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비 책타래 #번외편: 언어 없는 이들이 서로 존재를 기대는 그곳―『의존을 배우다』를 읽고.

오랜만에 돌아온 책타래 번외편!

오늘은 『눈부시게 불완전한』(책타래에서 소개되었어요.)을 옮긴 하은빈 선생님의 『의존을 배우다』 리뷰를 전합니다. 장애와 돌봄, 모든 취약한 존재의 이야기는 과연 어떻게 읽혔을까요? 『의존을 배우다』와 자신의 삶을 연결해 쓴 이 리뷰를 통해, 몸과 마음으로 행하는 더 다양한 돌봄의 이야기가 피어나길 바라봅니다.🌷

배너: 『의존을 배우다』에 관해 더 알고 싶다면?
자리 없는 이들의 자리에서, 언어 없는 이들의 언어로


💌하은빈



이 책의 저자 에바 페더 키테이 앞에서 발표를 한 일이 있다. 석사과정 2학기 차에 들은 철학과 수업에서였다. 그가 보내준 원고를 가지고 한 학기 내내 스터디를 한 후 수업 마지막 시간에 저자와의 대화를 나누게 된 것이다. 그는 평온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가진, 근사한 색깔의 은발을 지닌 호호 할머니였다. 나는 발표공포증으로 끔찍이도 부들부들 떨면서 서툴게 번역한 영문 발제문을 떠듬떠듬 읽었다. 내 얼굴은 긴장감으로 종내 질려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수업 직전에 어떤 학생으로부터 발제문의 문법 오류를 지적받은 일로 줄곧 벌겋던 것 같기도 하다.

 

발표 이후로 토론이 이어졌다.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이 한 학기 동안 굳이 드러내지 않은 우아하고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질의를 던질수록 내 입은 점점 더 애타게 가물어갔다. 키테이를 실제로 보자 꼭 건네고 싶은 말이 떠오른 것이다. 수업이 끝나기 직전 나는 손을 들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은 대강 이랬다. 나는 일상의 많은 시간을 돌봄노동에 쓰고 있어요. 장애나 돌봄 등의 주제가 철학의 의제가 되는 일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작업을 해온다는 게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는 사실을 알아요. 철학자로서 그리고 돌봄제공자로서 평생에 걸쳐 그런 작업을 해주어서 고맙습니다.

 

나는 그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던 것 같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북받쳐오는 내 슬픔의 자리를 응당 인정받아 마땅하다는 듯이 그 시간과 공간을 점령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건 내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중증장애인의 돌봄노동을 하면서 살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옆집 친구 찬이가 그 무렵 2년간의 코마 상태를 지나 세상을 떠났기 때문일지도, 수업과 스터디 내내 느꼈던 소외감과 외로움 때문에 아마도 평생 학계에서 비슷한 경험을 해왔을 그에게 멋대로 동질감을 느껴버렸기 때문일지도, 열정적이고 다소 공격적인 태도로 키테이에게 반론을 쏟아내고 있는 젊고 열정적인 철학과 남학생들이 너무 얄밉고 재수가 없었던 나머지 일종의 ‘당사자성’을 업고 등판하여 ‘진정성’이나 ‘살아진 경험’ 따위를 어쭙잖게 휘두름으로써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입을 연 순간부터 물벼락을 맞은 듯 차고 얼얼한 수치심으로 휘청거렸다. 이미 활시위를 떠난 말이 과녁을 형편없이 빗나가리란 예감으로 처음에 하려던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그 누구의 코도 납작해지지 않았음은 물론이요, 키테이가 무어라고 대답해주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몹시 떨었던 탓에 그는 내 말을 알아듣지조차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당시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곤 수업이 끝나자마자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여기저기 뚝뚝 흘리며 도망하듯 강의실을 빠져나간 것이 전부였다.

 

그 순간 나는 왜 그런 짙은 패배감에 사로잡혔던 것일까? 나는 입을 여는 바로 그 순간에 그곳이 정녕 내 자리가 아님을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 같다. 내 자리가 아닌 것만큼이나 어쩌면 에바 키테이의 자리도, 그의 중증 인지장애인 딸 세샤의 자리도, 내가 오랜 시간 돌봄을 제공해온 연인의 자리도, 내 친구 찬이의 자리도 아님을 알았던 것 같다. 그곳은 실로 지식과 앎을 둘둘 두른 이들의 자리였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세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으며 자신의 기쁨과 슬픔을 언어로 표현을 할 수 있는 자들의 자리였다.

 

그러나 그 모든 언어 없는 자들의 ‘자리 없음’에 맞서 에바 키테이가 평생을 싸워왔다는 가냘픈 사실만큼은 내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다. 어쨌거나 그때 우리가 두고 논쟁했던 키테이의 원고, 내가 스터디에서 한 학기 내내 읽었던 원고가 바로 이 책, 『의존을 배우다(Learning from My Daughter: The Value and Care of Disabled Minds)』다.

 

 

영어로 읽던 대학원 시절이나 국문으로 읽는 지금이나 이 책은 내게 다소 벅차다. 제목이 『의존을 배우다』인데, 두 차례에 걸쳐 이 책을 접하고 나서도 내가 과연 의존을 잘 배웠는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경험이 다른 이들에게도 쉽지 않다면, 왜 그런지에 대해서 되도록 제대로 잘 설명하고 싶다.

 

이 책의 논증을 따라가는 것이 적지 않은 집중력과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작업에서 아무도 그렇게까지는 상세하게 묻지 않는 것들을 굳이 질문하는 집요함을, 각각의 논변에 일일이 이름을 붙이며 논의의 지도를 소상히 펼쳐놓는 세심함을 본다. 그는 아마도 우리의 상식 전반에 걸쳐 너무 광범위하고도 흐릿하게 흩어져 있는 장애인의 삶과 관련한 쟁점들을 줍고 털어 한데 모으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했으리라. 그것들을 한데 모아 분류하고 가르는 일의 지리함을, 그 사이로 뻗어나가 있는 모세혈관처럼 가느다란 논리의 길들을 모조리 훑는 지난함을 견뎌야 했으리라. 그것은 차라리 막막하고 외로운 일이었으리라고 나는 짐작한다.

 

이 책에 담긴 실로 포괄적이고 상세한 논증 중에서도 내가 가장 주의 깊게 읽은 부분은 8장 「돌봄의 완성: 돌봄의 규범성」이다. 이 장에서 키테이는 묻는다. ‘바람직한 돌봄’이라는 규범적 돌봄의 의미를 어떻게 규정하고 완성할 것인가? 이 질문은 궁극적으로 돌봄의 가장 어렵고 까다로운 조건에 놓인 돌봄수용자들의 입장에서 던져짐으로써 그들의 자리를 모색한다. 인지장애를 가진 그의 딸 세샤도, 긴 시간 잠들어 있었던 내 친구 찬이도, 성인 여성으로 성장할 기회를 영영 박탈당해버린 애슐리 엑스도, 그 외의 세계에 있는 그 모든 ‘하위주체’들도 이른바 ‘대문자 언어’로 소통하지 않으며 자신의 상태를 표현할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돌봄제공자의 배려와 보살핌이 그의 선한 의도와 상관없이 그들의 삶을 저해할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심각한 해악을 미치는 행위일 위험 또한 적지 않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돌봄의 규범을 정립해야 하는가?

 

궁극적으로 키테이의 철학이 가진 기획은 다음과 같은 질문과 씨름하는 일이다. 누군가의 마음에 관해 궁극적으로 앎을 가질 수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어떻게 돌봄을 상호적인 것으로 이해할 것인가? 그럼으로써 의존을 우리 삶의 근본적인 조건으로서 정초하며, 타인의 돌봄에 삶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돌봄수용자들의 주권을, 자율성을, 저자성을, 행위주체성을 확립하며, 그로써 누군가의 ‘피어나는 삶’을 뒷받침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일이 중요하고도 급진적인 이유는 그 질문이 종내 철학으로는 도무지 답을 도출할 수 없는 곳, 궁극적인 무지와 불가능성을 겨냥한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으며 또 해야만 하는 일은 무엇일까? 이렇듯 앎도 언어도 무용한 삶을 두고 우리가 겪는 낭패를, 결국 또다시 앎과 언어를 사용하여 다루고 돌파할 수밖에 없다면…… 들을 수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어떻게든 들으려 귀 기울여야 한다면…….

 

나는 키테이의 책을 경유하여 그것이 그 막막한 불가능성 앞에서 겸손해지는 일, 우리가 가진 무지의 지형을 파악하고 그 선명한 경계선 앞에서 더듬거리는 일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철학자로서 키테이가 이성과 추론의 무용성 앞에서 오래 헤맸듯이. 어쩌면 내가 그 강의실에서 그럴싸한 말하기를 해내는 데에 처참히 실패한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가리키고자 했던 삶들이 마땅히 내 무릎을 꿇렸으므로. 키테이가 공들여 써 내려간 문장들을, 그의 딸 세샤가 키테이에게 평생에 걸쳐 가르친 것을 나는 일종의 깨끗한 패배와 항복으로 읽는다. 이성이 전진을 멈추고 인식이 무력해지는 그곳에 새로이 생겨나는 자리를 본다. 자리 없는 이들의 자리, 앎도 지식도 합리도 없는 바로 그곳에 비로소 언어 없는 이들이 모여 서로의 존재를 기댄다.

 

키테이는 이 책의 후기에서 이렇게 썼다. “세샤는 내 눈을 깊이 쳐다보며, 내가 이해하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무엇을 이해하라는 걸까? (……) 대부분의 순간 내가 이해하는 것은 거기에 영혼이 있다는 것이다. (……) 세샤의 몸이 세샤의 영혼이다.” 나는 키테이의 문장들을 읽으며 단호하고도 영원한 불가지성 앞에서 평등하게 무너진 이들이 서로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는 풍경을 본다. 이해하기를 기다리고 또 이해받기를 실패하는 이들로부터 의존을 배운다. 자리 없는 이들의 자리에서, 언어 없는 이들의 언어로, 언젠가는 이해할 수 있기를 기다린다. 이 모든 불완전함과 취약함을. 모름과 모자람을. 우리 삶의 가장 불가해한 부분을 이루는, 우리 자신의 몸과 영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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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쓴 하은빈은,

목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대학에서 미학을 공부했으며 글을 쓰고 공연을 한다. 불구의 몸, 상한 마음, 잘못한 사람에 관심이 있다. 『눈부시게 불완전한』(2023)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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