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후원독자 전용] 님, 고제규입니다

안녕하세요,

후원독자님

〈시사IN〉 고제규입니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몇 달간 이어진 취재가 끝났습니다. 검찰이 사건 관련자들을 재판에 넘기면서 사회팀 기자들은 마무리되었다고 여겼습니다. 뭔가 아쉬웠습니다. 이 사건도 늘 하던 대로 취재하고 기사 쓰는 게 맞나? 〈시사IN〉이라면 뭔가 다른 취재를 해야 하지 않나? 여기서 끝내는 게 맞나?

그런 고민 끝에 기획 회의 말미에 툭 던졌습니다. “이 사건 우리가 끝을 보자. 어느 언론사도 안 한 방식인데, 힘들더라도 우리가 해보자.”

2013년 8월~2014년 9월까지 이어진 국정원 정치 개입 사건(댓글 사건) 법정 중계 기사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박근혜 시절인 그때도 지금처럼 언론이 장악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방송사 사장을 교체하고 취재 아이템을 제약했습니다. 〈시사IN〉〈한겨레〉〈뉴스타파〉〈오마이뉴스〉 정도만 경쟁적으로 취재를 이어 갔습니다.

통상 언론은 검찰 수사 단계에 취재를 집중합니다. 법원 취재는 유무죄 등 선고 결과만 기사를 씁니다. 재판 진행 과정은 건너뜁니다. 경험칙상 검찰 수사 때 드러나는 팩트는 전체 10%밖에 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 10%마저도 검찰 손을 탑니다. 검찰 수사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검찰이 언론에 흘려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민완 기자의 ‘외곽 취재’로 검찰의 언론 플레이를 뒤집기도 합니다.

2013년 당시 신입 기자였던 김동인·전혜원 기자 등과 사회팀이 특별취재팀을 꾸려 1심 재판 전 과정을 지면으로 중계했습니다. 법정은 녹음이 불허됩니다. 사진 취재도 금지됩니다. 법정 스케치를 담당할 일러스트레이션(삽화가)을 섭외했습니다. 어떤 경우는 노트북도 불허되는데 이 사건 재판장이 노트북 사용을 허락했습니다. 후배들은 매번 법정에 들어가 재판 내내 자판을 두들겼습니다. 판사, 검사, 변호사, 증인 말을 모두 받아쳤습니다. 오타투성이 초고를 취합해 중요 대목만 간추려 지면에 담았습니다. 어떤 공판 녹취록에는 ‘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 대목도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노트북을 치다 잠깐 졸았던 흔적이었습니다.

다른 취재를 병행하며 한 회도 빠짐없이 법정 중계를 이어갔습니다. 다른 언론사에서는 하지 않았던 실험이었습니다. 국정원 정치 개입 사건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한 후배는 검찰 수사 국정원 댓글 사건에 동원된 민간인의 지방에 있는 집을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했었습니다. 얼마를 받고 댓글 아르바이트를 했는지 들을 수 있었습니다.

15개월간 이어진 법정 중계 기사와 취재 과정에서 확보한 각종 자료를 모아 디지털 프로젝트 페이지 ‘응답하라 7452-시사IN 크라우드 저널리즘’을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매년 유지비를 내며 운영하고 있습니다. 접속하면 누구나 국정원 댓글 사건 관련 팩트 체크를 할 수 있습니다. 그 디지털 페이지에 나오는 인사들이 윤석열 정권하에서 다시 공직을 맡고 있습니다.

그 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명박 전 대통령 법정 중계도 이어갔습니다. 2022년 5월4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는 손준성 당시 대검찰청 수사정보정책관을 공직선거법 위반 등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습니다. 고발 사주 사건이 재판에 넘겨진 것입니다. 아마 공수처가 아니면 검찰은 기소조차 하지 않고 덮었을 사건입니다. 편집국 기획 회의 때 이 사건 역시 기록으로 남겨야 하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나경희 기자가 전담해 법정 중계를 시작했습니다.

그 기사를 따라 읽으면서 손준성 검사를 처벌하기 쉽지 않겠다고 여겼는데, 지난 1월31일 손준성 검사는 징역 1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재판부는 손준성 검사가 1·2차 고발장의 일부 작성·검토 등에 관여했고, 김웅 당시 미래통합당 후보에게 텔레그램 메시지를 통해 보낸 것도 인정된다고 판단했습니다. 검찰이 당시 유시민·최강욱 등 정치권 인사뿐 아니라 〈뉴스타파〉, MBC 기자를 노리는 고발장을 만들어 야권을 통해 제출하려 했다는, 이른바 ‘고발 사주’의 핵심 부분이 인정된 것입니다.

이 사건은 편집국장에서 물러나 취재기자로 복귀한 때 불거진 의혹이라 저도 취재한 적이 있습니다. 취재 당시 확인한 모든 디지털 정황과 증거는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손준성 검사가 근무한 대검찰청 수사정보정책관실입니다. 예전에 범정(범죄정보기획관)이라 불린 곳입니다. 사회부 취재기자라면 국정원 IO뿐 아니라 법정 수사관들을 접촉하기 마련입니다. 범정 수사관들은 기자와 하는 일도 비슷합니다. 이들은 정보 수집이 능합니다.

1995년 대검 중수부 산하에 범죄정보관리과(이후 범죄정보과로 명칭)가 설치됩니다. 1999년 대검 중수부에서 별도로 분리되어 범죄정보기획관실, 그러니까 범정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조직은 국정원처럼 몇 명이 근무하는지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풍문으로 베테랑 수사관만 40명으로 출범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때도 범정기획관 밑에 범죄정보1담당관, 범죄정보2담당관 체계였습니다. 1담당관은 부정부패·경제 사범 수집, 2담당관은 공안·선거·노동·대공 담당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인력분포는 1담당관실에 30여 명, 2담당관실에 10여 명 근무하는 체제였습니다.

그러다 대검 중수부가 폐지된 뒤 2013년 채동욱 총장 시절에 인력을 30명으로 줄이긴 했는데, 그 뒤에 슬그머니 40여 명으로 다시 늘어났습니다. 2담당관실에서 사실상 사찰에 가까운 정보를 가리지 않고 수집하는 걸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걸 무정형의 업무라고 부르는데, 동향 정보 파악에 가까웠습니다. 범정 수사관들이 하는 일은 기자들과 비슷합니다. 일일·주간·월간 단위로 수집한 정보를 보고합니다. 국세청이나 경찰, 기업의 대관 업무 담당자, 국정원, 기자 등과 정보를 교환합니다. 주요 정보는 검찰총장에게 보고됐고, 중요 정보는 과거 청와대 민정수석실에도 올라갔습니다.

검찰 권력과 정치적 동향에 민감한 검사들이 범정기획관 자리를 거쳐 갔습니다. 대표적인 게 우병우 범정기획관이고, 윤석열 대통령도 2009년 범정2담당관으로 있다가 대검 중수2과장으로 자리 이동했습니다. 그런 폐해 때문에, 문재인 정부 출범 때 범정 개혁론이 대두되었고, 문무일 총장 때 이름을 수사정보정책관실로 바꾸고 수사정보1담당관, 수사정보2담당관으로 체계를 바꿨습니다. 수사정보2담당관에서 수사 정보를 수집하면 1담당관에서 검증하는 시스템으로 바뀐 것입니다. 일종의 레드팀 작동 시스템입니다. 인원도 15명으로 줄였습니다.

그런데 후임 윤석열 검찰총장 시절 슬그머니 인원이 늘기 시작하더니 다시 30여 명까지 늘었습니다. 게다가 윤석열 검찰총장 시절 수사정보2담당관 쪽에서 과거 범정처럼 무정형 업무 활동을 한다는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수사 정보가 아닌 그 외의 정보를 총장을 위해 파악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단적으로 드러난 게 바로 판사 사찰 의혹 문건입니다. 수사정보2담당관이 생산한 문건이었습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 시절에 이 조직을 대폭 축소했습니다.

손준성 수사정보정책관이 연루된 고발 사주 의혹 재판이 한창 진행 중에,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전격 범정을 부활시키기도 했습니다. 재판부가 바로 그곳에서 고발 사주 관련 문건이 생산됐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저는 국기문란 사건으로 보고 있습니다. 윤석열 검찰총장 때 그가 지휘하는 손준성 수사정보정책관이 형사 처벌된 사건입니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던 검사 윤석열은 검찰총장이 된 뒤 사실상 검찰이라는 국가기관을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조직으로 운영한 셈입니다. 대검 수정관실은 총장이 관심을 가진 사건의 판사 사찰 문서뿐 아니라 윤석열 총장 장모와 관련된 의혹을 반박하는 문서를 만들었습니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검찰 조직이 검찰총장의 ‘로펌’ 노릇을 한 것입니다.

이 사건 취재 때 예전 범정 때 몸담았던 수사관들에게 묻기도 했습니다. 그들 역시 의아해했습니다. 판사 사찰 문건, 장모 문건 등 예전에 없던 일이 벌어지고 있다며 그들 혀를 차기도 했습니다. 이게 다 윤석열 총장 체제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손준성 검사가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검사 윤석열도, 대통령 윤석열도 어떤 반성도 하지 않았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손준성의 유죄는 대검 수정관실 유죄로 봅니다. 윤석열 검찰 유죄로 봅니다. 조직범죄로 봅니다. 이 사건은 절반만 수사되고 기소되었습니다. 손준성 검사 ‘위’를 수사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 위가 누구인지 대략 짐작은 갑니다. 기소된 손준성 검사에 대해 징계하지 않고 덮은 세력입니다. 재판을 받는 손 검사를 검찰의 꽃이라는 검사장으로 승진시킨 세력입니다.

저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2021년 9월 고발 사주 의혹이 언론에 보도되자, 당시 윤석열 후보는 ‘괴문서’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고발 사주를 폭로한 조성은씨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이걸 인터넷 매체에 제일 먼저 제보 했다는 사람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알고 계시죠. 과거에 그 사람이 어떤 일 했는지, 여의도 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고 다 들었을 거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공익 제보자가 되는가.” 후보 윤석열은 사과나 반성 대신 메신저를 공격한 것입니다. 재판부는 괴문서가 아니며, 조성은씨 폭로가 맞다며 그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1년 9개월간 이어진 법정 중계 기사도 모아 프로젝트 페이지를 만들 계획입니다. 이제는 〈시사IN〉에서 제 위로 선배들이 별로 없습니다. 어느 사이 저도 ‘꼰대’라 불리는 위 그룹에 있습니다. 후배들이 마음껏 기사를 쓸 수 있게, 취재 외적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시사IN〉 디지털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개편하고 있습니다. 포털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콘텐츠를 유통할 수 있는 실험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유튜브 실험입니다. 프린트 미디어 〈시사IN〉이 굳이 영상 플랫폼에 맞는 콘텐츠를 만들어야 하느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후배들도 있습니다. 지난가을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글쓰기 특강을 한 적이 있습니다. 20명 남짓한 고등학교 1학년 2학년 학생들에게 오늘 아침에 뉴스를 접한 사람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2명이 손을 들었습니다. 유튜브에서 뉴스를 보았다고 답했습니다. 또 물었습니다. 스마트폰에서 검색용 플랫폼을, 무엇을 이용하는지 물었는데, 학생들 모두가 ‘유튜브’라고 답했습니다. 뉴스와 콘텐츠가 유튜브에서 유통되는 시대에 〈시사IN〉이라는 브랜드 노출 기회를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무리지만 주 5회 방송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뒤늦은 고백이지만 제가 국장 때 독자 후원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덜컥 만들어놓고 아무것도 해드린 게 없는데 님의 후원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기사로 콘텐츠로 보답해야죠. 여전히 꼰대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늘 후배들에게 ‘언론 본령’ ‘저널리즘 원칙’을 잊지 말자고 잔소리합니다. ‘〈시사IN〉다운 기사를 쓰자’ ‘정치권력을 감시하자’ ‘자본 권력을 들추자’ ‘다른 언론에서는 볼 수 없는 콘텐츠를 만들자’.

꼰대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이런 잔소리를 그치지 않는 데는 작은 바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삼성 보다 하루 늦게 문을 닫자’는 바람입니다. 삼성 기사 삭제 사건으로 창간한 〈시사IN〉이기에, 삼성그룹보다 하루만 더 생존하자는 희망입니다. 이 말에는 독립 언론도 100년 기업이 될 수 있다는 큰 바람이기도 합니다. 님의 후원 덕에 저는 이 희망이 현실이 될 수 있다고 여깁니다. 마음 같아서는 님과 얼굴이라도 맞대고 차 한잔하고 싶은데, 뉴스레터로 대신합니다. 늘 고마운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실험은 멈추지 않겠습니다. 최고의 콘텐츠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2024년 3월

고제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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