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굴과 죽을 때까지 씨름한 ssul
Jan 24, 2023
아피스토의 풀-레터 vol.9
4년 전의 으름덩굴  

💣 식물을 사랑하는 당신께


부모님댁 마당 울타리는 으름덩굴이 덮여 있습니다. 식물에 관심이 없을 때는 보이지도 않더니 몇년 전부터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워낙 오래 묵은 덩굴이라 철망 너머 풍경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성하게 자랐지요. 문제는 덩굴의 성장세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겁니다. 오를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잡고 오릅니다. 급기야 울타리를 발판 삼아 마당의 단풍나무까지 뒤덮더니, 가을마다 고운 빛깔을 뽐내던 단풍을 물들지 못하게 해버렸죠. 


이러다간 지붕까지 덮치겠어! 메두사의 목을 베어버리지 않는다면 우린 모두 돌로 변해버리고 말 거야.


문득, 자신의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하르페’라는 칼을 차고 메두사의 목을 치러 떠났다는 그리스신화의  페르세우스가 떠올랐습니다. 저에게도 하르페가 필요했습니다.  


“아버지, 장대낫 좀 주시죠.”     

“그, 그래. 옛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 거라.”

“예, 아버지. 걱정하지 마시고 들어가 계셔요.”


아버지는 돌아서며 한마디를 남깁니다. 


“으름 열매가 달고 맛있다고 해서 심었는데 20년이 넘도록 열매는커녕 씨도 구경 못했구나…”


뭬야?! 결국 단풍나무를 뒤덮어 씨를 말리려 한 것은, 자신이 씨를 맺지 못한 원한을 풀기 위해 벌인 ‘묻지마 화풀이’였던 것인가!


그날, 단풍나무를 휘감고 있는 으름덩굴 앞에서 종횡으로 미친듯이 긴 장대낫을 휘둘러댔습니다. 하지만 벽이 온통 덩굴로 덮여 있는 탓에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메두사의 목은 보이지 않았죠. 이 상태로는 잘린 줄기에서 더 많은 생장점을 내며 풍성해질 게 분명했습니다. 가지치기는 식물의 생장점을 자극해 더 많은 가지를 내는 법이니까요. 지난 가을의 이야기입니다. 그날 승패를 가르지 못한 채 으름덩굴과의 첫 번째 전투는 끝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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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설연휴에 다시 부모님댁을 찾았습니다. 집앞에 도착하니 철망을 칭칭 감고 있는 으름덩굴이 제일 먼저 보였습니다. 덩굴을 보자마자 까맣게 잊고 있던 지난 가을의 기억이 퍼뜩 떠올랐습니다. 철망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덩굴 줄기를 매만지며 적군의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죠. 지난번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잎이 떨어져 있어 줄기가 잘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상한 대로 잘린 줄기 끝에서 두세 개의 생장점을 나오면서 새 줄기들이 뻗어나고 있었습니다. 역효과를 낸 자신을 한탄하며 저의 눈빛에는 날이 서기 시작했죠. 

 

내가 어리석었어. 줄기만 잘라낸 것이 ‘가지치기 효과’를 내서 오히려 덩굴을 더 풍성하게 만들었군. 세력의 확장만 도와준 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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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름덩굴은 몬스테라처럼 줄기마다 공기뿌리가 나오지도 않고, 담쟁이처럼 흡착판을 벽에 붙이고 오르지도 않아. 오직 물체에 줄기를 휘감으면서 올라가지. 철망과 같은 형태의 벽이라면 으름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지지대야.”  


마침 아는 (식물친구) 형님에게 전화가 와서 통화할 일이 있었습니다. 사정을 이야기하니  ‘으름덩굴의 벽타기 신공’을 알려주더군요. 


“아니, 형님. 공기뿌리도 없고 흡착판도 없는데 저렇게 기세가 좋은 이유가 대체 뭐랍니까?”

“으름은 하나의 줄기에서 엄청나게 많은 줄기를 뽑아낸다네. 마치 문어발처럼 말일세. 탄력을 받기 시작하면 어느 줄기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줄기를 뻗어내. 심지어 자신의 줄기마저 지지대 삼아 칭칭 감아 올라간다네.”


으름은 가지치기를 하지 않아도 하나의 줄기에서 두세 줄기를 뽑아내는 식물이었습니다. 그런 식물의 줄기까지 쳐냈으니 으름의 세력 확장에 제대로 불을 지핀 격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덩굴식물을 정말 좋아합니다. 최근 집 안에서 키우는 열대관엽식물의 대부분이 덩굴식물이기도 하죠. 몬스테라는 말할 것도 없고 필로덴드론, 호야, 에피프레넘, 라피도포라는 열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덩굴식물입니다.


덩굴식물을 좋아한 나머지 한쪽 벽면에 수태벽을 붙이고 온갖 열대식물을 키우기도 했습니다. 서로 다른 종끼리 경쟁하며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식물 키우기의 또 다른 재미를 느꼈죠. 엎치락뒤치락해도 결국 성장력이 좋은 식물은 정해져 있습니다. 바로 스킨답서스인데요. 이제 스킨답서스는 수태벽도 모자라 천장에 매달려 반대편 벽으로 건너가는 중입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즐겁기만 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자생식물 으름덩굴이 이렇게 위협적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어린 순은 나물로도 먹을 수 있고, 줄기와 뿌리는 이뇨와 신경통에 특효라고 하니, 제법 쓸모 있는 식물인데도 말이죠. 그렇지만 부모님댁의 으름덩굴은 이미 괴물로 변해버린 상황이었습니다. 당장 손 쓰지 않으면 덩굴이 나의 발목부터 휘감을 판이었으니까요. 


그나마 다행인 건 잎을 다 떨군 겨울이 전술을 펼치기에 적기라는 것입니다. 으름은 하나의 줄기에서 많은 줄기를 뽑아낸다고 했으니, 줄기가 어디서 시작되는지 안다면 ‘메두사의 목’을 치는 일은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장대낫으로 엉킨 잔가지를 툭툭 쳐내며 줄기의 시작점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메두사의 목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뭐지? 목이 보이질 않아! 어느 목을 쳐야 하는가?! 전부 다 목이야. 메두사의 분신술인가?


잔가지를 걷어내면 굵고 단단한 첫번째 줄기 하나가 나올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잔가지를 걷어내니 굵고 단단한 줄기가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아버지, 몇 그루를 심은 겁니까?”

“한 그루 심었다.”

“한 그루를 심었는데 왜 줄기는 수십 개랍니까?!”

“낸들 아니…”


절망이었죠. 이미 땅 아래에서 뿌리가 사방으로 뻗어 새 줄기들이 곳곳에서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하나의 줄기만 쳐내면 될 거라는 생각은 오산이었습니다. 철망을 따라 길게 늘어선 수많은 메두사의 목들이 “날 쳐보시지" 하며 기괴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좋다. 이 요괴야. 칼을 뽑았으니 무라도 썰어주마!”


아침나절, 저는 광란의 장대낫질을 해댔습니다. ‘나는 과연 식물집사가 맞는가?’ 하는 모순적 상황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죠. 철망의 앞쪽과 뒤쪽을 오가며 파상공세를 펼치는 동안, 서서히 으름덩굴로 빽빽하던 철망 사이로 바깥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맨처음 눈 쌓인 논밭 풍경이 보였고, 그 위를 좋다고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고는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죠. 


이것은 필시 기쁨의 눈물이렷다?

.

.

아, 땀이구나…


-

비처럼 쏟아지는 땀을 훔치고는 집으로 들어와 점퍼를 벗었습니다. 온몸에서 아지랑이가 활활 피어오릅니다. 그리고 밥 세 공기를 흡입하고는 곯아떨어졌습니다. 눈을 뜨니 밖은 이미 어둑어둑합니다. 전투의 승자가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단지 팔다리, 손목발목, 허리목, 관절에서 죄다 바람 소리만 날 뿐입니다. 

 



아피스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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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틈이 식물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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