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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든 사람들의 말을 나이를 먹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큰 아이러니 아닐까. 대표적으로 “젊어서 머리 잘 돌아갈 때 공부하라”는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다가 시간을 펑펑 낭비하면서 생각했다. ‘그냥 나중에 하면 되지. 뭐 얼마나 달라진다고?’ 나이가 들어 어쩔 수 없이 공부를 다시 시작한 뒤 절규했다. 내 암기력 다 어디 갔어! 기억력 감퇴는 아주 뻔한 데서 깨닫게 된다. 친구 유정이와 지영이를 수십 번 헷갈리던 엄마처럼 고유명사부터 잊어버리는 것이다. 영화를 보다가 아는 배우가 나오면 그 사람에 관해 얘기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ㅇ…”으로 시작하다가 여섯 글자 정도의 모음이 여러 개 떠오르지만 일단 포기한다. 그리고 40분 뒤 이미 다른 걸 보고 있는데 갑자기 기억이 튀어나온다. “맞다, 페드로 파스칼!”(심지어 오스카 아이작과 혼동함) 그럴 때마다 나는 ‘전설의 고향’으로 가달라는 손님을 자연스럽게 ‘예술의 전당’으로 데려다줬다는 택시 기사 이야기가 실화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노화는 질병과 동의어가 아니지만, 40년 넘게 사용한 몸은 슬슬 기능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30년 된 아파트에 살면서 세탁기를 돌릴 때마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샌다거나 화장실 전등 스위치를 몇 번이나 눌러야 불이 켜지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세상에서 걷기를 세 번째로 싫어하는 나이지만(첫 번째는 등산, 두 번째는 달리기다), 이제는 밥 먹고 나면 투명 강아지에게 이끌리듯 스스로 산책하러 나간다. 위장 기능이 떨어져 수시로 체하기 때문이다. 천천히 적게 먹는 습관을 들이면 좋을 텐데, 칠순쯤 그럴 수 있길 바랄 뿐이다. 20대 때 별 어려움 없이 할 수 있던 요가 동작도 유연성이 떨어진 요즘은 훨씬 힘들다. “지은 님, 어깨를 좀 더 여세요!” “무릎을 더 구부리세요!” 같은 말이 들려올 때마다 ‘선생님, 저 40대라고요!’라며 속으로 울부짖지만, 아무리 귀찮아도 일주일 이상 요가를 빠지지 않는다. 그마저 안 하면 등허리가 아파 잠을 못 자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매일 꾸준히 연습하면 관절이 유연해질 거라고요? 앗, 잘 안 들 리 네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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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겨울에는 스마트폰 메시지를 쓸 때 오타가 많이 난다는 걸 알았다. ‘얘’를 쓰고 싶은데 ‘ㅒ’가 아니라 그 옆에 있는 ‘ㅑ’를 치게 되는 식인데, 이걸 일일이 수정하려니 이루 말할 수 없이 귀찮아 친구들과의 단톡방에는 오타투성이 문장을 그냥 보내고 만다. 그런데 어두운 저녁에 스마트폰 화면이 더 흐릿하게 보인다는 걸 깨닫고는 겁이 덜컥 났다. 자기 전에 불 끄고 몇 시간씩 스마트폰만 들여다본 업보가 이렇게 돌아오는 것인가!

“노안입니다.” 은테 안경을 쓴 반백의 안과 의사가 말했다. “보통 40대 중반에 시작되는데 사람에 따라 빨리 오기도 해요.” 노아 바움백의 영화 〈위아영〉에서 젊은이 문화를 따라 하느라 무리하게 자전거를 타다 통증으로 병원에 간 조시(벤 스틸러)도 의사에게 퇴행성 관절염과 노안에 대한 경고를 들었다. 내게도 때가 온 것이다.

이런 와중에도 나는 나이 먹는 게 조금은 재미있다. 드디어 나이 든 사람들의 생활 패턴을 이해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전에는 엄마의 외출용 가방에 왜 그렇게 잡다한 물건이 많은지 알 수 없었다. 이를테면 주유소에서 받은 포켓 티슈, 물병, 낱개 포장된 사탕 몇 개, 껌, 소화제, 구김이 적은 카디건, 스카프, 양산 같은 것들인데 이제는 나도 그것이 죄다 필요하다는 걸 안다. 뙤약볕 아래를 돌아다니고 영하의 날씨에도 구두를 신던 시절과는 달리 지금의 나는 더위와 추위, 햇볕에 민감해지고 갑자기 당이 떨어지거나 체하거나 기침이 나온다. 그래서 이 모든 짐을 이고 지고 다니는 데는 백팩이 최고이며, 보온과 통기성을 두루 갖춘 의상은 등산복이라는 어르신들의 패션 철학에도 동의한다. 모자는 역시 챙이 넓고 끈이 달린 게 좋지. 머리숱이 적어지니 파마는 좀 빠글빠글 말아야 해. 암, 그렇고말고요!



Writer 최지은
10년 넘게 대중문화 웹 매거진에서 일했다. 〈괜찮지 않습니다〉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런 얘기 하지 말까〉를 펴냈다. 늘 행복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재미있게 살고 있다. 뉴스레터 ‘없는 생활’ 발행 중.

- <엘르> 2023년, 2월호 발췌




엄마의 해방을 이야기하다,

한국형 SF 넷플릭스 영화 '정이'

_요주의여성 #79


정이 팀장, 자유롭게 살아요.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정이〉의 김현주

‘Jung_E’라는 영문 타이틀이 뜨는 순간, 슬쩍 웃음이 나왔습니다. 이처럼 정겨운 이름을 낯선 나라의 누군가가 읽어내는 상상이 어쩐지 재미있더라고요. 넷플릭스 영화 부문 글로벌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정이〉는 SF 특유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에 한국적인 정서가 결합한 작품입니다. SF 장르에 대한 기대감이 컸던 이들에겐 연상호 감독이 빚어낸 ‘한국형 SF’가 다소 아쉽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필자에겐 충분히 마음이 가고 여운이 남는 작품이었어요. 일단 ‘전사’로 분한 김현주 배우를 감상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만족스러웠지요. 데뷔 27년 차, 청춘스타로 사랑받았으며 오랜 시간 TV 드라마를 통해 대중과 호흡한 이 친숙한 배우가 OTT 플랫폼의 SF 신작에서 미래 전사로 등장하다니!
 
‘연니버스’라 불리는 창작자 연상호의 세계에서 여성 캐릭터는 줄곧 진화해왔습니다. 익숙한 얼굴에서 신선함을 이끌어내는 배우 활용법 또한 흥미롭습니다. 영화 〈염력〉에서 정유미 배우에게 ‘해맑은 악당’이라는 이색적인 모습을 끄집어낸 것처럼 말이죠(〈정이〉에 특별 출연한 엄지원 배우도 비슷한 기운을 풍기지요.) 김현주 배우의 변신은 연상호 감독의 전작인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에서 먼저 이뤄졌습니다. 이마에 새겨진 흉터에 삼단봉을 들고 거친 액션을 펼치는 김현주를 보고 우리도 놀랐으나, 어쩌면 배우 본인이 가장 놀랐을지도 모릅니다.
 
벽을 깨는 경험을 한 김현주는 〈정이〉에서 더 큰 도전에 뛰어들었습니다. 강인한 전사의 외형을 갖추는 것은 물론이고 로봇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데도 공을 들였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 안에 새로운 것을 하고 싶은 욕구는 늘 있었지만 용기가 적었던 것 같다. 연상호 감독의 실험 정신이 잠자고 있던 나의 도전정신을 깨워줬다.” 100분 남짓한 영화에 ‘윤정이’란 여성이 어떻게 최고의 용병이 됐는지, 어떤 자질과 기상을 지녔으며 어떤 고난을 겪었는지 자세히 담기란 어려운 일이었겠죠. 캐릭터의 빈틈을 채워주는 건 믿음직한 배우 김현주의 존재감과 연기력입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정이〉의 강수연


〈정이〉가 ‘엄마와 딸’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연상호 감독의 전작 속 ‘싸우는 엄마들’의 모습이 겹지기도 합니다. 좀비 떼를 피해 부른 배를 안고 달리던 〈부산행〉의 엄마(정유미), 총을 들고 두 딸을 지키던 〈반도〉의 엄마(이정현) 말이죠. 그러나 이번의 엄마는 좀 다른 결말을 맞이합니다. 고 강수연 배우가 연기한 정이의 딸 ‘서현’은 엄마의 뇌를 복제해 만든 인공지능 로봇이 가상 전투 미션에서 거듭 실패하는 이유가 ‘엄마로서’ 흔들리는 찰나 때문인 걸 알아챕니다. 엄마는 ‘엄마라서’ 강해지기도 하지만 ‘엄마여서’ 한계를 얻기도 하지요. 그리하여 서현은 로봇 정이의 ‘엄마로서의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삶을 선물하고자 합니다. “정이 팀장, 자유롭게 살아요.” 혹자는 신파라고 할지라도, 누군가의 딸이자 엄마인 이들은 마음 흔들릴 수밖에 없는 대목입니다.  
 
이 영화가 애틋하게 다가오는 또 한 가지 이유는 강수연 배우의 유작이란 점입니다. 그의 입으로 전하는 “자유롭게 살아요”라는 말은 앞서 길을 열었던 존재가 뒤따르는 이들에게 남기는 메시지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선구자로 살면서 그 역시 시대의 제약과 사명감으로 힘들었을 때가 많았겠지요. 〈정이〉를 통해 비로소 마주하게 된 배우 강수연이 더는 세상에 없다는 것이 애석할 따름입니다(부디 영면하시길).
 
영화는 인간의 육체, 엄마라는 숙명에서 해방된 로봇 정이가 높은 산에 올라 구름 낀 세상을 내려다보는 장면에서 끝이 납니다. 살면서 우리는 다양한 관계와 역할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하고 가능성을 펼쳐 나갑니다. 부디 여성이라는 이유로, 엄마라는 이유로 그들이 닿을 수 있는 세상이 좁아지지 않길. 영화가 끝나고 다시 한번 화면에 뜬 ‘Jung_E’라는 글자를 보면서, 이 정겨운 이름에 담긴 새로운 의미를 곱씹어 봅니다.




Writer 김아름
전 <엘르> 피처&라이프스타일 디렉터 김아름. 다양한 목소리를 전달하는 좋은 이야기의 힘을 믿으며 책과 영화, 각종 컬처 콘텐츠를 탐닉합니다.
 - <엘르> 2023년, 1월 웹기사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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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고민하던 외로움이라는 키워드를 전문적으로 정의 내려주신 것 같아서 좋았어요! 덕분에 저의 외로움의 실체에 대해 한 발짝 다가간 기분이에요!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엄청난 팬이었답니다! 대학생 때는 돈을 모으고 모아 악세서리를 그녀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구매하기도 했는데요. 다시금 이렇게 디자이너의 소식을 메일링으로 받아 반가웠습니다!

*출근 후에 후루룩 읽으려다가 묵직한 내용들이 많아 자세를 고치고 나누어 읽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여성의 삶의 중요한 지점들을 조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소 궁금했던 정보에 대해서 아주 쉽게 알수 있었습니다

*<고립의 시대>와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두 권 다 잘 읽은 책인데, 연달아 기사로 읽으니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부고 소식을 전하는 기사에서 "이 세상에 그처럼 옷을 입고 그처럼 행동하는 할머니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좀 더 자유로워졌을지도 모릅니다."라는 구절이 너무너무 가슴 찡했어요.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로고 플레이와 특유의 체크무늬, 반항적인 디자인을 좋아했으면서도 좋은 옷을 적게 사서 오래 입자는 캠페인이나 환경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을 잘 몰랐다는 게 안타깝고, 그녀의 사후에도 이런 의식이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정말로 그녀의 부고 소식이 너무너무 아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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