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마티 단톡방을 보고 있으면,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있구나 싶은 때가 있습니다. 대체로 본인이 지금 몰두하고 있는 것을 나누고 싶어서 말을 꺼냈는데, 그게 동시 다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순간이죠. 이번 호가 그렇습니다.

『작가 피정』 마감한 퐁퐁은 편집 후기를, 외서 기획에 빠져 있는 죽순은 번역 의뢰의 순간을, 새로 음반에 빠져 있는 모베는 다른 방식으로 듣기의 즐거움에 대해 썼어요. 어째 정말 마티 단톡방을 보는 듯하네요. (마티 사람들이 이렇게 말이 많냐고요? 네, 그렇습니다. 👻)

『작가 피정』 미리보기  
🧼퐁퐁

온(on) 시리즈 3권 번역가 노시내의 『작가 피정』이 출간되었습니다. 취리히에서 사십 일간 머무르며 써내려간 피정의 기록에서 편집자가 뽑은 장면들을 소개합니다. 

📖 291쪽

“떠도는 삶을 계속하면서 ‘집’이나 ‘고향’의 정의가 어느 순간 물리적인 공간보다는 ‘아끼는 사람들의 곁’이 되어버린 후로, 이젠 무엇을 모으지도 않고, 어디 가서 기념품도 잘 사지 않게 됐으며, 더하기보다는 없애는 일에 정성을 쏟고 희열을 느끼게 됐다.”

🧳 지금 가장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판단하는 것. 이 포기가 쉽지 않아서 고민할 때면 선생님은 “무엇을 갖기보다 무엇을 하는데” 정성을 쏟는다고 말합니다. 
“낯선 곳을 돌아다니며 사느라고 새로운 환경과 급변하는 일상에 스트레스를 받을 때, 안심하고 들어설 수 있는 한결같은 공간”이 되어주는 번역을 하고, 고향으로 삼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돌보고, 언어의 묘미에 취하고, 현지 음식을 탐색합니다. 이 모든 것은 지금 머무는 곳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자세히 알아가는 과정이자, 그 도시의 내부로 발을 내딛는 일이었습니다. 『작가 피정』에는 바로 그런 이야기들이 담겨 있어요. 자신으로부터 시작해 바깥으로 나아가는 이야기가요.

📖 35쪽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외국으로 나가는 러시아인이 얼마나 많았던지 러시아의 각 공항이 대단히 붐볐다. 특히 개를 데리고 출국하는 사람이 많아서, 공항 직원들이 어디 외국에 개와 관련된 국제 행사라도 열리는지 물었다고 한다. 잠깐 여행하는 사람은 반려동물을 두고 간다. 하지만 영구 이주하는 사람은 반려동물을 데리고 간다.

(...) 한 나라의 정권은 국민이 나라를 뜨고 싶은 생각만 안 들게 해도 준수한 성공을 거두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푸틴은 분명히 실패했다.”

🕊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1년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러시아 정권을 냉정하게 비판하지만, 한편으로는 복잡하고 착잡한 심정이라고 말합니다. 러시아에서 인생의 4년을 보냈으니까요. 

선생님이 휴대폰을 들면 뉴스부터 검색해보고,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한 팟캐스트를 찾아 듣는 모습을 보면서 현 사태를 단순히 먼 나라의 안타까운 현실로 치부하지 않겠다는 마음,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민 의식을 느낄 수 있었어요.

📖 47쪽

“스위스는 독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그리고 구어체 라틴어의 후신인 로만슈어까지 공용어가 네 개이므로, 공영방송이 네 개 언어로 나간다. (...) 스위스 상점에서 상품 라벨을 살펴보면 글씨가 유난히 작다. 한정된 공간에 내용물 정보를 최소한 독어, 프랑스어 두 개 공용어로, 경우에 따라 이탈리아어까지 추가해 세 개 공용어로 표기 하느라 그렇다.”

🇨🇭 공용어가 네 개인 나라라니! 게다가 스위스 국민 다수가 사용하는 독일어는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배우는 표준 독어와 어릴 때부터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들으며 익히는 스위스 독어로 나뉩니다. 두 언어는 거의 별개의 언어라 해도 될 정도로 큰 차이가 나고요. 스위스 독어는 음성 언어여서 문법책도 없는 데다, 지역마다 문법과 용어 사용이 다르다고 해요. 단일 언어 국가에서 나고 자란 한국 독자들에게는 낯설고 흥미로운 이야기죠. “남이 나와 같은 언어를 꼭 쓰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온 국민이 인식하며 살아”가는 모습에서 다양성을 포용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어요. 

📖 83쪽

“과거 영국 식민지 시절의 영향으로 파키스탄에서 하나의 식문화로 자리 잡은 ‘하이티’— 원칙적으로 High Tea라고 표기해야 하나 파키스탄에서는 흔히 Hi-Tea로 표기한다—에도 전형적으로 튀긴 음식과 고기 요리, 그리고 다양한 디저트가 나온다. (...)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파키스탄 하이티에는 장미수 시럽에 담근 미니 도넛 ‘굴랍자문’( گلاب جامن)이나 달콤한 쌀 푸딩 ‘키르’( کھیر) 또는 캐슈너트를 갈아 버터와 시럽으로 반죽한 것에 식용 은박지를 붙여 정연하게 마름모 꼴로 자른 ‘카주 카틀리’( کاجو کتلی) 등 다양한 전통 디저트가 푸짐하게 나왔다.” 

🍷 『작가 피정』에는 먹는 이야기가 쏠쏠하게 담겨 있어요. 노시내 선생님은 맛보고 즐기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음식을 둘러싼 이야기들로 제법 깊숙이 파고들어갑니다. 오랜 시간 타국 생활을 하면서 ‘갖기’보다 ‘하기’에 정성을 쏟기로 한 선생님에게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자신을 돌보는 일이자 지금 머무는 곳의 내부로 발을 내딛는 한 방법이 아니었을까요.

눈길을 사로잡는 음식에 관한 일화가 가득한데, 특히 파키스탄의 음식들은 그 이름부터(단어의 생김새도!) 낯설고 흥미로웠어요. ‘카주 카틀리’는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아 검색을 해보고 깜짝 놀랐어요. 선생님이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사진을 찍어 보냈더니 “웬 갈치냐?” 하는 답장이 왔다고.  

📖 327쪽

small small [스몰 스몰]

파키스탄 사람들은 작은 물건이 여러 개 있는 상황을 묘사할 때 ‘작다’는 의미의 형용사 small을 “스몰 스몰” 하고 꼭 두 번씩 반복하는 습관이 있다. 한국어로 옮기려면 어떤 말이 적당할까 생각해보다가 쪼만쪼만하다는 표현이 생각났다. I bought some small small things. 나 쪼만쪼만한 물건들을 좀 샀어.

자꾸 들으니까 귀여워서 나도 어느새 “스몰 스몰” 하고 따라하게 된다.

🎈 순식간에 마티 편집부 유행어 1위에 등극한 단어. “스몰 스몰”. 입에 찰싹 달라붙었습니다. 

온(on) 시리즈에는 저자의 생각을 키워준 경험, 자료의 출처를 밝히거나 저자의 관심사를 좀 더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부록이 있습니다. 『스페이스 (논)픽션』에는 정지돈 작가가 공간에 관한 글을 쓰게 된 경위를 밝힌 「코멘터리」, 『도서관은 살아 있다』에는 방대한 도서관 정보가 담긴 「도서관여행자의 서재」를 실었죠. 『작가 피정』에는 노시내 선생님이 여섯 개 나라, 열 개 도시를 거치며 마음에 새긴 말들을 기록한 「주워 모은 말들」이 있어요. 러시아어, 스위스 독어, 표준 독어, 우르두어, 이탈리아어, 미국식 영어, 남아시아식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스물 두 개의 말들을 꼭 소리 내어 읽어보시길!

번역을 의뢰합니다
🌱죽순

책에 맞춤한 번역자를 찾기 위해 오늘도 저의 머리는 팽팽 돕니다. 첫 번째 갈림길은 언어입니다. 너무 당연한 소리라고요? 하지만 번역자가 반드시 한 언어에만 능통한 것은 아니니 고민이 됩니다.  『마이너 필링스』 등을 번역하신 노시내 선생님은 영어와 일본어 모두 한국어로 옮길 수 있지만, 『작가 피정』에서 밝히듯 영어 번역 작업에 더 흥미를 느끼시죠. 미학 원전 시리즈를 번역하고 해제를 쓰신 서양철학자 김동훈 선생님은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번역이 가능하시니, 사실상 번역의 먼치킨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 갈림길에서 김동훈 선생님을 뒤로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바로 책의 분야 때문이죠.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탐색의 시간입니다. 문학과 비문학 중 대체로 비문학으로 들어서는 저는 눈을 크게 뜨고 서점을 뒤집니다. 정치, 사회, 과학, 예술, 역사 같은 상위 분야보다 정치사, 정치비평, 젠더, 환경, 뇌과학, 물리학, 음악, 미술, 전쟁사, 음식사 등 하위 분야로 파고들어 번역자를 찾습니다. 
세부 분야의 번역서를 죽 살피다가, 잠시 주저합니다. 해당 ‘언어’ 전문가에게 맡길 것인가, 해당 ‘주제’ 전문가(전공자)에게 맡길 것인가! 예컨대, 젠더 분야 책의 경우 용어 선택에 주의해야 하고 최신 이슈와 담론을 예민하게 반영하기 위해서 활동가나 연구자에게 번역을 의뢰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해봅니다. 이건 굉장한 도전이 될 수도 있어요. 전문 지식은 책을 읽고 이해하는 데에는 당연히 도움이 되지만, 그것이 책을 번역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아, 그리고 유년기와 청년기에 공부했던 전공과 무관하게, 전문 번역가 분들에겐 ‘번역을 하다 생긴 전공’이 생기기도 하니 그 점 또한 유심히 들여다봅니다. 

책과 번역자를 멋지게 이었을 때 편집자의 기쁨은 배가됩니다.🤸🏻‍♀️
작곡을 전공했고 뇌과학에 관심이 많은 영어 번역가 장호연 선생님은 『NPR 클래식 음악/음반 가이드』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고전적 양식』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등 클래식 음악 책과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치유하는 뇌』 등 뇌과학 책을 여럿 번역하셨어요. 올리버 색스의 『뮤지코필리아: 뇌와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장호연 선생님이 번역하신 건 얼마나 절묘한지!
법학과 정책학을 전공한 노시내 선생님이 마티에서 『누가 포퓰리스트인가?』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등을 옮기고, 후마니타스에서 『책임 정당』 『대표』 등 굵직한 정치 이론서를 번역하신 것 또한 찰떡! 

번역해서 소개하고 싶은 책을 출판사에 먼저 제안하는 기획번역가도 종종 만납니다. 23년도 출간 예정작인 『실패 없는 젠더 표현』을 작업해주실 일본어 번역가 조지혜 선생님을 그렇게 만났습니다. 또하나의문화 출판사에서 오랜 시간 일하시며 장착된 밝은 눈을 전문 번역가로 전업하신 후 제대로 발휘하고 계신 듯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조지혜 선생님의 전공은 건축학이래요. 아니 근데, 『실버 스푼』 『미래주의 요리책』을 번역한 요리평론가 이용재 선생님과 『바그너리즘』을 번역 중인 🔈모베도 건축 전공이란 말이죠. 대체⋯ 건축학이란 무엇이란 말입니까?

아무튼,
‘의뢰하다’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① 남에게 부탁하다.
② 굳게 믿고 의지하다.
편집자가 번역을 의뢰할 때 마음이 꼭 이렇습니다.

굴드베르크, 다른 방식으로 듣기  
21세기가 된 지 23년째 접어들지만, 우리는 여전히 20세기를 파먹고 삽니다. 20세기의 영화와 디자인은 끊임없는 속편과 리메이크로 새 생명을 얻습니다. 음반 시장은 더합니다. 땅속에 묻은 지 오래 지난 엘피가 완전히 부활했고, 가져본 적 없지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시티팝의 인기도 나날이 높아집니다. 메이저 클래식 음악 음반사의 주력 상품도 여전히 20세기 아티스트인 경우가 많습니다. 도이치그라모폰이라면 카라얀, 소니는 단연 글렌 굴드입니다.

글렌 굴드가 남긴 음반은 몇 년마다 꾸준히 옷을 갈아입고 재발매됩니다. ‘더 글렌 굴드 에디션’ ‘마스터웍스 익스팬디드 에디션’ ‘더 컴플릿 오리지널 자켓 컬렉션’ 등 굴드는 소니의 화수분입니다. 패키지만 바꾸며 우려먹던 소니가 드디어 최종판을 내놓았습니다. 사실 이게 출시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1981년 골드베르크 변주곡 녹음 세션 마스터 테이프를 그대로 열 장의 시디에 담고 새롭게 리마스터링한 골드베르크 변주곡 앨범을 추가한 에디션입니다. 1981년 4월 22일부터 5월 29일 사이 11일에 걸쳐 진행된 녹음 세션을 통째로 음반으로 만든 겁니다. 이 녹음을 편집해 1982년 발매한 음반이 ‘굴드베르크’라고 불리는 바로 그 음반입니다. 아마도 가장 유명하고 많이 팔린 클래식 음반 중 하나인 그 음반, 구독자 님들도 가지고 있거나 즐겨 듣는 그 음반 맞습니다.
 
이 흔치 않은 에디션을 듣고 있으면 온갖 생각이 듭니다. 공연장보다 스튜디오를, 실황보다는 음반을 사랑한 굴드는 이 에디션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녹음과 편집 기술, 음반이 실황의 대리보충(데리다의 표현을 빌려쓰자면)이 아니라고 여긴 굴드였으니 환영했을까요? 우연적 요소를 제거하고 완전히 통제된 음반으로 음악 세계를 빚어낸 굴드였으니 이 불완전한 파편들에 경악했을까요? 어쩌면 둘 다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뜨악하면서도 호기심이 엄청나게 동했을 테지요. 저는 5장까지 정독, 아니 정청했는데요, 완전히 빠져들었습니다.

무엇보다 놀란 건, 잘게 쪼개진 녹음 테이크의 길이입니다. 아리아와 30개의 변주곡으로 구성된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대략 연주시간이 1시간 전후입니다. 굴드는 좀 짧아서 50분 대이고요. 굴드는 2분 남짓한 변주 하나씩 연주해 전체 곡을 만들어나갑니다. 전체 또는 상당 부분을 한 번에 연주한 뒤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는 식으로 녹음하지 않습니다. 철저히 부분만 모아서 전체를 이어가는 식으로 녹음을 합니다. 곡 전체에 대한 템포 감각과 감정 상태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30초, 1분씩 녹음한 단편으로 한달음에 달린 듯한 51분 전체를 만들어내고 편집해낸 굴드와 프로듀서들의 기술은 듣고도 믿기 힘들었습니다. 매번 “Once more, please”라고 말하는 굴드의 집착이 고스란히 담긴 이 에디션은 그야말로 20세기의 한 단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음악을 듣는 방법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녹음 기술의 현장, 그것도 이 기술을 끝까지 밀어부친 순간을 엿볼 수 있는 너무 근사한 기념물입니다. 이제 소니가 굴드로 꺼낼 카드가 남아 있을까요? 어쩌면 저 마스터테이프를 시디이 아니라 릴테이프에 복사해 출시하는 초한정판 울트라 하이퍼 스페셜 에디션 정도만 남아 있지 싶습니다. 릴데크를 구하고 그날을 기다려 보기로 합니다.
이번 주 마티의 각주 어떠셨나요?
좋았어요🙂               아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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