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웹에서 보기 | 구독하기

VOL.126 사계절 시리즈: 봄
『말랑한 고고학』 김상태_4화 안료의 발견
_인간, 자연의 색을 탐하다 (2)
🎨 맥락 
사물의 가치를 판단할 때 중요한 것은 맥락인 듯합니다. 생산 과정과 이후의 쓰임을 살필 때 진가를 알게 됩니다. 구석기 시대의 안료는 어떤 맥락에서 만들어졌을까요. 그 맥락은 지금도 유효할까요. 지난 연재글에 이어 구석기 시대의 안료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안료에 대한 지난 글은 인간이 색을 처음 소유하고 사용을 시작했던 무렵의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대부분의 유용한 것들은 시간이 감에 따라 의존도가 커지고 존재감이 확대되기 마련이다. 안료 역시 점차 색채가 다양해지고 사용 범위도 확대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 의식의 중요한 부분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제부터 희소한 고고학 자료들을 통해 그 과정을 조심스럽게 되짚어 가보자.

초기의 안료는 모두 자연 상태의 물질에서 기원한, 말 그대로 ‘천연 안료’들이다. 자연에서 채취한 것이라서 질적으로 낮다거나 가치가 떨어지지는 않는다. 발색과 안정성 측면에서는 오히려 인공 안료보다 탁월하다. 천연 안료가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사용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국화를 그리거나 전통 건축의 화려한 단청을 입히는 데에 반드시 사용되는 석채石彩, 혹은 암채岩彩가 대표적이다. 천연 안료의 단점이 하나 있다면 전편에서 잠깐 언급했듯 대량 생산이 어렵다는 것이다. 생산에 많은 노동력이 많이 필요하고, 그 희소성 때문에 현대에도 여전히 고급 안료로서 대우받고 있다. 이것을 대체하기 위해 화학 기술을 이용한 합성 안료들을 개발해왔지만 천연 안료의 발색과 안정성에는 미치지 못한다. 구석기 시대의 ‘원시인’들이 만들기 시작한 천연 안료가 지금까지도 대단한 존재감을 뽐낸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안료의 원재료들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 인간이 가장 일찍, 그리고 가장 많이 사용한 안료는 빨간색이다. 자연 상태에서 빨간색은 적철석hematite을 많이 함유한 토양이 공기 중의 산소와 결합하여 산화되면서 만들어진다. 우리 주변에서 관찰되는 황토는 대부분 이런 성인成因을 갖고 있다. 한때 짙은 빨간색을 만들기 위해 흙을 가열했을 것이라는 가능성도 열어두었다. 하지만 가열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분석 기술이 개발된 이후 구석기 시대에는 안료를 가열 처리한 사례가 없음을 확인했다. 빨간색과 비슷한 계열인 노란색, 갈색 등은 적철석의 함유량 차이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노란색과 갈색은 빨간색에 비해 매우 희귀한 편이다. 빨간색 못지않게 많이 사용한 색은 검은색이다. 주변에 흔하고 누구나 쉽게 떠올리는 숯이 검은색의 주재료이다. 희귀한 재료지만 망간 산화물 역시 검은색이 된다. 검은색 안료의 재료가 숯인 경우에는 탄소연대측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또 다른 면에서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의 가치를 지닌다. 한편 가장 흔할 것만 같은 흰색은 오히려 희귀하다. 흰색 안료는 주로 방해석이나 활석·석고·석영 같은 암석에서 채취할 수 있다.

[그림1. 안료 가루(왼쪽에서부터 황토, , 망간, 방해석, 석고의 가루)]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들이지만 그것을 채취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황토는 다른 재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풍부할 것 같지만,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결코 흔하게 발견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게다가 황토 중에서도 산화철이 특히 많이 함유되어 있는 특정 지점을 찾아내야 했다. 안료에도 일종의 광산이 존재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자연으로부터 구해야 했다. 동물이 많아서 사냥하기 좋은 곳, 석기의 재료가 되는 좋은 돌이 풍부한 곳, 계절 따라 갖가지 열매를 채취할 수 있는 곳 등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그 데이터베이스 안에 안료 채취 광산들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유적에서 발견되는 안료의 원산지 연구 결과들을 참조하면 유적으로부터 최대 수십 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기도 했다. 현대의 제작자들 역시 재료 구하는 일에 가장 큰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예나 지금이나 귀한 자원을 얻는 일은 변함없이 어렵다.

자연에서 재료를 구했다면 이제부터는 사용할 수 있는 안료로 가공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흙에서 채취한 경우라면 고운 입자를 정제해야 한다. 돌을 채취했다면 곱게 빻아 불순물을 제거하고, 역시 정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앞서 소개했던 블롬보스 동굴과 카푸제 동굴에서 발견된 10만 년 전 안료는 이 과정을 거친 것들이다. 그런 이유에서 그보다 훨씬 오래전, 즉 10만 년 이전부터 자연 상태에 가까운 안료를 사용하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료 사용의 범위가 넓어지면 그에 맞춰 가공 방법도 다양해져야 한다. 만일 아무런 가공 없이 사용한다면 색상도 균질치 않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결과물의 장기 보존이 어렵다는 것이다. 학생 시절 흔하게 사용하던 분필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분필은 정제된 석고 가루를 굳힌 하얀색 안료이기도 하다.  이 분필은 매끈한 칠판에는 잘 써지지만 울퉁불퉁한 벽에는 잘 그려지지 않는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워지고 만다. 이처럼 안료는 사용 장소와 방법에 따라 서로 다른 가공법이 필요하다.

[그림2. 블롬보스 동굴의 안료 가공 세트(S-조개류, B-뼈류, L-석기)]

📝 김상태
구석기 고고학을 전공하고 전기 구석기 시대 뗀석기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강원도 양구군 상무룡리 유적 발굴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구석기 연구를 시작했으며, 그 밖에 제주도 최초의 구석기 유적인 서귀포시 생수궤 등 여러 발굴에 참여했다.

1996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로 박물관 업무를 시작했으며, 이후 유물관리부와 고고부, 전시팀 등 여러 분야에서 일하며 관련 저술과 전시로 활동을 넓혔다.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제주박물관, 국립춘천박물관, 국립한글박물관 등에서 일했으며, 현재는 국립나주박물관 관장으로 일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최초의 진화 인류학 특별 전시 〈호모 사피엔스: 진화∞관계&미래?〉(2021년 5~9월) 등을 주관했다.

지은 책으로 구석기 시대에 관한 한국 최초의 교양 입문서 『단단한 고고학』, 구석기 시대에 인류가 사용한 도구를 연구한 『한국 구석기 시대 석기군 연구』와 『한국미의 태동 구석기·신석기』(공저), 박물관 큐레이터와 큐레이터 지망생을 위한 실용적인 유물 관리 지침서 『박물관 소장품의 수집과 관리』 등이 있다. 
『말랑한 고고학』 4화입니다. 매번 고고학의 효용에 관해 생각하고 있지만 이야기 자체가 흥미롭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즐거움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을 텐데 이번 연재가 독자에게 무언가 채워지는 기분을 선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난 북뉴스는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을 앞두고 발행한 『사람을 목격한 사람』 고병권 작가 인터뷰였습니다. 이번에도 피드백에 답합니다.

*5월 중 북뉴스 전반 리뉴얼 작업이 있을 예정입니다.
다음 회차 때 자세한 안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독자 | 🎱: 담당자

👀 찰리보라운
『묵묵』에 이어 읽은 『사람을 목격한 사람』. 작가님 인터뷰에 보니 책과 사람이 구분이 안 되는 것 같네요. 일체화된 작가와 책. 밀도가 대단합니다. 다음 책도 기대합니다.

🎱
안녕하세요, 찰리보라운 독자님. 책의 제목처럼 사람이 느껴지는 그런 책입니다. 이렇게 밀도가 높은 책은 참 귀하지요. 밀도를 알아보는 독자는 더욱 귀하고요. 피드백 감사합니다.

뉴스

도서: <계급 천장> (샘 프리드먼, 대니얼 로리슨 지음 | 홍지영 옮김 | 26,000원) 
*도서는 제공되지 않습니다.

기간: 4월 29()부터 5월 31()까지 약 한 달

대상: 독서모임을 운영하고 있거나 모임을 꾸릴 예정인 독자




장소: 각 책방(신청자들이 책방에 함께 모여 온라인 (줌zoom)
일시: 2024년 5월 11일 토요일 오후 3시
출연: 김소영(『어린이라는 세계』 작가)
신청: 각 책방 인스타그램, 홈페이지, 현장 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