까지 넘치는 광대나물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심지어 '봄맞이'라는 꽃말까지도 마음에 쏙 들었어요. 아직은 꿀을 딸 꽃이 없어 마당을 헤매던 벌들도 그랬던 모양이에요. 작고 길쭉한 보랏빛 꽃에 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아름다운 장면을 사진으로 담고 있었습니다.

 

“고것은 왜 안 뽑아?”

지나는 길에 저희 집 마당에 들르신 앞집 할머니였습니다. 작가님도 아시지요? 마을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어르신이자 제 농사 선생님이요.

“아……. 그냥요. 예쁘잖아요.”

“아이고, 뽑아야 돼야. 가만 두믄 이리저리 퍼지기만 허구, 안 돼야. 내가 뽑아주까?”

할머니는 금방이라도 손을 뻗어 광대나물을 몽땅 뽑아버리실 것 같았어요.

“아니에요, 할머니! 제가 이것만 찍고 뽑을게요.”

저는 할머니 손을 잡고 담장에서 벗어나 얼른 화제를 전환했습니다. 예상하셨겠지만, 저는 그 광대나물을 뽑지 않았습니다. 할머니가 가시는 뒷모습을 확인한 뒤엔, 벌들의 환대를 받는 광대나물을 영상(릴스)으로 만들어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하기도 했고요. 그땐 몰랐습니다, 그것이 보랏빛 고통의 서막이었다는 것을요.

 

광대나물은 담장을 따라 쭉 퍼지더니, 이내 텃밭으로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곤 순식간에 텃밭을 보랏빛으로 만들었어요. 얼마의 시간이 더 흐르자 텃밭을 벗어나 뒷마당과 앞마당을 뒤덮기 시작했고요. 그때부턴 아무리 뽑고 또 뽑아도 수풀집 곳곳에 광대나물이 가득했습니다. 봄에는 감자순보다 광대나물의 키가 더 컸고, 여름엔 토마토와 상추 뿌리 옆에 착 달라붙어 양분을 빼앗았어요. 할머니 말씀을 들었어야 했다고 후회해도 이미 늦었지요. 마을 어르신들은 제초제를 한 번 뿌리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지만, 저뿐 아니라 마당을 오가는 동물친구들에게 독성을 끼치는 약품이라 쓸 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작은 기대는 있었습니다. 그간의 경험에 의하면, 잡초도 제철이 있어서 어느 때가 지나면 기운이 쇠하더라고요. 놀랍게도 광대나물은 달랐습니다.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될 때까지 기세가 여전했어요. 심지어 새하얀 눈 속에서도 보랏빛 꽃을 피워, 눈이 녹으면 그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으니까요(이 때는 약간 공포를 느꼈습니다). 놀라운 생존력이죠?

 

포털사이트에 '광대나물'을 다시 검색하니 이른 봄에 보지 못했던 몇 가지 특징이 더 있었습니다. 광대나물의 씨는 싹이 잘 트고 오래 생존하며 바람, 비, 동물을 통해 퍼져나가는데*, 씨앗은 땅속에서 최대 5년간 생존하며 발아할 기회를 엿본다고 합니다. 게다가 벌이 찾아오지 않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자가수정을 통해 생존*할 수가 있다네요.


5년…… 5년이나요? 그리고 벌이 찾아오지 않아도 씨앗을 만들 수 있다고요? 광대나물을 살려 주기로(?) 했던 그날은 대체 왜 이런 내용이 보이지 않았던 걸까요. 광대나물과의 사투는 예상보다 더 길어질 것 같습니다. 작가님께서 걱정하실까 봐 말씀드리면, 그래도 뽑고 또 뽑은 덕분에 올핸 작년보다 상황이 한결 낫습니다.

(*출처 : 순서대로 *위키백과, *자닮/잡초도감)

 

  이 사건을 계기로 저는 반잡초파로 전향했습니다. 들풀의 생명력을 경외하고 들꽃의 소박함을 애정하며 그들이 잡초라 불리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는 것과 별개로, 수풀집 담장 안에는 들이지 않기로 결정했어요. 텃밭의 작물과 화단의 꽃을 위한 조치입니다.

 

  오늘 작가님께 편지를 쓰며, 인터넷 사전에 '잡초'를 검색해 봤습니다.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나서 자라는 여러 가지 풀로 농작물이 자라는데 해가 되기도 한다, 고 쓰여 있었어요. 읽고 보니 잡초가 아니라 제 맘 속 불안에 대한 설명 같기도 합니다. 기쁨과 감사 같은 것은 농작물과 같아서 저절로 나고 자라지 않는데, 불안은 잡초처럼 끊임없이 자라더라고요. 특히 프리랜서로 살기로 결정한 후에는 크고 작은 불안이 더 자주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수풀집에 싹을 틔운 한 포기 광대나물처럼, 어디선가 날아와 싹을 틔우고, 아름다운 꽃으로 매력을 뽐내다가, 어느덧 마음밭을 점령해 버리는 걸 느껴요. 불안에 너무나도 취약한 저는, 그걸 무력하게 지켜보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오늘, 7월의 텃밭에서 여전히 기세등등한 광대나물을 뽑으며 생각합니다. 이제는 그런 불안이 찾아오면 뿌리내리기 전에 얼른 뽑아내야겠다고요.

 

  지난 편지에 작가님은 스스로를 잡초 뽑기에 성의 없는 사람이라고 하셨지만, 작가님 방식대로 건강하게 텃밭 생활을 즐기는 농부로 보여요. 또 불안을 잘 다스리며 7년 차가 된 멋진 프리랜서 선배님으로도 보입니다. 

작가님의 텃밭과 마음밭엔 광대나물 같은 녀석은 얼씬도 않길 바라요. 그렇지만 아주 혹시라도 찾아든다면 제게 알려주세요. 특허 제초호미를 선물하고 싶습니다. 마음밭에 찾아든 잡초 같은 불안은 계절편지를 주고받으며 함께 뽑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텃밭에 나란히 앉아 품앗이하듯이요.

 

 

2023년 7월 12일

반잡초파 김미리 드림


추신. 광대나물이 좋았던 시절에는 이렇게나 사랑했어요……. 무려 꽃병에 꽂은 광대나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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