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속옷 사이즈를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의 주인공 이정과 스무 살의 철홍입니다.



[NO.37]


자신의 사이즈를 안다는 것


2022년 11월 19일



제가 저의 속옷 사이즈를 정확히 알지 못했던 이유는, 속옷을 직접 구매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스물한 살까지는 엄마가 사서 서랍장에 정리까지 해둔 팬티를 꺼내서 입기만 했었습니다. 그냥 말 그대로 ‘입기, 벗기’만 했던 것 같습니다. 다 입고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팬티를 세탁해 다시 내가 입을 수 있도록 개어서 서랍장에 넣어두는 것 역시 엄마가 다 해줬으니까요. 당연히 속옷의 사이즈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무엇보다 그걸 알아야 할 필요성 자체를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제가 저의 속옷 사이즈를 알게 된 날은 2009년 8월 10일입니다.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건, 저를 그날 훈련소에 입소 시켜준 국방부 덕분입니다. 오만가지 인상을 쓴 채 기계처럼 물품을 배급하고 있는 교관에게, 앞으로 내가 입을 군복과 군화, 그리고 속옷의 사이즈를 1초 만에 보고해야만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저는 마치 오랜만에 꺼낸 바지 뒷주머니에 들어 있던 만 원짜리를 찾아내듯 저의 사이즈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속옷은 사주는 대로 입는 게 아니라는 것. 나의 사이즈는 남이 알려주거나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 내가 나의 ‘크기’를 알아야, 이 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 후 맞지 않는 헐렁한 속옷을 입으며 깨닫게 되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이 막막하고 혼란스럽던 훈련소에서의 첫날밤에 이러한 교훈을 즉각적으로 깨달았던 것은 아닐 겁니다. 그건 너무 영화의 주인공스러운 서사겠죠. 다만 돌이켜 보면, 처음으로 나를 챙겨주는 사람의 손을 떠나 모든 것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고, 그것에 실패하면 즉각적인 체벌을 받아야 하는 환경에 놓여 있었던 그 총체적인 경험이 그런 깨달음을 얻게 해준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게 뭐라고. 고작 속옷 사이즈 하나 아는 게 뭐가 그렇게 대단한 거라고 군대까지 갔다 왔어야 했던 것인지 자괴감이 들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난 왜 이렇게 기본적인 것을 다 커서 깨달은 것일까. 겨우 그거 깨닫기 위해 군대가 필요한 거라면, 앞으로 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난 어디까지 갔다 와야 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했었죠.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그런 저를 위로해 주는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자신의 속옷 사이즈를 알지 못하는 이십 대 후반 나이의 이정입니다. 이정이 자신의 속옷 사이즈를 알지 못하는 이유는 저와 거의 같지만 조금은 다릅니다. 이정 역시 직접 자신의 속옷을 구매한 적이 없다는 것까지는 저와 동일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영화의 제목처럼 이정이 엄마 수경과 ‘같은 속옷을 입는 여자’라는 것입니다. 사실상 엄마 수경이 수경의 취향과 수경의 신체 사이즈에 맞게 구입한 ‘수경의 속옷’을 이정이 빌려 입고 있는 상황인 것이지요.


게다가 이정은 수경의 속옷을 ‘입기’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빨래까지 합니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이정은 세면대에서 속옷을 손빨래하면서 등장합니다. 이때 수경은 이정이 속옷을 빨고 있는 세면대 바로 옆에 놓인 변기에 앉아 소변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변을 마치자마자, 자신이 방금까지 입고 있던 속옷을 세면대에 던져 놓고 화장실을 나갑니다.


이 오프닝은 이정과 수경 모녀의 관계를 압축적으로 단번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훌륭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제목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모녀’라는 단어를 1차원적으로 풀어쓴 표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오프닝에 등장하는 이 두 여자는 분명 ‘모&녀’이기는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모녀’처럼 보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속옷은 하나의 예시일 뿐입니다. 영화는 그 뒤에 이어지는 에피소드를 통해 계속해서 이들을 ‘모녀’가 아닌, 같은 속옷을 입을 ‘뿐인’ 두 여자로 보게 만듭니다.

  


두 여자 중 아무래도 조금 더 마음이 기우는 쪽은 딸 이정입니다. 말하자면 이 영화를 보며 주로 드는 생각은, ‘저건 딸이 아닌데’가 보다는, ‘저건 엄마가 아닌데’라는 것입니다. 이정이 나름 모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순간은 많지만, 수경이 엄마 노릇을 하려는 모습은 거의 보이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수경은 오히려 이정을 계속해서 밀어내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수경은 절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틀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첫 번째 스텝은 사과입니다. 사과가 선행되어야만, 그 뒤의 이야기를 이제 한 번 시작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경의 입에선 절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나오지 않습니다. 행여나 마치 영화의 제목처럼, ‘모녀’라는 표현을 우회해서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로 표현한 것처럼, ‘미안하다’라는 말 또한 수경의 다른 행동으로 표현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끝까지 영화를 보기는 했지만, 영화엔 끝끝내 어떤 방식의 사과도 나오지 않습니다. 두 여자의 관계는 그렇게 종결이 됩니다.


모-녀 관계로 봤을 때 이러한 결말은 새드 엔딩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를 그저 모녀가 아닌 ‘두 여자’, 다시 한번 그저 속옷을 공유했을 뿐인 두 여자의 관계였다고 생각해 보면, 그렇게 슬픈 일이 아닌, 그럴 수도 있는 일이 일어난 것이기도 합니다. 서로 맞지 않은 두 여자가, 끝내 서로에게 사과하지 않고 관계를 끝냈다, 인 것이지요. 새드 엔딩일 수도 있지만, 해피 엔딩일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그냥 보통의 엔딩일 수도 있습니다.

  


영화가 그냥 그렇게 끝났다면 저는 이 엔딩에서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오프닝만큼 훌륭한 엔딩이, 저에게 이 영화를 해피 엔딩으로 기억하게 만들었습니다.


집을 나온 이정은 속옷 가게에서 브래지어를 보고 있습니다. 지금껏 자신의 옷은 있었어도 속옷은 없었던 이정이 집을 나와 가장 먼저 속옷을 사는 것은 당연한 수순입니다. 그렇게 이정은 이것저것을 골라 계산을 하려고 하는데 점원이 이런 말을 합니다.


점원 : “손님, 이거 사이즈가 다 제각각인데. 사이즈가 어떻게 되세요?”


이정 : “... 모르는데...”


점원 : “한 번 재 드릴게요. 의외로 사이즈 모르는 분들이 많아요.”


이제 드디어 자신의 사이즈를 알게 된 이정에게서, 무한한 가능성이 보였습니다. 자신의 무궁무진한 가치의 크기를 인지하지 못한 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어른들의 울타리에 갇혀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많은 이정들에게, 이 영화가 그로부터 탈출하는 이정표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사이즈를 자기 자신이 아는 것, 그것이 그 시작일 것입니다.



- ONE DAY ONE MOVIE by 김철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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