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나의 엄마 엄경분씨는 내가 그림을 좋아하도록 만든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강제성은 없었다. 그저 나를 낳은 시점에 당신이 활용할 수 있는 최대치의 재능이 미술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경분 씨는 28살에 나를 낳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술 학원에서 일도 해보고, 대학생 연합으로 크로키 모임도 만들고 전시도 하고 동창과 미술 학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취업은 잘 안되었다. 80년대 후반 미대를 졸업한 학생이 갈 수 있는 직군을 모두 도전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경분 씨에겐 취업문이 좁았다. 또래 친구들이 보통 20대 초반과 중반쯤에는 결혼을 가는 것을 보니 독립을 갈망했던 경분 씨는 자기 좋다는 남자는 다 시시하다며 마다하고 현재의 나의 부친과 도피성 결혼을 한다.


나는 엄마의 결혼을 반대하지는 않지만 지지하지도 않는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반대하려면 나는 엄마 친구로 태어났어야 했다. 그러면 도시락 싸고 말렸을 것이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엄마의 결혼 생활을 최대한 지지하지 않는 것, 사별이든 이혼이든 그 과정에 함께 하는 것이다. 엄마의 결혼 생활이 행복했어도 반대하고 지지하지 않았을 텐데,  결혼과 육아가 엄마의 재능을 끊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경분 씨는 정신승리를 위해 어차피 그림을 그려도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 말하지만, 나는 엄마가 실행하지 않은 일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고 싶다. 적어도 내가 유아기 때 본 엄마의 드로잉은 환상적이었고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는 열망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나를 낳은 후로 꽤 많은 그림을 그렸다. 엄마의 클라이언트는 나였기 때문에 정말 자판기 수준으로 이미지를 뽑아냈어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모의 악덕 클라이언트는 자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엄마의 워 라벨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시간과 상황을 무시한 채 계속 그림을 요청했다. 엄마는 성실하게 공룡도 그려주고 공주도 그려주고 자동차도 그려주었다. 지금 따지면 아날로그식으로 구현되는 AI 같다고나 할까. 


 고등학생 때 피아노를 꽤 잘 치는 친구가 있었고, 같은 반 친구들은 그 친구가 바로 피아노를 치는 것이 재밌고 신기해서 매주 점심시간마다 강당으로 불러 듣고 싶은 노래를 요청했다. 그때의 쾌감을 잊을 수 없는 아마 그림도 비슷할 것이다. 종이와 펜만 있으면 지금 당장 내가 보고 싶은 이미지를 볼 수 있다는 시각적 즐거움은 정말 엄청난 중독성이 있다. 우스갯소리지만 내 경우 단독으로 작가(엄마)를 고용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나도 자연스럽게 프리랜서가 된 것이 아닌가 억지스러운 추측을 해본다. 


엄마가 창작을 그만둔지 오래되었지만 20대 동안 배우고 익혀서 만든 수준은 세월이 지나도 내려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나에게는 가장 날카로운 평가를 해주는 내부 평가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엄마의 평가 기준은 예술성이기 때문에 대중성이 필요할 때는 잘 먹히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어 내가 알아서 잘 흘려듣기도 해야 한다. 



요즘은 엄마의 작업을 독려하고 있다. 엄마가 잊은 감각을 다시 찾기 위해 이제는 내가 엄마의를 화구를 준비하는 일상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