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먹어야 산다. 이 당연하고 보편적인 명제를 단어 하나만 바꿔서 순식간에 공포스러운 문장으로 만드는 방법이 있습니다. ‘은’을 ‘을’로 바꾸는 것입니다. ‘사람을 먹어야 산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신작 <본즈 앤 올>은 사람을 먹어야 살 수 있는, 살기 위해 사람을 먹는 사람들인 ‘이터(eater)’들의 이야기입니다. 단, 이 문장은 정확히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나의 취향으로서, 예컨대 미식을 추구하기 위해 ‘사람도’ 먹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본능적으로 식인에 대한 허기를 느끼는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씨네21 1381호에 기고한 글을 수정/보충한 글입니다.)



[NO.39]


사랑을 먹는 사람 :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를 결정한다


2022년 12월 3일



이터를 영화적으로 보다 익숙한 소재와 비교하자면 ‘뱀파이어’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터와 뱀파이어 모두 오로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다른 인간의 살갗을 물을 뿐이지만, 그 결과로 그 사람은 반드시 죽기 때문입니다. 내 삶을 이어가기 위해선, 그 무엇도 아닌 인간의 목숨을 필요로 한다는 비극. <본즈 앤 올>은 비극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 두 남녀 매런(테일러 러셀)과 리(티모시 샬라메)의 사례를 통해 인간의 생존 조건에 대해 말합니다. 사람은 무엇을 먹어야 살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이 엠 러브> 속 엠마와 안토니오의 새우 요리일까요, 아니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엘리오와 올리버가 먹은 복숭아일까요.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본즈 앤 올>을 통해 제시하는 그 답은 단호합니다. 바로 그 모든 ‘먹을 것’ 안에 담긴 사랑입니다.

  


영화의 초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18세 매런이 어느 날 세상에 홀로 남겨집니다. 매런의 이해할 수 없는 식성을 감당할 수 없는 아빠가 매런을 버린 채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엄마는 이미 어릴 적 자신을 버리고 집을 나간 상태입니다. 매런은 아빠가 남기고 간 녹음테이프를 재생해 봅니다. “널 더 이상 도울 수 없어.”라는 말로 운을 뗀 아빠는 이어서 매런에게 자신의 입장에서 지켜보았던 딸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매런의 첫 ‘이팅(eating)’은 베이비 시터였다는 것과 자신이 그것을 어떻게 수습했는지에 대하여. 매런이 두 번째로 먹은 사람이 누구였는지와 자신이 그것을 또 어떻게 수습했는지에 대하여. 아니겠지, 아니겠지 했는데 결국 딸의 본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때 느꼈던 절망감과, 단지 수습하고 또 수습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자신의 참담한 심경에 대한 아빠의 증언이 이어집니다.


아니 이어지는 것은 변명입니다. 너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 너를 더 이상 사랑해 줄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아주 긴 변명. 아직 어린 매런은 아빠가 자신을 떠난 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저 아빠가 마지막으로 남겨둔 출생증명서에 적힌 엄마의 주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길 뿐입니다. 엄마는 나의 존재에 관한 비밀을 알고 있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은 채, 아니 다 필요 없으니 이런 나라도 사랑해 줄 수 있는지 물어보기 위해 메릴랜드 주에서 미네소타 주까지, 1500km가 넘는 거리의 여정에 나섭니다. 매런은 그 길에서 자신과 같은 질문을 품고 있는 인물을 만납니다. 자신과 비슷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 리입니다. 매런은 리를 알아보고, 리도 매런을 알아봅니다. 그렇게 서로가 풍기는 모종의 허기를 알아챈 둘의 로드무비가 시작됩니다.

  


<본즈 앤 올>은 간단히 말해서, 매런과 리가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답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입니다. 둘이 정체성의 답을 찾기 위해 여행까지 떠나는 이유는, 그들의 정체성이 너무나 소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먹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은, 어지간히 먼 길을 떠나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 해답을 찾기가 어려운, 역대급 난이도의 희귀 정체성일 것입니다.


<본즈 앤 올>이 위험하게 느껴질 정도로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식인’이라는 것을 소수자의 영역에 포함시켰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인육을 먹는 사람들을 뱀파이어나 돌연변이 같은 ‘괴물’로 취급하는 대신, 소수자인 아웃사이더로써 보듬고 있습니다. 식인을 옳고 그름의 잣대가 아닌 다수자/소수자의 관점에서 ‘서로 다른 것’으로 바라보자는, 상당히 급진적인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특히 카니발리즘의 경우, 야만의 시대에서나 벌어졌던 일, 혹은 비현실 장르의 소재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현실이기에, 더욱 민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현실에서 소수자 위치에 있는 정체성들과 비교해 보면 감독이 도전한 그 난이도가 더욱 실감이 가실 겁니다. 요즘은 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많이 개선된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소수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숨긴 채 사는 것은 물론 정말로 고통스러운 일이겠지만, 그래도 꽤 오랫동안, 혹은 누군가는 평생을 그것을 오픈하지 않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또는 운 좋게 자신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을 만나 나름의 만족스러운 인생을 사는 것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식인을 하는 사람은, 그럴 수 없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 자신의 욕구가, 반드시 한 생명을 앗아가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배고픔도 배고픔이지만, 그것을 채울 때마다 느껴지는 죄책감과 거기서부터 비롯된 자기혐오 역시 큰 문제입니다. 그들에겐 결국 두 가지 옵션밖에 주어지지 않습니다. 배고플 때마다 아무나 먹는 괴물이 되거나,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이 감독이 누구입니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으로 한때 (혹은 누군가에겐 여전히) 틀림의 영역에 있었던 동성애를 보편적인 아름다움으로 훌륭하게 표현해냈었던 경력이 있는 감독이 아니겠습니까. 루카 구아다니노는 이번 영화에서도 전 세계의 아웃사이더들의 마음을 위무해 내는데 성공합니다. <본즈 앤 올>은 스스로를 유별나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그 누구에게도 영원히 사랑받지 못할 ‘단 한 명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든 외톨이들에게, 그 누구보다 외로웠을 ‘매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영화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영화 초반 “이런 사람은 나뿐인 줄 알았어.”라고 말하던 매런이, 마침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때 배경에 깔려 있는 아름다운 풍광은 그래서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옵니다. 외톨이들에게 그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한 편의 훌륭한 로맨스 영화이자 그 어떤 영화보다 무서운 공포 영화. 동시에 미국 중서부 지역의 아름다움과 쓸쓸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장대한 풍광을 담은 로드무비이기도 한 <본즈 앤 올>은, 루카 구아다니노의 최고작 순서에 지각변동을 일으킬만한 작품입니다. 지금 당장은 올해 8월에 열린 79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본즈 앤 올>을 맨 위에 올리고 싶은 심정입니다만, 과거 아쉬웠던 감독의 전작들을 다시 한번 천천히 살펴 본 다음 판단을 내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루카 구아다니노의 여정은 돌고 돌아 결국은 ‘러브’입니다. 사람을 먹는 사람도, 사람을 먹지 않는 사람도, 살기 위해 꼭 먹어야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프랑스의 유명 미식 평론가인 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Jean Anthelme Brillat-Savarin)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who we are)를 결정할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먹어야 삽니다. 아니 사람은 사랑을 먹어야 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하는 사람들이 다수의 자리를 넘보는 세상입니다. 그런 소수자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때마다 다음과 같은 말을 되뇌곤 합니다. "저 사람들은 사랑을 못 먹어서 그래." "나는 저런 사람이 되지 않을 거야."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신가요. <본즈 앤 올>을 보고, 온몸이 사랑에 절여진 누군가를 뼈까지 모조리 삼킨 매런의 앞날을 상상해 보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결정할 것입니다.

연말이네요. 맛있는 거 많이 드시길 바랍니다.



- ONE DAY ONE MOVIE by 김철홍 -

  

<본즈 앤 올>의 로맨스 장르적인 면모를 중점적으로 글을 써보았지만, 이 영화는 사실 로맨스만큼 호러 장르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영화입니다. 심지어 로맨스와 호러가 뒤엉켜 서로가 서로를 더욱 극대화하는 면모를 가지고 있는 영화이기도 한데요.


이를 설명하기 위해선 영화 속 예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아니 가장 신경 쓰이는 대상은 매런과 리의 입입니다. 입은 영화의 장르에 따라 완전히 다른 역할을 하는 무언가입니다. 로맨스 영화에서 입은 입맞춤을 통해 주인공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기표 중 하나이지만, 공포 영화에서, 특히 카니발리즘을 소재로 한 공포 영화에서 입은 영화를 한순간에 피바다로 만들 수 있는 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관련해서 단연 압도적인 장면은 이 영화의 오프닝입니다. 영화는 아직 길을 떠나기 전인 매런의 한때를 보여줍니다. 동성인 친구의 집에 초대를 받은 매런은 친구와 거실 바닥에 나란히 누워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친구를 향한 매런의 몸짓이 심상치 않습니다. 친구에게 키스를 하기 위해 친구의 얼굴에 조금씩 다가가는 듯합니다.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한 친구는 무심결에 자신의 손가락을 내밀고, 매런은 그 손가락을 자신의 입에 넣습니다. 동성 간의 에로틱한 스킨쉽이 진행될 것 같다는 우리의 예상은, 매런이 0.5초 만에 그 손가락을 깨묾과 동시에 깨져버리고 맙니다.


루카 구아다니노가 선택한 이 영화의 강력한 오프닝(원작 소설과 가장 다른 부분이기도 합니다)은 관객의 머릿속에 어떤 씨앗을 심어 놓습니다. 바로 이 영화는 언제 어디서나, 등장인물의 대사 속 단어가 하나만 바뀌어도 순식간에 유혈이 낭자하는 영화로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본즈 앤 올>은 인간의 이 있는 곳이라면, 무슨 일도 일어날 수 있는 영화인 것입니다. 설령 지금 막 사랑을 속삭였던 입이었다 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누군가의 입이 애정의 표시로서 상대의 입술을 깨무는, 영화에서 가장 로맨틱한 순간을 연출한다 하더라도, 영화를 보는 여러분의 머릿속에 끔찍한 상상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얼핏 완전히 반대에 있다고 생각했었던 로맨스와 공포의 감정이 실은 한 끗 차이에 불과했다는 것을 뼛속까지 온몸으로 깨닫게 하는, 감독의 탁월한 연출과 장르 해석이 돋보이는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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