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입문부터 기어서 들어갈 줄은 몰랐죠...
Nov 15, 2022
아피스토의 풀-레터 vol.4
정글이 되긴 했는데 그다음이 문제


💬식물을 사랑하는 당신께
하다보니 사무실이 정말 밀림이 되었습니다.
후-. 저는 정말 여기서 뼈를 묻어야 하나요?

3년 전 겨울, 건물의 공용히터가 고장났습니다. 그때 역시 어항과 식물들이 공간을 점령했었죠. 사람이야 퇴근하면 된다지만, 물고기와 식물들은 퇴근도 할 수 없습니다. 임대인에게 전화를 걸어 부탁했습니다.

"사장님, (식물들이) 너무 춥네요. 빨리 공사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임대인은 당장 돈이 없다며, 석유난로를 들여주겠다고 합니다. 오피스텔 11층에 석유난로라니요? 전 무슨 배짱이었는지 임대인에게 으름장을 놓습니다. 

"사장님, 그럼 전 방을 빼겠습니다. 내일이라도 당장 뺄 수 있습니다."

사실 어항은 이미 20개가 넘었으므로, 방을 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당시 오피스텔에 공실이 제법 있다는 한 줄 정보를 줏어들은 게 전부였죠. 다행히 건물 전체에 난방기 공사가 시작되면서 '그 해 겨울'은 극적으로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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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3년이 지났는데요. 그 사이 '11층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사무실이 있다'고 소문이 나돈 모양입니다. 벽까지 뿌리가 박힌 식물들과 수 톤의 물이 담긴 어항들, 그리고 무게라면 빠지지 않는 책까지 빼곡하게 들어차 있으니, 제가 '빼박'이란 걸 임대인도 눈치를 챈 거죠. 임대인은 장사가 잘되는 가게는 멀리서도 냄새를 맡고 임대료를 올린다고 하잖아요. 제가 일하는 출판사 사무실은 장사가 잘되는지 안 되는지 알 길이 없는 사각지대라고 안심했는데, 결국 꼬리가 밟힌 겁니다. 어항과 식물들이 사무실을 뒤덮고 있는 상황이라, 사실상 제가 '이사 불가'라는 걸 파악한 걸까요? 결국 그다음해 재계약 달에 임대인에게서 임대료를 올리겠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올 게 왔구나. 이제는 내가 진짜 을 오브 을이 됐구나.'

그래도 임대인이 직접 들어와서 본 게 아니니 임대료가 소폭 상승한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아마 임대인이 실제로 사무실을 들어와봤다면 속으로 '더 올려도 되겠다'고 생각하며 덩실덩실 춤 췄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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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쪽 벽면 기둥을 덩굴식물로 채우기로 했습니다. 높이 230센티미터, 폭 100센티미터의 기둥에 말이죠. 그래서 올해 2월, 열대의 덩굴식물들을 '한땀 한땀' 벽면에 식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손바닥보다 작았던 열대식물들은 세 번의 계절을 나는 동안 경쟁적으로 뿌리를 박고 벽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잎을 찢어내면서 드라마틱하게 탈바꿈했죠. 열대식물은 몸집이 커지면 어릴 땐 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잎을 보여주거든요. 심지어 스킨답서스도 벽에 태워서 키우면 잎이 어른 얼굴만 해지면서 찢어지기 시작합니다. 하루하루 벽면은 치열한 생존의 각축장으로 변해갔습니다. 클라이밍 대회도 이보다 전투적이진 않을 겁니다. 빛을 향한 오름은 한치의 양보도 없습니다. 어디든 뿌리가 닿을 수만 있다면 밟고 올라서야 살아남습니다.

하지만 이 덩굴식물들에게도 나름의 생존 규칙을 가지고 있어요. 식물학자 이나가키 히데히로의 <세계사를 바꾼 15가지 식물>이라는 책에서는 덩굴식물인 라피도포라의 생존방식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라피도포라의 딜레마는 덩굴식물로서 자신의 잎 바로 위에 다른 잎을, 그리고 그 잎 위에 또 다른 잎을 쌓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데 있다. (...) 이 식물은 자기 잎들에 스스로 무수히 구멍을 내어 그 사이사이로 빛이 스며들게 해서 전체 잎의 광합성을 돕는다. 공동체(라피도포라) 전체를 발전시키기 위해 개인(이파리)이 희생하는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구축한 셈이다. 

잎이 커질수록 자신의 잎에 구멍을 내고 찢으면서 아래쪽에 있는 잎들이 광합성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저자의 말처럼 이른바 '찢잎'이 공동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아요. 잎을 찢어내는 건 너와 내가 살기 위한 공생의 전략입니다. 아래에 작은 잎들이 죽으면 위에서 크는 잎들도 죽습니다. 덩굴식물들은 목숨 걸고 벽을 타며 경쟁하지만, 적어도 누군가가 희생되거나 생존해야만 이긴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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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이 되자 식물들은 성장을 잠시 멈추고 숨을 돌리는 중입니다. 급격한 기온차로 몇몇 잎은 하엽이 지기도 하지요. 하지만 하엽도 나름 운치가 있습니다. 그냥 즐기면 됩니다. 대신 이제부터 식물들에게 물은 조금씩 줘야 합니다. 여름 동안 물 주던 패턴으로 물을 주다가는 과습이 올 수 있거든요. 식물도 겨울엔 쉬어갑니다. 그래서 저는 겨울이 오기 전, 분갈이가 필요한 식물에게는 상토에 펄라이트와 같은 통기성 좋은 재료를 더 섞습니다. 물론 집 안의 온도차가 크지 않다면 필요하지 않아요. 

지난 300일간의 덩굴벽 채우기 프로젝트를 영상으로 정리해 유튜브 채널에 올렸습니다. 모아놓은 영상들을 편집하면서 새삼 식물들이 경이롭네요. 식물들의 경이로운 성장 과정이 당신께도 온전히 전달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아피스토 드림. 
📢News 유튜브 업로드 소식
📢Re: 아피스토 당첨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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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드려요!
junlike님은 apistotv@gmail.com으로 이메일 부탁 드릴게요!

✉️1029참사 희생자의 명복을 빕니다

이번 1029참사로 희생된 분들의 명복을 빌며,
희생자 가족분들께 진심 어린 위로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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