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없으면 잇몸?
Mar 21, 2023
아피스토의 풀-레터 vol.13
4년간 할 일 마친 투광기
쿠바펄이 바닥에 깔린 수초 어항

💡 식물을 사랑하는 당신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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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는 4년을 넘게 일하고 간 LED 투광기가 하나 있습니다. 투광기는 실외 간판을 밝히거나 공장의 작업등으로 많이 쓰는 조명이죠. 눈에 빛이 한번 들어오면 한동안 눈이 얼얼합니다. 시쳇말로 ‘눈뽕’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밝아요. 


저는 이 투광기를 수초 키우는 조명으로 사용해왔습니다. 빛은 물속으로 들어가면 빛의 양이 급격하게 줄어듭니다. 빛의 일부는 수면 위로 반사되고, 일부는 물에 흡수되기 때문인데요. 투광기는 강한 빛을 가진 조명이어서 어항 바닥까지 빛이 닿습니다. 


저는 어항 바닥에 수초 식재용 흙(aqua soil, 아쿠아 소일)을 깔고, 그 위에 짧고 빽빽하게 자라는 ‘쿠바펄’이라는 수초를 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쿠바펄이 어항 바닥을 낮게 포복하며 사방으로 뻗어 자라면 어항 속에 드넓은 초원 풍경이 연출되거든요. 그런데 쿠바펄이 넓게 퍼지려면 광합성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항 바닥까지 빛이 닿아야 합니다. 


LED가 나오기 전 쿠바펄을 키우기 위해서는 메탈할라이드등이 주로 쓰였습니다. 메탈할라이드등은 가로등에 쓰일 정도로 강한 광량을 가지고 있어 어항 바닥까지 빛이 도달하기에 충분하죠. 하지만 이 등을 사용하려면 엄청난 전기세를 감당해야 합니다. 왠만큼 수초에 진심이 아니고서야 메탈할라이드등을 어항 위에 달 수 없는 노릇입니다. 


몇 년 전부터 수초조명도 빠르게 LED로 바뀌었습니다. 메탈할라이드나 할로겐으로 만들었던 투광기도 LED로 대체되었고요. 수초를 키우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LED 투광기로도 수초가 잘 자란다는 것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저 역시 LED 투광기를 어항 위에 서너 개씩 주렁주렁 달고 신나게 쿠바펄을 심기 시작했습니다. 소문 대로 투광기는 강력한 빛을 뿜어댔죠. 어항은 점점 ‘푸른 초원’이 되어갔습니다. 


하지만 어항 속에 ‘푸른 초원’의 꿈을 실현하고 나니 서서히 쿠바펄에 대한 열정의 농도가  옅어졌습니다. 그 이후가 문제였기 때문이죠. 푸른 초원을 그 모습 그대로 오랫동안 관상하려면 그만큼 물갈이의 주기가 짧아져야 했습니다.


‘허, 푸른 초원을 감상하려면 매일 물지게 지고 물갈이를 해야 할 판이네!’ 


어느덧 저의 관심사는 물밖에서 자라는 열대관엽식물로 옮겨갔습니다. 물갈이를 하지 않고도 언제나 싱싱함을 유지하는 물밖의 식물로 말이죠! 관엽식물은 볕 좋은 자리가 가장 큰 보약이지만, 아침 나절 겨우 빛이 들어오는 북향에서 식물을 키우는 저로서는 그 빛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사이 식물전용 LED도 보급되었지만 가격이 문제였습니다. 일반 LED에 10배는 됐으니까요. 점점 늘어나는 식물에게 모두 값비싼 식물등을 달아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식어가는 쿠바펄에 대한 열정만큼, 놀고 있는 투광기의 개수도 늘어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무 의심 없이 투광기를 식물들에게 달아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식물들도 아무 의심없이 광합성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오, 물밖의 식물도 투광기로 잘 자라네?’


특히 고사리는 투광기로도 잘 자라주었습니다. 잘 자라니 고맙긴 한데 이게 과연 맞는 방법인지는 알 길은 없었죠. 어찌 되었든 잘 자라니 그걸로 족했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투광기로 식물을 키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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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광기도 수명이 다해갈 때 즈음, 운 좋게 LED 식물등 개발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때다 싶어 그간 식물등에 대해 궁금한 것을 그에게 쏟아내기 시작했죠. 개발자 입장에서는 당연하게 생각했을 법한 질문이지만, 당연하지 않은 것처럼 답을 해주더군요. 그는 못 다 한 질문은 이메일로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저의 조명 지식은 백지였으므로, 질문은 밑도 끝도 없었습니다. 다짜고짜 이메일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일반 LED등으로도 식물이 자랄 수 있는 게 맞나요?’ ‘식물등은 왜 이렇게 비싼가요?’ ‘적색과 청색으로 된 식물등도 있던데 그냥 셀로판지로 붙여서 키우면 안 되나요?’ ‘무슨 원리로 인공조명으로 식물을 키울 수 있는 거죠?’


개발자는 저의 질문 폭탄 세례를 온몸으로 받아냈고, 수많은 예를 들어 회신을 보내왔습니다. 회신이 오면 또 궁금한 것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두 달간 십여 차례 이메일로 문답을 주고 받았습니다. 제가 이해할 때까지 질문을 보내면, 그는 이해가 될 때까지 답을 해주었습니다. 저는 식물등에 대한 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될 즈음 그에게 부탁했습니다. 


“제 유튜브 채널에 이 내용을 정리해서 업로드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의 대답은 ‘예스’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외의 조건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저희 업체명은 빼주시면 좋겠습니다.”

“아, 그래요. 왜죠?”

“저희는 제품 판매도 중요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식물등의 정확한 정보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업체명이 들어가면 객관성을 잃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아니, 이런 찰떡궁합이 있나! 사실 저도 업체명을 넣으면 홍보영상으로 보일 것 같아 고민했거든요. 정확한 식물등 정보라면 편파적인 지식일 리 없지만, 저도 가끔 제품 리뷰 영상을 올릴 때 ‘내돈내산’을 강조해도 구독자에게 홍보로 비춰지는 경우가 있어서 항상 조심하게 되더라고요.”


서로의 생각이 같다는 걸 확인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 뒤로도 이메일을 몇 번 더 보낼 때마다 그에게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하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면, 그는 “아닙니다! 바른 보광재배 정착을 위해 항상 고민해왔는데 오히려 저희에게 힘이 됩니다”라고 답이 왔습니다. 

‘거참, 이렇게 건전한 문답은 참으로 오랜만이네.’


식물등 개발자와 이메일 문답을 주고받으면서 알게 된 것은 일반 LED나 투광기로도 식물은 자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 LED에도 식물이 광합성을 하는 데 필요한 파장이 어느 정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더구나 고사리는 투광기와 궁합이 맞았던 것입니다. 


이 투광기는 4년간 15,000시간 동안 식물의 광합성을 돕고 수명을 다했습니다. 투광기의 수명을 다 한 자리에는 식물등이 대신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몇몇의 식물들은 여전히 투광기로 광합성을 하고 있죠. 운 좋게 ‘투광기로도’ 광합성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투광기조차’ 식물에게 성장 동력이 된다는 것이 경이롭습니다.


고사리가 투광기와 광합성 궁합이 맞은 이유도 있겠지만, 식물에게 완벽한 조건이란 없는 건지도 모릅니다. 환경에 맞게 적응해나가는 걸 보면 말이죠. 그것이 인류보다 먼저 지구상에 생존해온 식물의 전략인지도 모르고요. 식물은 움직이지 못하는 대신 그 자리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했을 테니까요. 


아피스토 드림

📺 오늘의 관련 영상
식물등 개발자와 이메일 인터뷰를 정리한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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