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마틴 전 총리는 정치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인 폴 마틴 시니어는 외무부 장관을 포함해 25년간 장관직을 수행한 집권 자유당의 원로였습니다. 자유당 당수직에도 도전했지만 결국 총리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훗날 본인의 취임식에서 마틴 전 총리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내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가 못이룬 꿈을 자신이 대신 이뤘다는 생각에 감개무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틴 전 총리는 정치에 발을 들이기 전 변호사와 기업가로서 커리어를 쌓습니다. 1969년 32세였던 그는 ‘파워 코퍼레이션’이라는 기업에서 CEO의 비서로 일하고 있었는데 당시 파워 코퍼레이션이 ‘캐나다 스팀십 라인(CSL)’이라는 해운사를 인수하자 그곳의 이사로 지목됩니다. CSL의 CEO 자리까지 올라간 그는 이후 회사가 어려움에 빠지자 동료들과 함께 CSL 그룹을 직접 인수합니다. 인수 후 CSL의 글로벌 진출을 성공적으로 이끈 마틴 전 총리는 1988년 자유당 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사실상 CSL에서의 직을 모두 내려놓습니다.
정계 입문 이후 그는 2년만에 자유당 총재 자리를 두고 경선 레이스를 펼칠 정도로 빠르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같은 당 장 크레티앵 후보에게 총재 경선에서 패했고 크레티앵 의원이 이후 10년간 총리로 집권하면서 그는 총리의 꿈을 10년간 접어놓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캐나다 국민들에게는 크게 다행인 일이었습니다. 크레티앵 전 총리가 정치적 경쟁자였던 마틴 당시 의원을 재무장관으로 임명했고 이때 그가 주도적으로 연금 개혁을 단행했기 때문입니다. 연금 개혁 외에도 그는 재무장관으로 재직하면서 27년만에 처음으로 균형예산을 달성하는 성과를 냈습니다. 향후 5년간은 흑자 재정을 유지했습니다. 당시 캐나다 정계에서는 그를 ‘양심적인 자본주의자’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2. 재정건전성・소통・정부 주도... 캐나다 연금개혁의 특징
마틴 총리가 주도한 1990년대 캐나다 연금개혁은 왜 가장 성공한 연금개혁 사례 중 하나로 평가받는 것일까요? 가장 큰 이유는 캐나다 연금의 건전성을 눈에 띄게 개선시켰기 때문입니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연금 개혁 논의에 불이 붙었던 1998년 캐나다는 오늘날 한국처럼 출산율 저하 및 기대수명 증가, 2011년부터 본격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베이비붐 세대의 대거 퇴직으로 향후 연금 지출이 급격히 증가할 것으로 우려됐습니다. 마틴 전 총리는 인터뷰에서 “내가 재무장관이 됐을 당시 캐나다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비율은 124%로 주요 산업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이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캐나다 연금의 미적립 부채는 전체 국가 부채보다도 많다는 사실을 보고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미적립 부채란 연금 가입자가 받기로 되어 있는 연금 급여에서 가입자들이 납부할 보험료와 적립된 기금액을 뺀 차액을 뜻합니다.